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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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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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찬- 산수 이종률의 배재중학 시절- 와세다대학 시절 민족운동- 민족건양회의 결성과 양태- 1952년 부산정치파동- 산수 이종률- 민주민족청년동맹 초기의 주요 구성원- 노치관 등 대종교 계통 청년과의 연대- 민족일보 기자 시절 활동- 민족일보와 이종률, 통일사회당, 사회당- 민주민족청년동맹과 통일민주청년동맹준비위원회의 통합 논의- 산수 이종률의 민족혁명론- 민족자주평화통일부산회의의 주요 구성원, 활동-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활동에 대한 비판적 견해- 현재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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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구술자 김승은 1942년 부산 좌천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갔기 때문에 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형과 동생(김승) 모두 우등생으로 공부를 잘했는데 형은 동아고등학교에 수석 입학을 하고 학생위원장을 지냈으며, 동생도 부산중학교를 나와 부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을 하는 등 학업이 뛰어났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질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으며, 자녀의 이름을 항렬 따라 짓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지어 줄 만큼 주관이 뚜렷했다. 이 어머니에게서 그는 깊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구술자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정국은 무척 혼란했다. 마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마산사건의 책임과 경위를 묻는 여야의 싸움이 시끄러웠으며, 이어 3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열렸지만 여당의 지나친 관권 선거와 부정이 극심해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기성세대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혼란에 대해 학생들은 분노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구술자를 비롯한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경찰과 학교 교사의 감시망을 피해 학교 밖에서는 신성범의 집에서 자주 모였으며, 학교 안에서는 강당에 있는 음악실을 통해 학생들과 접촉했다. 견제와 감시가 엄했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으며, 점조직과 같이 개별적인 접선을 통해 시위를 준비하였다.주목할 만한 사실은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혼자 독자적으로 진행해가기 보다는 주변의 학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형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상황이 변해 결과적으로는 3월 24일의 시위는 부산고가 주도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초량교회의 등사기를 빌려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밤새 작성하며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했다.3월 24일 아침, 학생들은 교무회의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해 나가려 했으나 마침 그날 교무회의가 없어지면서 첫 단추부터 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눈치를 보면서 교실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술자 등 시위주도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며 동기들과 후배들을 선동해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교문을 막으러 나온 선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며 시위는 실패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담장을 뛰어 넘고, 밖에서 다시 돌아와 교문을 여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자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의 행렬이 부산역 가까이 이르자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부딪히며 부상자와 검거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힘껏 외쳤고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학생들을 돕고 격려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부산고의 시위 과정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침 마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조사단의 행렬이 부산진을 지나다가 시위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로 착각하고 돌을 던지는 등 조사단을 공격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고 학생들의 시위는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화제가 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구술자와 신성범, 박현용 등 시위주도 학생들 몇몇은 이날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선생님들에게 붙들려 교내에서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강압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눌리기는 했지만 이 사건을 단순시위로 접근하다가 마산사건 조사단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난 뒤에는 순수한 학생시위가 아닌 배후세력에 의한 조직사건으로 혐의가 두어져 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부산고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만 할 줄 알았던 모범적인 학생들이었고 시민들 대부분도 그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순한 사건으로 몰아가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평소 공부만 알고 자기만 챙길 줄 아는 스타일로 놀림을 당하던 부산고 학생들은 이 시위를 통해 많은 부산 시민들로부터 칭찬과 격려, 따뜻한 관심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3월 24일의 시위 이후에 부산고 학생들 대부분은 어떠한 사회 활동이나 학생시위에 가담하지 않고 다시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학년으로 진급했기에 당장 눈앞에 닥친 대학입시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3월 24일의 시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 충분히 문제 제기를 했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그 뒤에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보다는 학업에 힘쓰는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다만 부산고의 학생위원장으로 그 대표성을 가지고 있던 구술자의 경우에는 4‧19의 시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여러 간담회와 학생들의 회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당시 4‧19 이후 학생들의 동향과 사회적, 지역적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부산고 학생들의 경우 4‧19 이후의 시위 양상에 대해서 우려와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다. 관공서를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국가적인 손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치안 부재 등 지나친 혼란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인식도 구술자와 다른 구술자들 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정섭과 박현용의 경우 자유당의 부정과 비리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선 유보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술자의 경우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책임 소재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야당인 민주당의 정치적인 한계도 이해하고 있는 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시위를 주도한 그룹의 안에서도 현실인식 등에서 편차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5. 참고자료《국제신문》《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부산고등학교, 1960, 『청조』제10호, 부산고등학교박현용의 개인 일기부산고등학교, 2005, 『부산고등학교1960년사』, 부산중‧고등학교총동창회 재경부산중‧고등학교동창회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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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구술자 김정섭은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3남 2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구술자의 부모님은 해방이 되자 바로 부산 영도로 들어왔다. 구술자의 부친은 작은 철공소를 운영하였다. 사업을 하는 덕분에 부친은 영도에서 지역유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불가피하게 자유당에 협력을 하는 관계가 되었다. 당시의 지역 유지들은 거의 자동으로 자유당에 입당이 되었으며 선거가 있을 때 협조해야 했다. 구술자는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인 룸비니학생회의 고등학교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구술자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정국은 무척 혼란했다. 마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마산사건의 책임과 경위를 묻는 여야의 싸움이 시끄러웠으며, 이어 3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열렸지만 여당의 지나친 관권 선거와 부정이 극심해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기성세대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혼란에 대해 학생들은 분노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김승을 비롯한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경찰과 학교 교사의 감시망을 피해 학교 밖에서는 신성범의 집에서 자주 모였으며, 학교 안에서는 강당에 있는 음악실을 통해 학생들과 접촉했다. 견제와 감시가 엄했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으며, 점조직과 같이 개별적인 접선을 통해 시위를 준비하였다.처음부터 학생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이 마음이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위를 의논하던 학생들 가운데는 부모가 공무원이나 경찰 등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 참여 자체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 소극적인 입장의 학생들은 시위 준비에서 빠지는 대신 그러한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제외된 학생들에게는 시위와 관련해 어떠한 이야기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주목할 만한 사실은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혼자 독자적으로 진행해가기 보다는 주변의 학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형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상황이 변해 결과적으로는 3월 24일의 시위는 부산고가 주도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초량교회의 등사기를 빌려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밤새 작성하며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했다.3월 24일 아침, 학생들은 교무회의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해 나가려 했으나 마침 그날 교무회의가 없어지면서 첫 단추부터 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눈치를 보면서 교실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승 등 시위주도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며 동기들과 후배들을 선동해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교문을 막으러 나온 선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며 시위는 실패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담장을 뛰어 넘고, 밖에서 다시 돌아와 교문을 여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자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의 행렬이 부산역 가까이 이르자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부딪히며 부상자와 검거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힘껏 외쳤고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학생들을 돕고 격려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부산고의 시위 과정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침 마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조사단의 행렬이 부산진을 지나다가 시위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로 착각하고 돌을 던지는 등 조사단을 공격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고 학생들의 시위는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화제가 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구술자의 경우 다른 학교의 시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부산고 이전의 시위가 있기는 했으나 그 규모를 따져 볼 때 소규모였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파장도 사실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전부는 아니겠지만 시위를 하는 학생들 일부는 깊은 고민을 한 후 시위를 하기보다는 놀기 좋아해서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구술자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4‧19 이후의 시위 양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4‧19를 거치면서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4월혁명의 모든 것이 긍정적이었기보다는 부정적인 요소도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그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역유지나 부자의 집을 습격하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공격을 받았으며 약탈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경험은 그에게 대중의 선동적인 인상을 크게 심어주었다. 또한 사회적 혼란보다는 질서 유지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5. 참고자료《국제신문》《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부산고등학교, 1960, 『청조』제10호, 부산고등학교박현용의 개인 일기부산고등학교, 2005, 『부산고등학교1960년사』, 부산중‧고등학교총동창회 재경부산중‧고등학교동창회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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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어린시절 성장과정, 부산사범학교 시절,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 3.15 부정선거 당시 상황, 7.29 총선 때 활동과 암장, 당시 통일운동,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인민혁명당사건과 암장, 1974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 삼락일어학원설립, 검거당시 상황, 검거 후 고문 이야기,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 4월혁명의 평가와 현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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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호
1936년 출생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 활동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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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보구술자는 1943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부산 개성중학교 3학년에 전학하면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동래고에 진학하여 2학년에 재학 중에 4월혁명에 참여하였다.4월혁명 당시 구술자는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동래고의 정신이라는 평소 선배와 선생님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던 착실한 학생이었다. 이에 4월 18일 시위가 벌어지자 다른 동래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구술자에 따르면 이 무렵 동래고 학생들 사이에는 시위에 대한 공감대가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구술자가 속한 시위대는 시내로 진출한 본진이었다. 동래경찰서 앞에서 구술자는 붉은 물을 뿌리는 소방차를 목격하였다. 이후 구술자는 동래경찰서, 거제리, 양정, 서면을 거쳐 범일동에 이르러 삼일극장 앞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경찰과 마주쳤다. 동래고의 시위는 시내로 진출한 시위대만 해도 천 명이나 되었고 경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길을 우회하기도 했기 때문에 시위대의 선두와 후미는 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시위대가 범일동 삼일극장 앞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는 대략 2, 3백 명 정도였다. 구술자는 이 시위대에 속하여 경찰과 육탄전을 벌였는데 이 때 동래고 운동부 학생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구술자에 따르면 이날 삼일극장 앞에서 탱크를 목격했다고 한다. 최루탄을 쏘며 강력히 제지하는 경찰의 화력에 밀려 결국 학생들은 협상으로 시위를 종료하고 학교로 철수하였는데, 이때 구술자는 시위대에 대한 선무 활동을 하는 박정희를 보았다고 한다.이듬해 부산대에 진학한 구술자는 다시 한일회담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서면중학교에 재직하면서 부패한 사학에서의 너무도 부조리한 현실을 목격한 구술자는 이번에는 교육개혁운동에 나서게 된다. 평교사협의회를 거쳐 전교조의 창립에 참여한 구술자는 이로 인해 교직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1980년대 말부터 범야권 단일후보로 몇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고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다.5. 참고자료《국제신보》《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동래고등학교, 1993, 『동래고 4‧19혁명사』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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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용구술자 박현용은 일본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박현용은 초등학교부터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가족의 경제적인 부양은 이미 장성한 형들과 누나의 몫이었다. 그는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시에 평균적인 생활을 했다고 기억했다.구술자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정국은 무척 혼란했다. 마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마산사건의 책임과 경위를 묻는 여야의 싸움이 시끄러웠으며, 이어 3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열렸지만 여당의 지나친 관권 선거와 부정이 극심해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기성세대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혼란에 대해 학생들은 분노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구술자는 어린 시절부터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를 따르고 존경했다. 신익희를 좋아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지만 여하튼 신익희를 존경했다. 존경하는 분이 민주당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의 정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승을 비롯한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경찰과 학교 교사의 감시망을 피해 학교 밖에서는 신성범의 집에서 자주 모였으며, 학교 안에서는 강당에 있는 음악실을 통해 학생들과 접촉했다. 견제와 감시가 엄했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으며, 점조직과 같이 개별적인 접선을 통해 시위를 준비하였다.구술자는 학교에서 음악부장을 맡고 있었다. 음악부의 경우 음악대회에 나간다든지 노래 연습을 다른 학교 음악부와 함께 할 기회가 많았다. 자연히 외부 학교의 학생들과도 만날 수 있는 일이 많았기에 사전 모의 과정에서 경남고, 남성여고, 경남여고에 연락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음악실의 열쇠를 음악부장인 구술자가 관리했기 때문에 시위 때 쓰려고 준비한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비밀리에 음악실 안에 보관할 수 있어 시위 준비에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처음부터 학생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이 마음이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위를 의논하던 학생들 가운데는 부모가 공무원이나 경찰 등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 참여 자체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 소극적인 입장의 학생들은 시위 준비에서 빠지는 대신 그러한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제외된 학생들에게는 시위와 관련해 어떠한 이야기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주목할 만한 사실은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혼자 독자적으로 진행해가기 보다는 주변의 학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형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상황이 변해 결과적으로는 3월 24일의 시위는 부산고가 주도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초량교회의 등사기를 빌려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밤새 작성하며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했다.3월 24일 아침, 학생들은 교무회의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해 나가려 했으나 마침 그날 교무회의가 없어지면서 첫 단추부터 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눈치를 보면서 교실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승 등 시위주도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며 동기들과 후배들을 선동해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교문을 막으러 나온 선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며 시위는 실패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담장을 뛰어 넘고, 밖에서 다시 돌아와 교문을 여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자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의 행렬이 부산역 가까이 이르자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부딪히며 부상자와 검거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힘껏 외쳤고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학생들을 돕고 격려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부산고의 시위 과정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침 마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조사단의 행렬이 부산진을 지나다가 시위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로 착각하고 돌을 던지는 등 조사단을 공격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고 학생들의 시위는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화제가 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은 부산고 시위에 가담한 1학년 학생들의 경우 미리 공유하는 부분이 없었지만 2학년 선배들이 나가자고 말을 하고 교실의 문을 열었을 때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빠져나가 학교 밖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부산고의 시위를 주도했던 구술자 박현용, 김승과 같은 학생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당시 선배들의 말을 믿고 따라준 후배들과 동기들 모두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당시 여당인 자유당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특별한 일부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굉장히 광범위하게 많은 학생들이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참고자료《국제신문》《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부산고등학교, 1960, 『청조』제10호, 부산고등학교박현용의 개인 일기부산고등학교, 2005, 『부산고등학교1960년사』, 부산중‧고등학교총동창회 재경부산중‧고등학교동창회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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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권- 출생, 성장 과정- 해방 전후 부산 상황- 5.10 단독선거 전후 창녕 상황- 한국전쟁 시기 창녕 상황- 진보당 창당과 제3대 대통령선거 상황-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부산협의회 상황- 부산위생노조 활동- 6월항쟁 시기 부산 상황-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활동으로 인한 옥고와 가족의 피해- 지난 삶의 감회와 당부의 말씀- 진보당경남도당의 상황- 4월혁명과 혁신정당운동- 창녕군 인민재판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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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희/천순주석진희는 194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정착하였다. 피난 시절 석진희는 부모를 잃고 이산하였는데, 가톨릭을 모태신앙으로 한 탓에 부산 데레사고아원에 의탁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테레사여중과 테레사여고를 다니게 되었으며, 테레사여고 3학년에 재학하던 중 학도호국단 대대장으로 4월혁명에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어려운 경제 여건에도 여중과 여고를 다니는 6년 내내 반장을 지낸 모범생이었으며, 여고 시절에는 학교 측의 배려로 야간 서무과에 취업할 정도로 근면 성실하였으며 학교 당국과는 친밀함을 가진 학생이었다.석진희는 1960년 3월 초부터 부산지역 학생들의 연합시위에 테레사여고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연합시위를 위한 계획은 주로 범내골에 있는 광무교 아래서 진행되었는데, 테레사여고, 금성고, 경남공고, 부산상고, 동래고, 혜화여고 등의 대표들이 주요 참석자였다. 또한 이 자리에는 부산대 학생이 참석하여 지도성을 발휘하였다.한편 테레사여고에는 학생회장‧대대장을 중심으로 하는 흐름과 별개로 학생 소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시위의 흐름이 있는데 후자의 중심은 천순주였다. 천순주 그룹은 연합시위의 또 다른 구심이었던 항도고 이형호와 연결되면서 테레사여고의 가장 맹렬한 부분을 형성하였다. 천순주는 개성에서 출생하여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월남하여 부산으로 이주한, 월남인이자 피난민인 셈이다.3‧15정‧부통령 선거를 전후한 시기에 부산에서는 서면과 범내골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고등학생의 연합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이 가운데 3월 14일에는 십여 개 학교 6, 7백 명의 학생이 참여하여 밤늦게까지 시위를 펼쳤다. 테레사여고는 연합시위의 선두에서 가장 적극적인 시위를 펼쳤는데, 이 시위에서 두 사람의 구술자는 시위 대오를 조직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부산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던 4월 19일 두 사람은 서면 로터리에 있는 부산진경찰서 앞 시위에 테레사여고 학생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시내 각처에서 모여든 학생과 군중이 합세하여 이승만 정권 최후의 보루인 경찰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정권 붕괴의 조종을 울린 이날의 시위에서 데레사여고는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학교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안에는 석진희 천순주 두 구술자의 혼신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날 천순주는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도시빈민들과 함께 부산진경찰서를 공격하였다.이러한 테레사여고 학생들의 적극적인 실천에는 때로는 못 본 척 묵인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고무 격려한 교감 수녀를 비롯한 데레사여고 교사들의 성원이 있었으며, 이는 학생들에게 대체로 인식되고 있었다.4월 19일의 시위 이후 석진희는 이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민주화운동과 자주화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고 참여하지 않았다. 고교 졸업 후 생활고로 인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업에 몰두하였다. 천순주는 대구의 청구대학에 진학하였지만 얼마지 않아 결혼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이후 사회운동에는 관계하지 않았다.5. 참고자료《국제신보》《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데레사여자고등학교, 1984, 『데레사三十年史』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이형호 구술, 2003년 8월, 부산 민주공원, 200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술사업, 면접자 김선미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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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선
4월혁명 당시 활동 7.29 총선 당시 활동,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과 부산지역 상황,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 및 2대악법반대투쟁 활동
5.16 군사쿠데타와 구속, 6.3 한일회담반대투쟁 활동, 4월혁명연구소 설립, 남한조선노동당사건
재구속, 부인과 사별, 4월혁명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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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구술자는 1942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동래중학교를 진학하면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동래고에 진학하여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에 참여하였다. 3학년 당시 3학년 6반 반장이던 구술자는 동래고 4‧18 시위를 결정한 4월 17일 모임에 학생 간부로 참여하였다. 시위 준비에서 구술자는 플래카드 제작을 맡았는데, 베를 사려고 함께 시장에 간 친구와는 멀리 떨어져 걸을 정도로 보안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다음날 아침 학교에 등교하고서 비로소 구술자는 자신들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였다. 그리고 계획한대로 교무실의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1, 2학년 후배들을 운동장으로 모으는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후배들의 행동이 얼마나 신속하였던지 3학년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일부가 교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뒤이어 3학년이 움직였는데, 구술자는 정문을 막고 있는 교사들을 운동부 학생들이 완력으로 밀어붙이면서 학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가두시위에서 구술자는 온천장 쪽으로 간 대열에 속했는데,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방향이 온천장 쪽이었는지 몰랐다고 한다. 구술자가 속한 대열은 온천장 입구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학교로 돌아왔다.4월 26일을 경과하면서 시위는 잦아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산에서는 학생들 일부가 치안 활동에 참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격렬했던 시위의 와중에 경찰서와 파출소가 성난 군중의 습격을 받게 되자 대부분의 경찰들이 도주하여 치안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4월 19일 비상계엄령이 발포되면서 부산의 치안은 부산계엄사무소(소장 박정희)가 맡게 되는데, 계엄사무소에서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동아대, 부산대, 수산대, 부산연세대, 부산사범학교 등이 근처의 경찰서를 맡아 치안 활동을 보조하게 된다. 당시 동래경찰서가 배당된 것은 부산대였고 동래고등학교도 함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동래고 학생이었던 구술자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경찰서 정문에서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부산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한 학생 대부분이 시위의 폭력화 양상에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들이 계엄사의 치안활동을 보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보인다.이런 연유로, 또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이유로 구술자는 이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민주화운동과 자주화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고 참여하지 않았다. 동래고 졸업 후 동아대에 진학하였지만 이후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는 관계하지 않고 지냈다.5. 참고자료《국제신보》《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동래고등학교, 1993, 『동래고 4‧19혁명사』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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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모구술자 장제모는 1943년에 일본 오사카 인근에서 태어났다. 워낙 어려서 일본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사용하는 말 속에 일본어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본의 민족 차별적 행위에 큰 혐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였지만 부산에도 인척이 많은 관계로 부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구술자는 어린 시절부터 안중근, 윤봉길과 같은 항일운동을 한 위인들을 굉장히 존경하고 좋아했다. 전기를 여러 번 읽었기에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위인들의 이야기를 술술 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유년 시절의 기억에 초등학교 때의 박두진, 김맹규 선생님에 대해 영향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두 분 다 민족교육을 이야기하고 비판적인 의식을 갖도록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그가 진학을 했던 동래고등학교 역시 항일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족 교육의 전통이 강한 학교였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그런데 2월 말쯤에 학교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학교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유당 인사들이 찾아 와서 노골적으로 여당인 자유당과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이다. 구술자의 기억에 따르면 오히려 이 일이 시위에 대한 생각에 자극을 주었다. 구술자는 이 자리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에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학교 교사들이나 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구술자는 3월 14일의 광무다리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 시위는 한 학교가 아닌 여러 학교가 모여 연합한 것인데 데레사여고, 동성고등학교, 부산상고 등의 학생들도 함께 했다. 이러한 활동과 평소 비판적인 언행으로 장제모의 행동은 자유롭지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은 그에게 각별히 조심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동래고의 4월 18일 시위도 학생회 간부들인 3학년 학생들 소수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는데 워낙 비밀스럽게 추진을 했기 때문에 2학년생인 구술자도 당일 오전이 되어서야 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래고가 가진 강한 민족적 성향 때문에 사복경찰들이 학교에 자주 들어와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고 했는데 그런 것이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학교를 탄압하는 것으로 보여 의분이 생기게 된 측면도 있었다.동래고 3학년 정진철, 이장소 등은 아침 교무회의 시간을 틈 타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학생들과 함께 학교 밖으로 나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도 교문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동문 선배이기도 한 이기복 교감은 온 몸으로 학생들을 막으려 애를 썼다. 정문 쪽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자 학생들은 동편에 있던 담을 밀고 넘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밖으로 나온 동래고 학생들은 힘차게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행렬이 교대 앞을 지나 삼거리로 진출하자 경찰은 경찰병력과 소방차를 동원하여 시위를 막기 시작했다. 거제리에서는 최루탄의 파편과 경찰의 곤봉에 부상을 당하는 학생도 나왔다. 소방차는 붉게 염색을 한 물을 호스로 쏟아내며 학생들의 진행을 방해하였다. 그나마 부상자가 적었던 것은 마산사건의 영향 탓인지 경찰이 최루탄과 공포를 시위대를 향해 직접 쏘지 않은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학생들은 경찰과의 싸움도 사리지 않고 온 몸을 던져가며 시위를 했다.구술자는 4월 18일의 시위가 끝나고 그 다음 날인 4월 19일에도 경남공고와 데레사여고 학생들의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장소에 대한 공지가 없어 광무교 쪽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귀가 길에 서면 쪽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벌써 시위를 벌이는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몇몇 동래고 학생들과 함께 이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서면 로터리 부근에서 시위대 속에 있다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다리를 맞고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가 총탄에 쓰러지자 시민들이 부상자들을 업고 병원에 데려가게 되었던 것이다.4월 26일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대통령의 하야에 대해서는 착잡한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의 부패와 비리는 너무 심각해 모두가 공분을 했지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만든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라는 인식이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시위의 결과가 대통령의 하야까지 가져올 줄은 미쳐 몰랐던 까닭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함과 기쁨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4월혁명의 정국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5. 참고자료《국제신보》《부산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