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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웅

구술자소개

구술자
강병웅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29일
장소
충남 논산 강경읍 황산옥
구술시간
1시간 25분 2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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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강병웅은 1941년 9월 29일 충북 보은군 해동면 용군리에서 태어났다. 4‧19 당시에는 청주농고 3학년생으로 학도호국단 간부는 아니었다.
4‧19 당시는 3‧15 부정선거로 얼룩진 혼탁한 사회 분위기였고 마산 김주열 학생의 죽음이 고교생들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구술자는 당시 청주 시내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다른 학교 학생들도 같이 있었다.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경북대 사대부속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등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고  '자유당 독재는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외침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하늘을 뚫었고 이로 인한 국민의 경악과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당시 청주에는 청주사범학교, 청주농업고등학교, 청주고등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공업고등학교, 세광고등학교, 초지여자고등학교,  일신여고, 청주기술고등학교 등등 비교적 학교가 많이 있었는데 실제로 연합시위 계획은 있었지만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구술자는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결사반대한다', '자유당 독재는 물러나라',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 등등의  구호를 용지에 2,000여 장 써서 가방에 넣고 4월 19일 화요일 아침에 등교하여 반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구호문은  직접 볼펜으로 쓴 것이었다. 
시위 때 시민들은 비교적 찬동의 눈빛을 모두어 주었지만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고  반정부 행위에는 두려움이 뒤따랐다.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정부적 행위라고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구술자는 구술자의 하숙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계속적인 연계활동 특히 청주고 이내필, 지훈택, 이태진 등의  이름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고등학교의 시위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선봉에 서서 사회 분위기 쇄신을 도왔음을 증언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63년도와 2002년도에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좋은 면만 생각하고 좋은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꼭 꿈은  이루어지리라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그렇게 해야 이 나라도 대대로 발전이 되고 좋은 자유민주국가가 될 것이란 말이었다. 시위가 끝난  다음에 학교는 휴교령이 있었고 휴교령이 끝난 다음의 분위기는 학생들이 다시 모여 술렁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공부에 임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강병웅(충청)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4423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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