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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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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장제모
면담자
이광욱, 김선미
구술일자
2010년 8월 27일
구술장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술시간
4시간 13분 39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부산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3년 출생 1959년 동래고등학교 입학 1960년 4월18일 동래고 시위, 4‧19 시위 부상 4‧19혁명 공로자회, 4‧19혁명기념사업회 활동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장제모는 1943년에 일본 오사카 인근에서 태어났다. 워낙 어려서 일본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사용하는 말  속에 일본어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본의 민족 차별적 행위에 큰 혐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였지만 부산에도 인척이 많은 관계로 부산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구술자는 어린 시절부터 안중근, 윤봉길과 같은 항일운동을 한 위인들을 굉장히 존경하고 좋아했다. 전기를  여러 번 읽었기에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위인들의 이야기를 술술 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유년 시절의 기억에 초등학교 때의 박두진,  김맹규 선생님에 대해 영향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두 분 다 민족교육을 이야기하고 비판적인 의식을 갖도록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그가 진학을 했던 동래고등학교 역시 항일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족 교육의 전통이 강한 학교였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2월 말쯤에 학교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학교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유당 인사들이 찾아 와서  노골적으로 여당인 자유당과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이다. 구술자의 기억에 따르면 오히려 이 일이 시위에 대한 생각에  자극을 주었다. 구술자는 이 자리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에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학교 교사들이나 경찰에게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 
구술자는 3월 14일의 광무다리 시위에도 참여했다. 이 시위는 한 학교가 아닌 여러 학교가 모여 연합한 것인데 데레사여고,  동성고등학교, 부산상고 등의 학생들도 함께 했다. 이러한 활동과 평소 비판적인 언행으로 장제모의 행동은 자유롭지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은 그에게 각별히 조심할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동래고의 4월 18일 시위도 학생회 간부들인 3학년 학생들 소수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는데 워낙 비밀스럽게 추진을 했기 때문에  2학년생인 구술자도 당일 오전이 되어서야 시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래고가 가진 강한 민족적 성향 때문에  사복경찰들이 학교에 자주 들어와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고 했는데 그런 것이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학교를 탄압하는 것으로 보여 의분이  생기게 된 측면도 있었다. 
동래고 3학년 정진철, 이장소 등은 아침 교무회의 시간을 틈 타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학생들과 함께 학교 밖으로 나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도 교문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동문  선배이기도 한 이기복 교감은 온 몸으로 학생들을 막으려 애를 썼다. 정문 쪽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자 학생들은 동편에 있던 담을  밀고 넘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동래고 학생들은 힘차게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행렬이 교대 앞을 지나 삼거리로 진출하자 경찰은 경찰병력과  소방차를 동원하여 시위를 막기 시작했다. 거제리에서는 최루탄의 파편과 경찰의 곤봉에 부상을 당하는 학생도 나왔다. 소방차는 붉게  염색을 한 물을 호스로 쏟아내며 학생들의 진행을 방해하였다. 그나마 부상자가 적었던 것은 마산사건의 영향 탓인지 경찰이 최루탄과  공포를 시위대를 향해 직접 쏘지 않은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학생들은 경찰과의 싸움도 사리지 않고 온 몸을 던져가며 시위를  했다. 
구술자는 4월 18일의 시위가 끝나고 그 다음 날인 4월 19일에도 경남공고와 데레사여고 학생들의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장소에 대한 공지가 없어 광무교 쪽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귀가 길에 서면 쪽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벌써  시위를 벌이는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몇몇 동래고 학생들과 함께 이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서면 로터리 부근에서  시위대 속에 있다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다리를 맞고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가 총탄에 쓰러지자 시민들이 부상자들을 업고 병원에  데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4월 26일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대통령의 하야에 대해서는 착잡한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의 부패와 비리는 너무 심각해 모두가 공분을 했지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만든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라는 인식이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시위의 결과가 대통령의 하야까지 가져올 줄은 미쳐 몰랐던 까닭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함과 기쁨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4월혁명의 정국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5. 참고자료

《국제신보》
《부산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
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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