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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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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김현수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8월 24일
구술장소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 사무
구술시간
1시간 16분 37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7년 출생 1960년 당시 청주대학교 학생으로 시위 주도 등 4월혁명 참여 충북 4‧19혁명 기념사업회장, 충북 4‧19 민주장학회 회장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김현수는 1937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백천리에서 태어났다. 4월혁명 당시 청주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학도호국단에서 총무부장을 맡아 학교 살림을 주관하고 운영했다. 3월 졸업을 앞둔 시점에 4‧19시국수습대책위원회에 학생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경찰 기능마비로 어수선해진 치안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들이 시국수습대책위원회에 선무반으로 활동했는데, 이곳에서 대표  역할을 했다. 학업이 늦어져 9월 졸업 후, 자유당에 의한 탄압이 심했던 민주당의 청년활동 참여 부탁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한다.
4월혁명을 주도한 계기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후, 군부정권 타도 투쟁과 민주화운동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세 차례 받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부정권 타도와 4‧19 정신을 계승‧발전하기 위한 투쟁의 한 결과로 1978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현역 국회의원 민기식과 신민당 수석부총재 이민우와의 경합에서 39살 무명의 김현수는 군부정권  종식을 위해 학생시절부터 투쟁한 이력을 통해 민심을 얻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당선 뒤 1987년 6‧10항쟁 때 전국적으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정치인, 재야인사, 종교단체, 학생 대표들과 함께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상임집행위원과 대외협력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동시다발투쟁을 위해 발품을 팔았으나,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국회의원은 결국 구술자 외에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때 대표자 11명이 구속되는 상황에서 현 국회의원이었던  본인은 법적 구속이 불가해 구속되지 않았으며,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민주화가 실현되었다.
이러한 투사정신은 4월혁명의 영향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안에는 독립운동을 하였던 청주대 이정규 학장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자유당에서 데모를 하는 학생은 취직을 못하게 하겠다며 감시와 세뇌를 하여,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선뜻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을 하던 구술자는 이정규 학장을 자주 만나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 때 이정규 학장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학생들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1960년 4월혁명 당시 청주대 총무부장이었던 구술자가 시위에 관련한 전체적인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청주에서는 20일 청주대학, 청주 시내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전부 도청을 중심으로 10시까지 집합하여 시위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던 18일, 경찰의 미행으로 인해 당초 계획 된 20일에 할 수 없게 되어 18일 갑작스럽게 시위를 하게  되었다. 혼자 벽보와 전단지 작업을 미리 해 놓아서 그것을 가지고 당시 등교한 전교생 600명과 함께 시내로 가, 먼저 온  청주공고와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뒤 청주상고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18일에 참여한 학교는 청주공고와 청주상고 전교생,  청주대학 600명과 청주여자고등학교 일부였다. 그 뒤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탈출하여 19일 시위를 준비하였다. 19일에는  청주상고와 공고, 농고 전교생과 청주여자기술고, 신라여상, 청주고, 청주여고의 일부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진압과정에서는 큰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등교 정지가 내려졌으나, 이승만 하야 후 다시 등교가 되었다.
이후 시국수습대책위원회에서 거리질서 유지와 모금운동을 하였다. 이 때 모아진 돈으로 4‧19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시에서  경찰을 동원해 막았다. 이 후 군부정권이 30년 이상 지속되어 결국 2007년 4월 19일 노무현 정권 말기부터 기념비 사업을  재준비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작이 미뤄지다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시, 도,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4월혁명 당시 경찰국이 있던 터에 생긴 공원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지난 5월 19일 기공식을 했으며, 10월 말일이 완공이  된다. 이 외에도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 4‧19 당시 참여했던 6개고(현재 2개고는 폐교가 된 상태)에 한 학기에 3명씩  소액의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현재는 회원들의 회비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후에는 장학사업으로 이어갈 계획이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4‧19 동아리를 만들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향후 세워질 탑에는 4월혁명이 발발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그 정신을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건국이념을 새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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