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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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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우원기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27일
구술장소
청주 서원대학교 교정
구술시간
56분 17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3년 출생 1960년 4‧19당시 청주고등학교 학생으로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우원기는 1941년에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피난하여 청주에 정착하였다. 당시 나이는  11살이었으며, 이후 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하여 중, 고등학교까지 청주에서 마쳤다. 1960년 당시에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3‧15 부정선거로 인해 전국이 술렁일 때 청주지역은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당시  청주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이승만 대통령 비호 연설이 청주지역의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그로 인해 청주고의 이상규, 우원기,  청주공고의 오성섭, 청주상고의 심건호, 청주농고의 강병웅 등의 청주지역 학생 대표들이 4월 16일, 4월 17일 양일간 약전  골목의 이내출의 집에 모여 사전 계획을 세웠으며 4월 18일 오전 9시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결의하였다. 특히 정보가 새어나갈 것에  주의하였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도 작성했다.
그리하여 4월 18일 오전 9시, 청주고등학교에서는 지휘부와 규율부의 주도 아래 전교생을 운동장으로 내쫓았고 이 학생들을 몰아  시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얼마 못 간 중앙극장 앞에서 경찰과 기마대가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해산시켰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 몇몇 학생들이 머리가 깨지는 등의 피해를 입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처음  있는 시위라 격렬하지 않았고, 경찰 역시 잡아들이는 것이 아닌 해산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리 격렬한 상황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구술자 역시 허리를 맞고 우암산으로 도망갔으며 어느 주민의 집에서 3일간 숨어 지냈다. 그 당시 느낌은 매우 공포스러웠으며  경찰에게 잡힌다는 두려운 마음에 좁은 골목과 산만 바라보면서 도망쳤다고 기억하고 있다. 
당시 경찰이 지키고 있던 중앙극장 앞은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만나야 할 장소였는데, 청주공고 학생들은 3교시가 끝난 뒤 시위를  벌였으므로 청주고 학생들과 연합하지 못했다. 청주고 시위 이후에 벌어진 청주공고의 시위는 청주고의 시위보다 격렬했다고 한다.  또한 청주농고는 정보가 누설되어 학교 선생님들의 봉쇄로 시위 현장에 나갈 수 없었으며 3일 뒤인 4월 21일 시위를 벌였다.  이렇게 각 학교가 각기 시위를 벌이면서 청주 지역의 학생 연합시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청주고의 선생님들은 시위에 협조는 하지 않았지만 시위를 특별히 말리지도 않았다고 하며 시위 후에 극심한 가혹행위나 처벌은 없었다. 당시 시민들은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의 행동에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 
이러한 4월 18일의 청주지역의 학생 시위는 같은 날에 일어난 서울 고려대의 시위에 비해 규모가 작았기에 신문에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다. 
구술자는 청주지역의 학생 연합시위가 실패한 이유를 당시 고려대 시위에 피해가 컸던 이유와 함께 설명했다. 그 이유는 고려대의 경우  4월 19일 서울지역 학생 연합시위보다 하루 앞에 독자적으로 실시하면서 피해가 컸다고 이야기하며, 청주지역 역시 학생들이 동시에  다 같이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시위 3일 후 구술자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청주고의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고, 시위로 인한 처벌 역시 없었다. 이후  교장선생님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교장선생님은 사퇴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크게 제재하지  않는 분위기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주고의 학생 시위는 큰 성과를 가져온 시위라고는 볼 수 없으나 나라가 위기 상황일 때 학생들이 의협심에서 움직였다는 것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구술자는 오늘날의 학생들을 볼 때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의협심을 발휘하지 않는 부분을 안타까워하시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대립이 아닌 화합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