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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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균하이라이트 내용_조선일보가 사상계를 인수하려다 실패한 이야기
구술내용_
김승균은 4.19혁명에서부터 남북교류운동에 이르기까지 반독재투쟁과 통일운동에 진력한 대표적 인물이다. 《사상계》 책임편집인 시절 5.16쿠데타 9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고발하고자, 당시 동빙고동 ‘도둑촌’이라 불리던 곳을 소재로 한 《사상계》 5월호의 권두시를 쓰도록 김지하에게 청탁한 것이 담시 ‘오적(五賊)’이 탄생하게 된 경위였다.
구술자는 ‘오적(五賊)’이 실린 《사상계》가 3일 만에 매진되고, 야당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려 20만 부기 발간되어 큰 파문이 일자 박정희 정권이 탄압하고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을 소상히 진술하였다. 또한 《사상계》가 폐간되기 전 《조선일보》가 인수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또한 《민주전선》에 실린 ‘오적(五賊)’에서는 박정희와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군 ‘장성’을 뺀 ‘4적(四賊)’이었다는 것과 김지하의 처음 원고에는 ‘오적(五賊)’을 고발한 ‘꾀수’가 잡혀가는 것으로 끝났는데, 구술자가 지적하여 ‘오적(五賊)’이 벼락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나게 했다는 대목은 이번 구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구술자는 ‘오적(五賊)’사건 이외에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민주수호청년협의회의 창설 등 민주화 투쟁에 관한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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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
하이라이트 내용_원주부정부패규탄대회 투쟁 상황
구술내용_
5.16쿠데타 후 무위당 장일순과 김영주는 체포되었고, 4.19혁명에 가담했던 구술자는 입대하였으나 장일순 선거를 도왔다는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폐결핵으로 제대한다. 그 후 원주에 정착한 김지하, 박재일 등과 교우하던 중, 1971년 10월 원주부정부패규탄대회에 행동대원으로 참여한다.
1972년 남한강수해가 났을 때 재해대첵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구술자는 지학순 주교의 명에 따라 광산 현장에서 3년 동안 재해수습 책임을 맡아 소비조합을 구성하는 등의 업무 수행을 했고, 후일 광부 출신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기까지 했다.
구술자는 1971년 10월 5일 일어난 원주부정부패규탄대회,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등과 신용협동조합운동과 한 살림운동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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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청계피복노조원들로 구성된 청우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종인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재단보조로 취업하여 전태일을 만나 임현재, 이승철, 신진철 등과 함께 삼동친목회(삼동회)를 조직한다. 삼동회는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전태일은 분신했고, 그때 최종인은 바로 옆에 있었다.
이후 전국연합노동조합 경계피복지부가 결성되었고 1971년 9월 12일 최종인은 3대 지부장에 선출된다., 노사협의회의 결성, 소모임의 활성화, 단체협약 조인 등 개선이 이루어지다가, 1973년 5월 노동교실 개관 때 함석헌 선생을 초청한 것이 문제가 되어 노동교실을 빼앗기는 등 수난을 겪게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1976년 6월 9일 지부장에서 물러나 노조활동에서 손을 뗀다.
노조활동에서 물러난 후 사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현재는 전태일기념관 일과 장학사업을 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