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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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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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웅구술자 강병웅은 1941년 9월 29일 충북 보은군 해동면 용군리에서 태어났다. 4‧19 당시에는 청주농고 3학년생으로 학도호국단 간부는 아니었다.4‧19 당시는 3‧15 부정선거로 얼룩진 혼탁한 사회 분위기였고 마산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고교생들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구술자는 당시 청주 시내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다른 학교 학생들도 같이 있었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경북대 사대부속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등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자유당 독재는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외침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늘을 뚫었고 이로 인한 국민의 경악과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당시 청주에는 청주사범학교, 청주농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공업고등학교, 세광고등학교, 초지여자고등학교, 일신여고, 청주기술고등학교 등등 비교적 학교가 많이 있었는데 실제로 연합시위 계획은 있었지만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구술자는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결사반대한다', '자유당 독재는 물러나라',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 등등의 구호를 용지에 2,000여 장 써서 가방에 넣고 4월 19일 화요일 아침에 등교하여 반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구호문은 직접 볼펜으로 쓴 것이었다.시위 때 시민들은 비교적 찬동의 눈빛을 모두어 주었지만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고 반정부 행위에는 두려움이 뒤따랐다.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정부적 행위라고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구술자는 구술자의 하숙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계속적인 연계활동 특히 청주고 이내필, 지훈택, 이태진 등의 이름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고등학교의 시위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구술자는 선봉에 서서 사회 분위기 쇄신을 도왔음을 증언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63년도와 2002년도에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좋은 면만 생각하고 좋은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꼭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그렇게 해야 이 나라도 대대로 발전이 되고 좋은 자유민주국가가 될 것이란 말이었다. 시위가 끝난 다음에 학교는 휴교령이 있었고 휴교령이 끝난 다음의 분위기는 학생들이 다시 모여 술렁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공부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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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덕구술자 권오덕은 대전시 대흥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고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녔다.3.8 시위 당시에는 대전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2학년 진급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TV도 없었고 방송도 듣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집에서 구독하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을 볼 수 있었고 잡지로서는 형이 구독하는 『사상계』를 열심히 읽기도 했다.그 당시 자유당 독재정권은 십년 동안 계속되었고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이 학생들로 하여금 봉기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전고 학생들은 그 당시 수준이 높고 조숙한 학생들이어서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충분하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군대조직과도 같은 학도호국단 활동이 학생들을 옥죄고 학생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도구로 쓰였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타계를 하고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전에 와서 유세를 한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거기에 가서 유세강연을 듣고 우리의 뜻을 야당 부통령 후보에게 전달을 하고 시위를 하자고 해서 지당한 일로 생각하고 참여를 하게 되었다.대전고 3.8 시위는 진정한 학원민주화운동이고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의 항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억에 새로운 것은 학교 옆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철조망 사이로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모습, 경관이 말을 타고 와서 총을 겨누고 발사하던 공포 분위기(확인 결과 그 실탄은 공포탄이었음), 바가지에 물을 타서 염산을 뿌리던 가슴 섬뜩한 광경, 몇몇 동료가 말발굽에 짓밟히던 모습, 일부 동료가 인분을 뒤집어쓰고 그래도 도망치던 모습 등이다. 아울러 숨겨주고 먹을 것도 주고 박수를 쳐주던 시민들의 환호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였고 경북대학교 학장을 하다 대전고로 온 박관수 교장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새로운 것이었으며 김종석 음악 선생, 김지연 사회 선생, 이재창 체육 선생을 비롯한 국어, 영어, 수학 선생 등 평소에 정의감과 불굴의 투혼정신을 심어준 훌륭한 선생님들은 진정한 멘토였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결국 3.8 시위는 마산의 3‧15와 총체적 혁명으로서의 4‧19가 있게 한 디딤돌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특히 구술자는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제안자로서 그 갚진 의거의 정신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야한다고 주장하며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의 실적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그 내용을 집약해서 여기 수록한다.① 3‧8 민주의거 4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20세기의 4‧19 정신과 시민의식》(2000.3.8 : 대전고등학교 총동창회)좌장 : 김용재(대전대 문과대학장)주제발표 : 박선영(동국대교수) 안성호(대전대교수) 정구종(동아일보 이사)지정토론 : 이계희(충남대교수) 김혁동(배재대교수) 김조년(한남대교수)② 3‧8민주의 41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개최《3‧8민주의거와 한국의 민주화》(2001.3.8 :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좌장 : 김혁동(배재대교수)주제발표 : 박선영(동국대교수) 조남진(한남대교수) 정구종(동아일보 이사)지정토론 : 이계희(충남대교수) 박재목(전 한남대교수) 박광기(대전대교수)③ 『우리 고장의 역사와 문화』(2006. 대전광역시)에 3‧8의거 내용 수록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갖가지 부정을 자행하였다. 1960년 2월 28일에는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명령했다. 참다못한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횡포에 반기를 들며 거리로 뛰쳐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그날 이후 대전에서도 대전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3‧15의거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역사속의 대전 - 3‧8민주의거 편」④ 『대전의 역사와 문화』(2006. 대전광역시)에 3‧8의거 내용 수록6‧25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무리한 헌법 개정과 독재정치를 강화하였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였다. 대전에서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전국 학생 시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사건으로, 4‧19혁명의 계기가 되었다.「현대의 대전」편⑤ 『3‧8민주의거』(2005. 4x6배판 253p.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발행⑥ 「3‧8민주의거 기념탑」(2006.7.14) 건립 제막⑦ 『대전사랑시선집』(2009. 대전문인총연합회)에 3‧8관련 작품수록대전고 현정탑(顯正塔) - 지헌영 <송시>3‧8민주의거 기념탑 - 김용재 <증언의 얼굴>김용재 시 - 꽃보다 더 밝은 민주의 등불김명아 시 - 삼월 정신은 4월에 꽃으로 피어⑧ 『대전사랑에세이선집』(2009. 대전문인총연합회)에 3‧8관련 작품수록이용웅 에세이 - 3‧8민주의거의 두 가지 추억이원옥 에세이 - 대전상고의 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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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구술자 김현수는 1937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백천리에서 태어났다. 4월혁명 당시 청주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학도호국단에서 총무부장을 맡아 학교 살림을 주관하고 운영했다. 3월 졸업을 앞둔 시점에 4‧19시국수습대책위원회에 학생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경찰 기능마비로 어수선해진 치안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들이 시국수습대책위원회에 선무반으로 활동했는데, 이곳에서 대표 역할을 했다. 학업이 늦어져 9월 졸업 후, 자유당에 의한 탄압이 심했던 민주당의 청년활동 참여 부탁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한다.4월혁명을 주도한 계기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후, 군부정권 타도 투쟁과 민주화운동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세 차례 받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부정권 타도와 4‧19 정신을 계승‧발전하기 위한 투쟁의 한 결과로 1978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현역 국회의원 민기식과 신민당 수석부총재 이민우와의 경합에서 39살 무명의 김현수는 군부정권 종식을 위해 학생시절부터 투쟁한 이력을 통해 민심을 얻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당선 뒤 1987년 6‧10항쟁 때 전국적으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정치인, 재야인사, 종교단체, 학생 대표들과 함께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상임집행위원과 대외협력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동시다발투쟁을 위해 발품을 팔았으나,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국회의원은 결국 구술자 외에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때 대표자 11명이 구속되는 상황에서 현 국회의원이었던 본인은 법적 구속이 불가해 구속되지 않았으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민주화가 실현되었다.이러한 투사정신은 4월혁명의 영향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안에는 독립운동을 하였던 청주대 이정규 학장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자유당에서 데모를 하는 학생은 취직을 못하게 하겠다며 감시와 세뇌를 하여,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선뜻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을 하던 구술자는 이정규 학장을 자주 만나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 때 이정규 학장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학생들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한다.이러한 영향을 받아 1960년 4월혁명 당시 청주대 총무부장이었던 구술자가 시위에 관련한 전체적인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청주에서는 20일 청주대학, 청주 시내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전부 도청을 중심으로 10시까지 집합하여 시위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던 18일, 경찰의 미행으로 인해 당초 계획 된 20일에 할 수 없게 되어 18일 갑작스럽게 시위를 하게 되었다. 혼자 벽보와 전단지 작업을 미리 해 놓아서 그것을 가지고 당시 등교한 전교생 600명과 함께 시내로 가, 먼저 온 청주공고와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뒤 청주상고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18일에 참여한 학교는 청주공고와 청주상고 전교생, 청주대학 600명과 청주여자고등학교 일부였다. 그 뒤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탈출하여 19일 시위를 준비하였다. 19일에는 청주상고와 공고, 농고 전교생과 청주여자기술고, 신라여상, 청주고, 청주여고의 일부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진압과정에서는 큰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등교 정지가 내려졌으나, 이승만 하야 후 다시 등교가 되었다.이후 시국수습대책위원회에서 거리질서 유지와 모금운동을 하였다. 이 때 모아진 돈으로 4‧19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시에서 경찰을 동원해 막았다. 이 후 군부정권이 30년 이상 지속되어 결국 2007년 4월 19일 노무현 정권 말기부터 기념비 사업을 재준비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작이 미뤄지다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시, 도,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4월혁명 당시 경찰국이 있던 터에 생긴 공원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지난 5월 19일 기공식을 했으며, 10월 말일이 완공이 된다. 이 외에도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 4‧19 당시 참여했던 6개고(현재 2개고는 폐교가 된 상태)에 한 학기에 3명씩 소액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현재는 회원들의 회비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후에는 장학사업으로 이어갈 계획이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4‧19 동아리를 만들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향후 세워질 탑에는 4월혁명이 발발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그 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건국이념을 새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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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식구술자 민원식은 1942년 충북 청원군 북일면 일동리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대전에 살고 있다. 집안에 사회활동을 한 사람이나 학생운동에 특별히 영향을 준 사람은 없다. 4‧19 시위도 순수한 학생입장에서 감행한 것이다. 당시 4월 17일 학급반장 최봉규가 찾아와 중앙공원에서 각 학교 대표들 모임이 있는데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참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그 다음날 강병웅이라는 친구가 찾아와 내일 아침에 후배들을 동원해 달라고 협조를 부탁했을 때 그 때는 쾌히 승낙을 하고 시위를 같이 하기로 했다. 마침 담임선생님이 집에 찾아와 "원식이는 다른 별일 없지? 그런데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어."하면서 당부를 하고 갔다. 대답은 했지만 시위는 어쩔 수 없었다.당시 청주 시내 및 학교의 분위기는 3‧15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항변이 만연했고 마산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시민은 물론 고등학교 모든 학생들의 동요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 무렵 사회 저명인사의 강연이 있었는데(안호상 박사라고 기억함) "충청도는 '버러지 충'자 충청도다, 3‧15 부정선거 전후 다른 곳에서는 시위가 벌어지는데 충청도 놈들은 그런 것도 못 한다"라는 외침이 들려오자 이때 학생들은 '죽여, 죽여' 하면서 쫓아나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청주농고 시위를 충동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농업학교이기 때문에 일부에선 농기구 시위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삽, 괭이, 선호미 등을 처음에는 모두 들고 나가려고 했지만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농기구는 들고 나가지 않았으며 다만 선호미에 몇 개의 플래카드를 매달아 들고나갔을 뿐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다.구술자는 시위 도중 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감옥 보낸다고 엄포를 놓고 욕을 퍼부으며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등 실제로 많이 맞은 사실을 상기하고 있다. 청주농고 시위는 결국 경찰과의 심한 충돌과 최루탄의 등장으로 인해 격렬함을 더했으며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남긴 선생님이 있어서 상당히 의미가 새로운 것으로 상기하고 있다. 특히 이 시위에 가장 용기를 준 것은 당시 서정일 교장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서정일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이 학교에 모였을 때 모든 상황을 간파하고 단상에 올라가 "정의로운 학생들이여, 이탈하지 말고 잘해라. 한결같이 단결하고 절대 몸조심해라. 다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는데 학생들이 그 한마디에 '와-'하고 외치며 힘 있게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시위가 끝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은 "여러분들은 할 일을 다 했다. 참 용사들이여!"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행히 4‧19가 성공을 했고, 성공을 하니까 교장선생님도 학생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우리 대한민국이 잘 되어 가겠다는 느낌도 지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회를 우리 젊은 학생들이 바꾸어 놓았다는 자부심은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것이었다. 50년이 지난 오늘날 4‧19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생각과 오늘의 학생들이 4‧19 정신을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특히 당시의 오세탁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그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어 여기 소개한다.그때 오세탁 선생님께서 카메라를 코트 속에 감추어가며 순간, 순간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후일 보고 또 보는 추억이 담겨있는 장면들이기에 제시한다. 그날 우리 학생들이 다칠까 걱정되어 희생을 무릅쓰고 최루탄과 돌을 던지는 가운데서 펄펄 뛰며 애타게 만류하는 선생님들의 애정은 영영 잊을 수가 없다.『3‧8민주의거』- '청주의 4‧19, 그 분노와 함성', p.1695. 참고자료『3‧8민주의거』(2005년 8월,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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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섭구술자 오성섭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두천리에서 태어났다. 청주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괴리감을 느끼고 불공평한 삶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유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가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졸업 후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입학 직후 대일굴욕외교 반대 시위에 참여하며 학생운동의 대열에 섰다. 그리고 문리대 학생회장이 되어 여러 시위에 참여하다 두 번에 걸쳐 '내란 소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벌률위반'으로 각 3개월, 1년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 강제징집되어 1년 6개월 간 군 생활을 한 후 다시 복학하여 시위 주도를 하게 되어 여섯 번 정도 연행되고, 지명수배를 당하였다. 이 일로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장사를 하다가 결혼 후 수감시절 도움을 준 안국동 윤보선(해위)을 만나 정식으로 비서를 하게 되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다양한 정치인을 만나게 되고 몇 번의 선거 출마를 하였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마사회와 관세청 산하 관세성 등에서 근무를 하다 이명박 서울시장 선거 때 사무총장으로 일하였다. 현재는 조폐공사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구술자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4월혁명 당시 경찰에 잡혀 용수를 쓰고 청주교도소에 갇힌 일이고, 둘째는 유신 정부 때 반대성명을 내 중앙정보부 6국에서 14일간 고문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신을 지지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으나, 4월혁명에 가담한 사람으로 그럴 수 없어 오히려 반대성명을 냈다고 한다.청주의 4월혁명은 1960년 2월부터 청주지역 학생운동의 산실인 '공석별회'를 통해 시작되었다. 청주공고, 청주고, 청주여고, 청주상고의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처음에는 열댓 명이 모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인원은 증가했다. 참여 여학생의 자취방에서 힘들게 만든 전단지가 사전 발각되어 데모를 하지 못하고 감금되어 있다가 풀려나 4월 16일 청주공고만 데모를 하려는데 방해가 많아 크게 성공은 못했다. 이틀 동안 청주공고 전교생들이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에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가지고 4월 18일 청주공고, 청주상고 전교생과 청주고, 청주여고 일부학생들 3,000여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당시 학교 선생님들이 보호해주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으며, 시민들 역시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며 초등학생까지도 시위에 참여 하게 되었다. 시위 진압 당시 경찰이 기마병을 동원해 학생들에게 곤봉을 휘둘렀으며, 학생들 역시 진압경찰에게 돌을 던졌으나 150여 명의 학생들이 금방 체포되었고, 이 때 약 2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이 후 시위 참가 학교 선생들과 학생회장들이 연행되어 4월 19일 재판을 받았으며, 20일에 석방되었다. 이 후 '공석별회' 활동은 더 하지 못하였으나, 동기와 후배들에 의해 시위가 이어졌다. 1963년 4월 19일 4‧19 회고록을 썼으며, 방송을 통해 4‧19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수기형식으로 전했다. 격렬한 시위 뒤 학생들은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며 모금활동을 통해 적십자에 기부하고, 4월혁명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청주공고 운동장에서 위령제도 지냈다. 이후 시위에 끝나고, 곧바로 청주대와 충북대는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위 3년 후 군복무 당시 4‧19 건국 포상을 받게 되었다.5. 참고자료《충청신보》 복사본, 그 외 자료 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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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균구술자 오천균은 1936년 대전에서 출생하였으며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대전에서 마쳤다. 구술자의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시고 고종황제의 호위무사가 되었으나, 임오군란이 발발하였을 때 구식 군대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셨다. 증조부가 고종황제의 호위무사라는 이력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조부는 이후 동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집안의 재산을 동학의 자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학운동이 결국 실패하게 되면서 재산을 모두 잃고 대전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다. 구술자의 조부는 한을 품고 일찍 돌아가셨으며, 이후 아버지가 일본의 강제징용을 피해 일본 군수공장에 들어가 일하시면서 기술자가 되셨고, 해방 후 그 기술로 성실히 7남매를 교육하셨다. 그러던 때 6‧25가 발발하였고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피난가지 못하고 보문산 뒤 안영리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피난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이라는 누명을 쓰고 괴롭힘을 당했다. 구술자는 그러한 부친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자유당 정권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울분을 삼켰었다고 기억하고 있다.그러던 중 1960년 3.8의거 당시 친동생이었던 오광웅이 경찰의 곤봉에 맞아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자 대학생인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고등학생인 동생들이 한다는 사실에 많이 미안해하며 더욱 울분을 토했다. 이러한 가족사가 구술자로 하여금 독재정권이었던 자유당에 맞서게 하는 큰 이유가 되었으며 이 후 부정선거가 치러지자 4월혁명에도 가담하였으며 이 후 4‧26 대전 연합시위를 주도하였다.3‧15 부정선거와 4월혁명 당시 사회 분위기는 자유당의 독재와 여론 조작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대전 지역의 학생들은 이러한 상황에 분개했지만 서울처럼 대학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아서 울분을 표출할 집단 형성이 어려웠다. 또한 교내에 사법경찰들이 활동하면서 매우 경직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선거 당시에는 매우 강압적인 분위기였다고 기억하고 있다.구술자 역시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의 희생자였다. 당시 법학과 학과장으로부터 회유자금을 받았으나 그것이 경찰에서 나온 것임을 감지하고 직접 경찰서장 집무실로 가서 돌려주고 오니 바로 뒤이어 감시가 따라붙었다. 뒤이어 경찰들이 강제로 술을 먹이는 등의 방법으로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 죄를 물으니 충남대 학도호국단 위원장으로 돈을 썼다는 이유를 댔으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사회에서 죄 없는 사람을 강제로 잡아가는 등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게 유치장에 있자 당시 통행금지로 유치장에 잡혀있던 학생들이 다음날 법대학장이었던 김영국 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선생이 찾아와 구술자의 죄를 따져 물으며 이런 잘못된 법 집행이 학생들을 더욱 거리로 내모는 것이라 이야기하며 구술자를 풀려나게 도와주었다. 뒤이어 국밥을 사주며 구술자를 믿음직스러운 학생 대표로 자랑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일로 이런 핍박을 받게 되는 것 같아 미안해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민주의거를 할 수 있는 폭발적인 힘이 되었다.뒤이어 대전교육청 학무부에서 대전권 학생 대표들을 모아 회유책을 쓰자 그 곳에서부터 4‧26 대전 연합시위를 계획했다. 시위의 주모자로 경찰의 쫓김을 받으며 친구의 집에서 성명서를 작성하고, 시위 당일 한밭중학교 뒷담을 넘어가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낭독하였다. 그 이후 대전역과 시청을 지나 도청까지 진출하며 시위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연행되었다. 하지만 구술자는 충남 도지사와 당시 계염사령관과 면담을 하며 3‧15 부정선거를 시인받았고 또 경찰청장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 후 시위가 과격화된 방향으로 흐르자 더 이상의 시위는 파괴적 행동일 뿐인 것을 인지하고 해산하였다. 이 시위에서 정의의 실현, 정의의 승리 등의 의의가 있었음을 밝혔다.대학 졸업 후에는 대전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후 공직 사회에 입문했으나 말단 공무원이라 괄시를 받았고, 1년 후 국가공무원 시험에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고 국방부로 발령받아 공무원으로 33년 재직하였으나 이후 위암 발병으로 명예퇴임하였다.이 후 중도일보와 대전일보의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에 선정되었으며 부인과 자식, 손자 손녀들에게 매우 자랑스러웠다는 소회를 밝혔다.하지만 과거 정의감에서 했던 4‧19와 같은 일들이 오늘 날 많이 묻혀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우리나라가 세계에 부끄럼이 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역사교육이 올바르게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하였다.5. 참고자료1940년 4월 27일자 《중도일보》, 《대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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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기구술자 우원기는 1941년에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피난하여 청주에 정착하였다. 당시 나이는 11살이었으며, 이후 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하여 중, 고등학교까지 청주에서 마쳤다. 1960년 당시에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3‧15 부정선거로 인해 전국이 술렁일 때 청주지역은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당시 청주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이승만 대통령 비호 연설이 청주지역의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그로 인해 청주고의 이상규, 우원기, 청주공고의 오성섭, 청주상고의 심건호, 청주농고의 강병웅 등의 청주지역 학생 대표들이 4월 16일, 4월 17일 양일간 약전 골목의 이내출의 집에 모여 사전 계획을 세웠으며 4월 18일 오전 9시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결의하였다. 특히 정보가 새어나갈 것에 주의하였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도 작성했다.그리하여 4월 18일 오전 9시, 청주고등학교에서는 지휘부와 규율부의 주도 아래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내쫓았고 이 학생들을 몰아 시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얼마 못 간 중앙극장 앞에서 경찰과 기마대가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해산시켰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 몇몇 학생들이 머리가 깨지는 등의 피해를 입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처음 있는 시위라 격렬하지 않았고, 경찰 역시 잡아들이는 것이 아닌 해산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리 격렬한 상황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구술자 역시 허리를 맞고 우암산으로 도망갔으며 어느 주민의 집에서 3일간 숨어 지냈다. 그 당시 느낌은 매우 공포스러웠으며 경찰에게 잡힌다는 두려운 마음에 좁은 골목과 산만 바라보면서 도망쳤다고 기억하고 있다.당시 경찰이 지키고 있던 중앙극장 앞은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만나야 할 장소였는데, 청주공고 학생들은 3교시가 끝난 뒤 시위를 벌였으므로 청주고 학생들과 연합하지 못했다. 청주고 시위 이후에 벌어진 청주공고의 시위는 청주고의 시위보다 격렬했다고 한다. 또한 청주농고는 정보가 누설되어 학교 선생님들의 봉쇄로 시위 현장에 나갈 수 없었으며 3일 뒤인 4월 21일 시위를 벌였다. 이렇게 각 학교가 각기 시위를 벌이면서 청주 지역의 학생 연합시위는 실패로 돌아갔다.당시 청주고의 선생님들은 시위에 협조는 하지 않았지만 시위를 특별히 말리지도 않았다고 하며 시위 후에 극심한 가혹행위나 처벌은 없었다. 당시 시민들은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의 행동에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이러한 4월 18일의 청주지역의 학생 시위는 같은 날에 일어난 서울 고려대의 시위에 비해 규모가 작았기에 신문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다.구술자는 청주지역의 학생 연합시위가 실패한 이유를 당시 고려대 시위에 피해가 컸던 이유와 함께 설명했다. 그 이유는 고려대의 경우 4월 19일 서울지역 학생 연합시위보다 하루 앞에 독자적으로 실시하면서 피해가 컸다고 이야기하며, 청주지역 역시 학생들이 동시에 다 같이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시위 3일 후 구술자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청주고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고, 시위로 인한 처벌 역시 없었다. 이후 교장선생님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교장선생님은 사퇴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크게 제재하지 않는 분위기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당시 청주고의 학생 시위는 큰 성과를 가져온 시위라고는 볼 수 없으나 나라가 위기 상황일 때 학생들이 의협심에서 움직였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구술자는 오늘날의 학생들을 볼 때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의협심을 발휘하지 않는 부분을 안타까워하시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대립이 아닌 화합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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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상구술자 윤한상은 1939년 충청북도 연풍면 신풍마을에서 태어났다. 한말에 의병대장을 한 할아버지에게 물질적인 것보다는 떳떳하게 원칙을 가지고 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당시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면서 보통 입학 나이보다 4년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배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하셨다. 충주고등학교 재학 당시 학생회장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학교 은사이신 이갑식 선생님의 도움으로 충주고에서 적응을 잘 하여 나중에 학생회장까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1960년 4월혁명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지방의 학생운동이 충주에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강연에 관한 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다. 3월 9일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연설이 자유당의 방해로 강연장소가 정해지지 않아 노상에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경찰진압이 일어났고, 강연을 듣던 학생들의 마음에는 민주당에 대한 동정심과 자유당에 대한 반발심이 동시에 생겨났다. 3월 10일, 학교에서는 시험시간까지 한 시간 단축하면서 홍병각 자유당 국회의원의 강연을 듣게 했다. 교양 강연이라고 했는데 정치 강연인 것이 밝혀져, '집어치워라 정치 강연 집어치워라'를 외치며 전교생이 강연장에서 나왔다. 사실 시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상건의 주도로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에 정치 중립을 보장하라'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게 되었다. 당시 경찰은 방망이를 들고 진압하였으며, 이 때 장사하는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었으나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1차 시위는 경찰에 의해 금방 진압되었고, 이 후 2차 시위는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2차 시위의 목적은 충주고의 입장에서 많은 시민들에게 자극을 주자는 것으로, 연합시위를 준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여 충주고만 참여하게 되었다. 아세아 극장에서 차고까지 진입했으나, 경찰의 진압에 대표들이 체포되었다. 이 때 장구환은 고문까지 당했으나, 구술자는 학생회장이라 시위 배후세력을 묻는 취조를 당했다. 당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시위라 결의문 같은 것은 없었지만, '정치도구화를 하지 말라, 학원의 정치 중립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가지고 시위를 이어갔다. 다행히도 시위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4월 26일 이승만 하야 이후 시국수습 차원에서 선무반이 충주지역 고등학교 학생회장들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선무반에서는 자신들의 정치활동에 학생들의 참여를 요구했으나 4‧19 시위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이지 민주당을 위한 시위가 아니라며 활동을 거부하고, 대신 학생들끼리 모여 선무반을 꾸렸다. 이 후 민주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벌어지는 세력다툼에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렸나」라는 글을 발표하며 4월혁명이 정치를 위한 시위가 아닌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임을 강조하였다.5월 경 서울에서는 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나, 충주에는 뒤늦은 7월에 교사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보충학습에 대한 수업료를 교사들이 요구하면서 생긴 학생과 교사들의 마찰이었다. 이 일로 교사들이 많이 바뀌었으며, 8명의 학생이 퇴학 위기에 놓였으나 김기석이라는 학생의 희생으로 나머지 학생은 퇴학당하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수업이 원활히 진행되었다.그동안 구술자는 4‧19 시위에 참여한 것을 주변 동료교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는 4월혁명이 교사배척운동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완전한 정의는 없으니 무엇이든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모든 일을 겪은 선생의 생각이다. 또한 4월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현재 그 사람들이 모두 거론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매우 안타까워했다.5. 참고자료윤한상, 『쉬어가는 그루터기』,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렸나」, 2008(고희기념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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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석구술자 전인석은 1942년 공주에서 약 8km 떨어진 이인에서 출생하여 주공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10대조 자손이며 숙부는 천주교 공소의 회장이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때문에 가정형편은 넉넉하였다. 이후 공주중학교, 공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공주에서 6년간 하숙을 하며 지내게 된다.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함께 하숙을 하던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들과 어울리며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당시 공주는 교육 도시로 학기 중에는 학생들로 북적였고, 방학 중에는 학생들이 없어 썰렁했다. 공주중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서울로 진학을 하였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공주지역의 다른 학교로 진학하거나, 같은 운동장을 쓰는 공주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주고등학교와 공주중학교 학생들의 써클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구술자 역시 반장이나 호국단 학생들로 구성된 리더층과 어울렸고 이 학생들이 4‧19 당시 공주지역의 시위를 이끌게 되었다.당시 공주 분위기는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감과,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선생의 서거로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나 특별히 시위 활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김주열 열사의 사망 소식과 고려대 학생들 중심의 시위 소식을 들으면서 공주고가 중심이 되어 시위를 결의하게 되었다.4월 19일 벽보를 붙이고 장날인 4월 21일에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학교 쪽은 이은규, 이상빈, 이청규, 백남도, 양환호가 맡고, 다른 학교와 연합을 하는 것은 이영치, 김동덕, 오석규, 임진묵, 한연희, 이경주, 명기현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당시의 벽보 내용은 부정선거를 비판하고 그 책임을 묻는 내용과 김주열 열사의 추모, 민주주의 만세 등이었다.하지만 거사 당일, 미리 새어나간 정보로 인해 경찰의 협박과 부모들의 반대가 심해서 시위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다음 장날인 4월 26일을 거사일로 다시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으며 시위에 참여할 인원을 모집하였다.결국 4월 26일 공주고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 때 사용된 구호와 플래카드 내용은 3‧15 부정선거 규탄과 이승만 정권의 퇴임, 학원의 자유 보장 등이었다. 당시 시민들도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연두에서 박수를 치거나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시위 다음날인 4월 27일, 구술자는 우지명, 심경수와 4‧19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의 치료비를 모금하기로 하고 유구, 신풍, 공주 등에서 3일간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 주민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금활동에 동참하였고 약 7,000환의 금액이 모여졌다. 이 돈들은 중앙의 언론사로 보내졌다. 또한 4월 30일 공주고에서 순국학도 합동 추도식을 거행하기도 했다.이러한 내용들은 구술자의 기억과 더불어 메모형식으로 이루어진 당시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로 그 정확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구술자는 오늘날 학생들이 한국의 역사성에 대한 애착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하였다. 이를 위해 4‧19혁명을 4‧19학생혁명으로 명명하여 그 사건의 순수성을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으며 정부에서 주도하여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물이나 자료를 만드는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5. 참고자료1960년 일기책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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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남구술자 전희남은 1941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하였고 현재 대전에 살고 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는 사회활동을 한 분이 없고 학교생활에서 특히 영향을 받은 은사가 있는데, 김성수 선생이다. 항상 '정의롭게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 '약자를 도우라'… 등 가슴에 닿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 분이다. 아마도 이러한 요인들이 학생운동을 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당시만 하더라도 여당보다는 야당이 약자고 여당이 하는 것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았고 야당을 무시한다든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든가 하는 것들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학도호국단 간부(규율부)로 있던 구술자는 대전상고가 3월 10일 시위를 하는데 주동자로 참여를 했다. 시위과정에서 얻어맞고 터지고 째지고 상처 나고 잡혀가고 백차에다 수갑까지 채워 밀어넣는 경우도 있었음을 회상하면서 특히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데 경찰이 그 친구를 잡아 백차에 태우고 곤봉으로 막 때리는 광경을 목격을 한 것이다(당시 장면이 떠올라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함). 그러면서 그 친구가 구술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잡혀간다고 외칠 때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던 처지를 울먹이며 기억을 했다.시위 이후 특히 사후수습에 힘쓰던 김정우 교장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학생들을 걱정하던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 아울러 열렬한 호응자였던 시민들에 대한 기억도 잊지 않고 있다.특히 당시 시위는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었고 대학생들보다도 고등학생의 행동이 더 열렬하였기에 젊은 사람들이나 사회의 어른들도 정의와 자유에 대한 무엇인가를 더욱 힘 있게 깨닫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라가 빨리 안정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거듭하기도 했다.당시 언론에서는 대전상고 시위에 대해 '일부 학생 연행에 자극이 됐다.'(동아일보),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조선일보), '학원에서 선거운동이 웬 말이냐'(한국일보), '학원의 자유를 달라 절규했다.'(대전일보) 등으로 타이틀이 나타났다.그렇고 보면 대전상고의 3‧10 시위도 4월혁명의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당시의 친구들과 4‧19 세대들이 뜻을 같이하여 오늘날까지 모임을 하고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치부를 하고 있다. 대전시 교육감을 지낸 홍성표, MBC에 있던 정일덕, 3.8 시위 대대장 박제구, 치과의사 이수종, 대전상고 이원옥, 보문고 김재명 등 여러 친구들이 모여 지금도 3‧8, 3‧10, 4‧19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4‧19동지회 쪽에서도 배재대 총장을 지낸 박강수, 국회의원을 지낸 이재환, 김범명, 김원웅 등과의 모임은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발전과 연결될 수 있다는 당부와 함께, 특히 우리의 젊은이들이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을 잊지 않고 실천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있다.5. 참고자료『3‧8민주의거』(2005.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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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영최우영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지만 공무원 생활하는 아버지를 따라 일찍 대전에 정착하였고 초등학교부터 줄곧 대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대전이 오히려 고향인 셈이다.3‧8의거 당시에는 대전고 2학년이었지만 당시는 4월이 학기시작이어서 3학년 진급을 앞두고 있는 시기였다. 아버지는 어렵게 직장생활을 했고 일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해왔으며, 집안에 특별히 사회운동을 한 분은 없었다.그러나 당시의 유명한 월간지 『사상계』에서 함석헌의 글을 즐겨 읽었고 신문을 보며 사회의 각종 사건 소식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특히 학생시절에 3‧1절, 제헌절, 광복절 등 각종 기념식 행사에 참가한 일이나 대전비행장에 이승만 대통령이 온다고 태극기 흔들며 동원됐던 기억은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반추하는 것이었다. 학급 별로 구독해야 했던 《서울신문》의 논조는 정부 쪽 이야기만 하고 반대되는 의견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새롭다. 한 분 한 분 지명한 것은 아니지만 국어, 영어, 수학, 세계사, 음악, 미술 등 선생님들이 전공 영역의 빼어난 실력은 물론, 세상을 보고 사회를 보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고맙게 인식하고 있다.시위 자체에 대한 기억은 「Ⅰ.구술과제 해제- 5.과제요약」애 들어난 내용으로 가늠할 수 있으며 일일이 확인할 순 없지만 연행 학생이 80명 정도였고 대부분 일찍 풀려났으며 대표자들은 밤 12시가 되어서 풀려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나타난 학생들의 수난내용은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머리가 터지고 손가락이 찢어져 피를 흘리고 발목뼈가 퉁기어져 걷지를 못하고, 교복이 찢어지고, 지붕에다 바르는 건축자재인 콜타르에 범벅이 되어 세탁 불가로 교복을 버려야 했던 일, 분뇨통에 빠진 일 등… 특히 연세대 상대를 졸업하고 충남 온양에 살다가 2000년 초에 미국으로 이민, 암으로 작고한 친구 정진혁에 대한 기억은 눈물겹다. 분뇨통에 빠졌던 일과 학교에 돌아왔을 때 생물선생님이 발가벗겨놓고 요오드링커(옥도정기)를 알코올에 희석시켜 소독해줄 때 옆에서 심부름하며 돕던 일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다.시민들은 경찰에 쫓기니까 상가 진열대 밑으로 숨겨주고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하고 잘한다고 박수쳐주는 등 대단히 협조적이었으며, 박관수 교장선생님과 동창회장(임치과 원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사태수습에 노고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구술자는 또한 사단법인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현재의 활동내용을 소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3.8 또는 4‧19가 금년 50주년이지만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활동은 10년에 불과하다. 5‧16이후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 4‧19는 혁명이 아니고 의거 수준 이하로 폄하하고 통제해왔기 때문에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2000년 4‧19혁명 40주년을 계기로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도 구성이 되었다. 회원이 70여 명, 준회원이 400여 명인데 사회적 관심 부족, 경제적인 문제 등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 그런 가운데 3.8민주의거 40주년 때부터 매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학술대회 등 수차례의 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2005년 8월에는 『3‧8민주의거』(4x6배판 253면)라는 책자를 발행했고 2006년 7월에는 국가보훈처의 국비 3억과 대전시에서 지방비 5억을 지원받아 8억의 예산으로 대전 둔지미 공원에 3.8민주의거 기념탑을 세웠다. 2009년에는 3.8민주의거 기념일을 대전광역시 조례 제3769호(2009.10.9)로 공포하였고, 금년 50주년 기념행사는 조례에 의거 대전시청 강당에서 성대하게 거행을 했다. 앞으로는 3.8민주의거 기념탑이 서있는 둔지미 공원을 학생들의 야외학습, 현장학습이 가능한 부대시설을 갖추어 읽을거리 볼거리 등 활용도를 높이고 대전광역시 시티투어 코스로 각광을 받도록 추진을 하고 있다.아울러 3.8 및 4‧19에 대한 학술적 접근 논문, 참여자들의 기록물 및 사료, 신문 잡지 등 자료, 시, 수필 등 문학작품 등을 망라하여 기념책자를 낼 계획을 하고 이미 추진을 하고 있다.5. 참고자료『3‧8민주의거』(2005년 8월,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