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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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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권오덕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14일
구술장소
대전 기획출판 오름
구술시간
59분 37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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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2년 출생 1960년 대전고등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로 3‧8 시위 참여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현)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권오덕은 대전시 대흥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고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녔다.
3.8 시위 당시에는 대전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2학년 진급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TV도 없었고 방송도 듣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집에서 구독하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을 볼 수 있었고 잡지로서는 형이 구독하는 『사상계』를 열심히 읽기도 했다. 
그 당시 자유당 독재정권은 십년 동안 계속되었고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이 학생들로 하여금  봉기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전고 학생들은 그 당시 수준이 높고 조숙한 학생들이어서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충분하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군대조직과도 같은 학도호국단 활동이 학생들을 옥죄고 학생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도구로 쓰였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갑자기 타계를 하고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전에  와서 유세를 한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거기에 가서 유세강연을 듣고 우리의 뜻을 야당 부통령 후보에게 전달을 하고 시위를 하자고  해서 지당한 일로 생각하고 참여를 하게 되었다.
대전고 3.8 시위는 진정한 학원민주화운동이고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의 항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억에 새로운 것은 학교 옆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철조망 사이로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모습, 경관이 말을 타고 와서 총을 겨누고 발사하던 공포 분위기(확인 결과 그 실탄은 공포탄이었음), 바가지에 물을 타서  염산을 뿌리던 가슴 섬뜩한 광경, 몇몇 동료가 말발굽에 짓밟히던 모습, 일부 동료가 인분을 뒤집어쓰고 그래도 도망치던 모습  등이다. 아울러 숨겨주고 먹을 것도 주고 박수를 쳐주던 시민들의 환호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였고 경북대학교 학장을 하다 대전고로 온 박관수 교장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새로운 것이었으며 김종석 음악 선생,  김지연 사회 선생, 이재창 체육 선생을 비롯한 국어, 영어, 수학 선생 등 평소에 정의감과 불굴의 투혼정신을 심어준 훌륭한  선생님들은 진정한 멘토였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 
결국 3.8 시위는 마산의 3‧15와 총체적 혁명으로서의 4‧19가 있게 한 디딤돌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특히 구술자는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제안자로서 그 갚진 의거의 정신을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야한다고 주장하며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의 실적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그 내용을 집약해서 여기 수록한다. 

① 3‧8 민주의거 4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
《20세기의 4‧19 정신과 시민의식》(2000.3.8 : 대전고등학교 총동창회)
좌장 : 김용재(대전대 문과대학장)
주제발표 : 박선영(동국대교수) 안성호(대전대교수) 정구종(동아일보 이사)
지정토론 : 이계희(충남대교수) 김혁동(배재대교수) 김조년(한남대교수)

② 3‧8민주의 41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개최
《3‧8민주의거와 한국의 민주화》(2001.3.8 :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좌장 : 김혁동(배재대교수)
주제발표 : 박선영(동국대교수) 조남진(한남대교수) 정구종(동아일보 이사)
지정토론 : 이계희(충남대교수) 박재목(전 한남대교수) 박광기(대전대교수)

③ 『우리 고장의 역사와 문화』(2006. 대전광역시)에 3‧8의거 내용 수록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갖가지 부정을 자행하였다.  1960년 2월 28일에는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명령했다. 참다못한 학생들은  자유당 정권의 횡포에 반기를 들며 거리로 뛰쳐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그날 이후 대전에서도 대전고등학교 1, 2학년 학생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3‧15의거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속의 대전 - 3‧8민주의거 편」

④ 『대전의 역사와 문화』(2006. 대전광역시)에 3‧8의거 내용 수록 
6‧25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무리한 헌법 개정과 독재정치를 강화하였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였다.  대전에서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전국 학생  시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사건으로, 4‧19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현대의 대전」편

⑤ 『3‧8민주의거』(2005. 4x6배판 253p.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발행

⑥ 「3‧8민주의거 기념탑」(2006.7.14) 건립 제막
⑦ 『대전사랑시선집』(2009. 대전문인총연합회)에 3‧8관련 작품수록
대전고 현정탑(顯正塔) - 지헌영 <송시>
3‧8민주의거 기념탑 - 김용재 <증언의 얼굴>
김용재 시 - 꽃보다 더 밝은 민주의 등불
김명아 시 - 삼월 정신은 4월에 꽃으로 피어

⑧ 『대전사랑에세이선집』(2009. 대전문인총연합회)에 3‧8관련 작품수록
이용웅 에세이 - 3‧8민주의거의 두 가지 추억
이원옥 에세이 - 대전상고의 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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