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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균

구술자소개

구술자
오천균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16일
장소
대전 기획출판 오름
구술시간
1시간 49분 15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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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오천균은 1936년 대전에서 출생하였으며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대전에서 마쳤다. 구술자의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시고 고종황제의 호위무사가 되었으나, 임오군란이 발발하였을 때 구식 군대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셨다. 증조부가 고종황제의  호위무사라는 이력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조부는 이후 동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집안의 재산을 동학의 자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학운동이 결국 실패하게 되면서 재산을 모두 잃고 대전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다. 구술자의 조부는 한을  품고 일찍 돌아가셨으며, 이후 아버지가 일본의 강제징용을 피해 일본 군수공장에 들어가 일하시면서 기술자가 되셨고, 해방 후 그  기술로 성실히 7남매를 교육하셨다. 그러던 때 6‧25가 발발하였고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피난가지 못하고 보문산 뒤 안영리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피난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이라는 누명을 쓰고 괴롭힘을 당했다. 구술자는 그러한  부친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자유당 정권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울분을 삼켰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60년 3.8의거 당시 친동생이었던 오광웅이 경찰의 곤봉에 맞아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자 대학생인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고등학생인 동생들이 한다는 사실에 많이 미안해하며 더욱 울분을 토했다. 이러한 가족사가 구술자로 하여금 독재정권이었던  자유당에 맞서게 하는 큰 이유가 되었으며 이 후 부정선거가 치러지자 4월혁명에도 가담하였으며 이 후 4‧26 대전 연합시위를  주도하였다.
3‧15 부정선거와 4월혁명 당시 사회 분위기는 자유당의 독재와 여론 조작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대전 지역의  학생들은 이러한 상황에 분개했지만 서울처럼 대학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아서 울분을 표출할 집단 형성이  어려웠다. 또한 교내에 사법경찰들이 활동하면서 매우 경직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특히 선거 당시에는 매우 강압적인  분위기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구술자 역시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의 희생자였다. 당시 법학과 학과장으로부터 회유자금을 받았으나 그것이 경찰에서 나온 것임을  감지하고 직접 경찰서장 집무실로 가서 돌려주고 오니 바로 뒤이어 감시가 따라붙었다. 뒤이어 경찰들이 강제로 술을 먹이는 등의  방법으로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 죄를 물으니 충남대 학도호국단 위원장으로 돈을 썼다는 이유를 댔으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사회에서 죄 없는 사람을 강제로 잡아가는 등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게 유치장에 있자 당시 통행금지로 유치장에 잡혀있던 학생들이 다음날 법대학장이었던 김영국 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선생이  찾아와 구술자의 죄를 따져 물으며 이런 잘못된 법 집행이 학생들을 더욱 거리로 내모는 것이라 이야기하며 구술자를 풀려나게  도와주었다. 뒤이어 국밥을 사주며 구술자를 믿음직스러운 학생 대표로 자랑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일로 이런 핍박을 받게 되는  것 같아 미안해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민주의거를 할 수 있는 폭발적인 힘이 되었다. 
뒤이어 대전교육청 학무부에서 대전권 학생 대표들을 모아 회유책을 쓰자 그 곳에서부터 4‧26 대전 연합시위를 계획했다. 시위의  주모자로 경찰의 쫓김을 받으며 친구의 집에서 성명서를 작성하고, 시위 당일 한밭중학교 뒷담을 넘어가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낭독하였다. 그 이후 대전역과 시청을 지나 도청까지 진출하며 시위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연행되었다. 하지만 구술자는 충남 도지사와 당시 계염사령관과 면담을 하며 3‧15 부정선거를 시인받았고 또 경찰청장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 후 시위가 과격화된 방향으로 흐르자 더 이상의 시위는 파괴적 행동일 뿐인 것을 인지하고  해산하였다. 이 시위에서 정의의 실현, 정의의 승리 등의 의의가 있었음을 밝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전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후 공직 사회에 입문했으나 말단 공무원이라 괄시를 받았고, 1년 후  국가공무원 시험에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고 국방부로 발령받아 공무원으로 33년 재직하였으나 이후 위암 발병으로 명예퇴임하였다. 
이 후 중도일보와 대전일보의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에 선정되었으며 부인과 자식, 손자 손녀들에게 매우 자랑스러웠다는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과거 정의감에서 했던 4‧19와 같은 일들이 오늘 날 많이 묻혀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우리나라가 세계에 부끄럼이 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역사교육이 올바르게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하였다.

5. 참고자료

1940년 4월 27일자 《중도일보》, 《대전일보》"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오천균(충청)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25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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