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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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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
명선 스님은 1936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출생했다. 스님의 외가는 불심이 깊었고, 도광 스님이 외삼촌이었다. 1952년 도광 스님의 권유로 스님의 도반인 도천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스님은 여러 가지로 어렵사리 계를 받았고, 불경을 공부했다. 1975년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명선 스님은 화엄사 주지 신분으로 1980년 신군부의 정화조치 대상자가 되었다. 스님은 10월 26일 태국에서 30일에 개최될 예정이었던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다가 순천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스님은 광주 505보안대로 이송되어 여자관계, 횡령,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재임 시 인지한 부정 등에 관해 조사를 받았다. 명선 스님은 군 및 정계와 관계가 밀접했던 스님들은 10·27법난을 모면했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어 있다 12월 31일 석방되었고, 서울 북한산 자락의 사찰들을 전전하다가, 공권정지가 해제되었다.
명선 스님은 1985년 전라남도 여수시 소재 흥국사의 주지가 되었다. 종회의원에 선임된 명선 스님은 10·27법난에 관한 진상규명을 진행했으나, 결과를 공개하지 못했다. 이 자료는 후일 진상규명운동 등에서도 활용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 차원의 10·27법난 명예회복과 보상은 문제가 많다고 본다. 명선 스님은 오늘날의 불교는 여러 가지로 한계와 위기에 봉착해 있으며,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슬기롭게 개선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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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삼보 스님은 1950년 강원도 거진에서 출생했다.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스님의 아버지는 1951년 2월경 선박을 이용해 삼척으로 남하하다 배가 파손되어 해상에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매우 강하신 분으로 4남매를 양육했다. 스님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출가한 상태였다. 스님도 1965년 신흥사에서 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큰 형도 2달 후 출가했고, 이후 누나도 출가했다.
삼보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있다가 탄허 스님이 동국대학교 선원장에 임명되자 시봉으로 상경했다. 1970년 해병대에 지원하여 포항에서 근무했는데, 그해 말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다. 의가사제대한 스님은 월정사로 돌아와 총무와 상원사 주지를 겸했다. 1980년도에는 상원사 주지를 사임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재학했다. 그해 10월 26일 어머니의 일을 돕기 위해 보광사로 내려왔다가, 다음 날 새벽 강원도 보안대(천일공사)로 연행되었다.
신군부의 정화조치 대상자가 된 스님은 가혹한 폭행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의 내용은 간첩 접촉, 횡령, 축재, 여자관계 등이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어느 하나 입증하지 못했다. 스님은 제1군 사령부 법당에서 강제 환속식을 치렀고, 체탈도첩되었다. 그리고 삼청교육대(제36사단)로 이첩되었다. 스님은 지옥과 같은 삼청교육대를 마치고, 1981년 1월 4일 석방되었다.
월정사로 돌아온 스님은 1982년 승적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암사 주지가 되었다. 1984년 녹원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면서 승적이 복원되었다. 1988년에 촉발된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은 여러 이유들로 참여하지 않았다. 2005년에 재개된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부터는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2번에 걸쳐 할복을 단행했다. 스님은 10·27법난피해자명예회복및심의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종단은 스님의 위원 참여를 선호하지 않았으나, 굳은 신념과 확고한 목적으로 위원회가 해산할 때까지 활동했다. 삼보 스님은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그러한 인식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불교계가 10·27법난을 교훈삼아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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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이근우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형은 1938년에 출생한 이근배이며, 1956년에 출가하여 혜성 스님이 되었다. 혜성 스님은 서암 스님을 은사 스님으로 출가했으나, 서암 스님의 소개로 청담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아버지와 청담 스님은 일제 말부터 인연이 깊었다.
혜성 스님은 청담 스님의 불교정화운동을 지지하고, 청담 스님을 지극히 봉양했다. 혜성 스님은 청담 스님의 쉴 곳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도선사와 인연을 맺었고, 도선사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혜성 스님은 박정희 정권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도선사의 발전과 성장에 도움을 받은바 적지 않다. 혜성 스님은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스님을 찾아온 팽성학원 김용태의 권유로 이를 인수한다. 스님은 부실하고 비 인가였던 팽성학원을 정상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청담학원으로 개칭했다.
1980년 10·27법난으로 혜성 스님도 연행되었다. 혜성 스님은 경찰특수수사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스님에 적용되었던 주요 죄목은 횡령이었으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스님은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도선사와 청담학원의 성장과 발전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경찰로부터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은 혜성 스님과 구술자는 후유증을 앓았다. 10·27법난의 가해자들은 전창렬, 양근하, 군법사 등이었다.
석방된 혜성 스님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혜성 스님의 사회사업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혜성 스님의 승적이 복원되었다. 스님은 차츰 청담학원과 도선사를 되찾았고, 불교사업에 복귀했다. 혜성 스님은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입수한 ‘견지동 45계획’이라는 문서를 기반으로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했다. 스님은 10·27법난에 관한 초반기 진상규명운동을 이끌고 지원했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구술자는 정부 차원의 10·27법난 명예회복과 보상에 문제가 많다고 본다. 법난의 진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배제한 점은 무엇보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의 요구를 충분하게 수렴하지 못했고, 진상규명도 미흡하다고 평가한다. 피해자들 개개인이 아닌 종단을 중심으로 하는 피해보상은 취지에 부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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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한영수는 1934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경북대학교를 졸업하고, 영천 소재 외사청 공무원이 되었다. 이후 인천과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1962년 문화공보부 조사국으로 근무지를 변경했다. 1980년 신군부의 정화조치가 실시될 당시에는 문화공보부 종무담당관이었다. 그는 종교부문 전반에 관한 정부의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공무원이었다.
1970년대부터 신군부가 집권할 시기까지 불교계(조계종)의 내부 갈등이 있었으나, 자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영수는 종교계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불교계의 갈등이 있었으나, 이를 정화하다는 것을 빌미로 군대와 공권력을 동원하여 짓밟은 일련의 조치는 부당하다.
계엄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0월 27일과 30일에 불교의 전국 사찰들을 유린하고, 불교계 인사들을 연행 및 고문했다. 10·27법난으로 인해 다수의 불교계 인사, 특히 스님들이 큰 피해를 보았으나, 한영수와 같이 무고하게 피해를 본 민간인들도 있었다. 한영수는 10·27법난 직후인 11월 3일 보안사로 연행되어 커다란 고초를 겪었고, 이후 한보와 독립기념관 등에서 근무했으나, 삶과 생활은 피폐했다고 한다.
정부 차원의 10·27법난 명예회복과 보상은 문제와 한계가 상당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피해자들 개개인이 아닌 종단을 중심으로 하는 피해보상은 취지에 부합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