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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남

구술자소개

구술자
전희남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15일
장소
대전 기획출판 오름
구술시간
54분 3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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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전희남은 1941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하였고 현재 대전에 살고 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는 사회활동을 한 분이 없고  학교생활에서 특히 영향을 받은 은사가 있는데, 김성수 선생이다. 항상 '정의롭게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 '약자를  도우라'… 등 가슴에 닿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 분이다. 아마도 이러한 요인들이 학생운동을 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당시만 하더라도 여당보다는 야당이 약자고 여당이 하는 것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았고 야당을  무시한다든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든가 하는 것들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학도호국단 간부(규율부)로 있던 구술자는 대전상고가 3월 10일 시위를 하는데 주동자로 참여를 했다. 시위과정에서 얻어맞고 터지고  째지고 상처 나고 잡혀가고 백차에다 수갑까지 채워 밀어넣는 경우도 있었음을 회상하면서 특히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데 경찰이 그 친구를 잡아 백차에 태우고 곤봉으로 막 때리는 광경을 목격을 한  것이다(당시 장면이 떠올라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함). 그러면서 그 친구가 구술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잡혀간다고 외칠 때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던 처지를 울먹이며 기억을 했다. 
시위 이후 특히 사후수습에 힘쓰던 김정우 교장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학생들을 걱정하던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 아울러 열렬한 호응자였던 시민들에 대한 기억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당시 시위는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었고 대학생들보다도 고등학생의 행동이 더 열렬하였기에 젊은 사람들이나 사회의 어른들도  정의와 자유에 대한 무엇인가를 더욱 힘 있게 깨닫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라가 빨리 안정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거듭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대전상고 시위에 대해 '일부 학생 연행에 자극이 됐다.'(동아일보),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조선일보),  '학원에서 선거운동이 웬 말이냐'(한국일보), '학원의 자유를 달라 절규했다.'(대전일보) 등으로 타이틀이 나타났다. 
그렇고 보면 대전상고의 3‧10 시위도 4월혁명의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친구들과 4‧19 세대들이 뜻을 같이하여 오늘날까지 모임을 하고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치부를 하고 있다. 대전시  교육감을 지낸 홍성표, MBC에 있던 정일덕, 3.8 시위 대대장 박제구, 치과의사 이수종, 대전상고 이원옥, 보문고 김재명 등  여러 친구들이 모여 지금도 3‧8, 3‧10, 4‧19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4‧19동지회 쪽에서도 배재대 총장을  지낸 박강수, 국회의원을 지낸 이재환, 김범명, 김원웅 등과의 모임은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발전과 연결될 수 있다는 당부와 함께, 특히 우리의 젊은이들이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을  잊지 않고 실천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있다. 


5. 참고자료

『3‧8민주의거』(2005.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전희남(충청)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477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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