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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섭

구술자소개

구술자
오성섭
면담자
김용재, 이영조
구술일자
2010년 7월 27일
장소
서울 구술자의 개인 사무실
구술시간
1시간 1분 43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충청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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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오성섭은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두천리에서 태어났다. 청주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괴리감을 느끼고  불공평한 삶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유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가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졸업 후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입학 직후 대일굴욕외교 반대 시위에 참여하며 학생운동의 대열에 섰다. 그리고 문리대 학생회장이 되어 여러 시위에 참여하다 두 번에  걸쳐 '내란 소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벌률위반'으로 각 3개월, 1년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 후 강제징집되어 1년  6개월 간 군 생활을 한 후 다시 복학하여 시위 주도를 하게 되어 여섯 번 정도 연행되고, 지명수배를 당하였다. 이 일로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장사를 하다가 결혼 후 수감시절 도움을 준 안국동 윤보선(해위)을 만나 정식으로 비서를 하게 되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다양한 정치인을 만나게 되고 몇 번의 선거 출마를 하였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 후 마사회와 관세청 산하 관세성 등에서  근무를 하다 이명박 서울시장 선거 때 사무총장으로 일하였다. 현재는 조폐공사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구술자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4월혁명 당시 경찰에 잡혀 용수를 쓰고 청주교도소에 갇힌  일이고, 둘째는 유신 정부 때 반대성명을 내 중앙정보부 6국에서 14일간 고문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신을 지지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으나, 4월혁명에 가담한 사람으로 그럴 수 없어 오히려 반대성명을 냈다고 한다.
청주의 4월혁명은 1960년 2월부터 청주지역 학생운동의 산실인 '공석별회'를 통해 시작되었다. 청주공고, 청주고, 청주여고,  청주상고의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처음에는 열댓 명이 모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인원은 증가했다. 참여 여학생의 자취방에서 힘들게  만든 전단지가 사전 발각되어 데모를 하지 못하고 감금되어 있다가 풀려나 4월 16일 청주공고만 데모를 하려는데 방해가 많아 크게  성공은 못했다. 이틀 동안 청주공고 전교생들이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에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가지고 4월 18일 청주공고, 청주상고 전교생과 청주고, 청주여고 일부학생들 3,000여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당시 학교 선생님들이 보호해주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으며, 시민들 역시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며 초등학생까지도 시위에 참여 하게 되었다. 시위 진압 당시 경찰이 기마병을 동원해 학생들에게 곤봉을  휘둘렀으며, 학생들 역시 진압경찰에게 돌을 던졌으나 150여 명의 학생들이 금방 체포되었고, 이 때 약 2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이 후 시위 참가 학교 선생들과 학생회장들이 연행되어 4월 19일 재판을 받았으며, 20일에 석방되었다. 이 후  '공석별회' 활동은 더 하지 못하였으나, 동기와 후배들에 의해 시위가 이어졌다. 1963년 4월 19일 4‧19 회고록을 썼으며,  방송을 통해 4‧19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수기형식으로 전했다. 격렬한 시위 뒤 학생들은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며 모금활동을  통해 적십자에 기부하고, 4월혁명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청주공고 운동장에서 위령제도 지냈다. 이후 시위에 끝나고, 곧바로  청주대와 충북대는 면학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위 3년 후 군복무 당시 4‧19 건국 포상을 받게 되었다. 


5. 참고자료

《충청신보》 복사본, 그 외 자료 복사지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오성섭(충청)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267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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