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전인석

구술자소개

구술자
전인석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19일
장소
대전 기획출판 오름
구술시간
52분 5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공유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전인석은 1942년 공주에서 약 8km 떨어진 이인에서 출생하여 주공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10대조 자손이며 숙부는 천주교 공소의 회장이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때문에 가정형편은 넉넉하였다. 이후 공주중학교,  공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공주에서 6년간 하숙을 하며 지내게 된다.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함께 하숙을 하던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들과 어울리며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공주는 교육 도시로 학기 중에는 학생들로 북적였고, 방학 중에는 학생들이 없어 썰렁했다. 공주중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서울로 진학을 하였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공주지역의 다른 학교로 진학하거나, 같은 운동장을 쓰는 공주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주고등학교와 공주중학교 학생들의 써클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구술자 역시 반장이나 호국단  학생들로 구성된 리더층과 어울렸고 이 학생들이 4‧19 당시 공주지역의 시위를 이끌게 되었다. 
당시 공주 분위기는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감과,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선생의 서거로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나  특별히 시위 활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김주열 열사의 사망 소식과 고려대 학생들 중심의 시위 소식을 들으면서 공주고가  중심이 되어 시위를 결의하게 되었다. 
4월 19일 벽보를 붙이고 장날인 4월 21일에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학교 쪽은 이은규, 이상빈, 이청규, 백남도, 양환호가  맡고, 다른 학교와 연합을 하는 것은 이영치, 김동덕, 오석규, 임진묵, 한연희, 이경주, 명기현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당시의 벽보 내용은 부정선거를 비판하고 그 책임을 묻는 내용과 김주열 열사의 추모, 민주주의 만세 등이었다. 
하지만 거사 당일, 미리 새어나간 정보로 인해 경찰의 협박과 부모들의 반대가 심해서 시위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다음 장날인 4월 26일을 거사일로 다시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으며 시위에 참여할 인원을 모집하였다. 
결국 4월 26일 공주고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 때 사용된 구호와 플래카드 내용은 3‧15 부정선거 규탄과  이승만 정권의 퇴임, 학원의 자유 보장 등이었다. 당시 시민들도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연두에서 박수를 치거나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시위 다음날인 4월 27일, 구술자는 우지명, 심경수와 4‧19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의 치료비를 모금하기로 하고 유구,  신풍, 공주 등에서 3일간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 주민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금활동에 동참하였고 약  7,000환의 금액이 모여졌다. 이 돈들은 중앙의 언론사로 보내졌다. 또한 4월 30일 공주고에서 순국학도 합동 추도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구술자의 기억과 더불어 메모형식으로 이루어진 당시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로 그 정확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구술자는 오늘날 학생들이 한국의 역사성에 대한 애착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하였다. 이를  위해 4‧19혁명을 4‧19학생혁명으로 명명하여 그 사건의 순수성을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으며 정부에서 주도하여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물이나 자료를 만드는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5. 참고자료

1960년 일기책 (개인소장)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전인석(충청)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4789KB

    Downl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