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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

구술자소개

구술자
이종문
면담자
김선미
구술일자
2010년 7월 10일
장소
울산 구술자의 자택
구술시간
1시간 23분 26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부산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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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1942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동래중학교를 진학하면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동래고에 진학하여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에 참여하였다. 3학년 당시 3학년 6반 반장이던 구술자는 동래고 4‧18 시위를 결정한 4월 17일 모임에  학생 간부로 참여하였다. 시위 준비에서 구술자는 플래카드 제작을 맡았는데, 베를 사려고 함께 시장에 간 친구와는 멀리 떨어져 걸을  정도로 보안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등교하고서 비로소 구술자는 자신들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였다. 그리고 계획한대로 교무실의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1, 2학년 후배들을 운동장으로 모으는 과정이 진행되었는데, 후배들의 행동이 얼마나 신속하였던지 3학년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일부가 교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뒤이어 3학년이 움직였는데, 구술자는 정문을 막고 있는 교사들을  운동부 학생들이 완력으로 밀어붙이면서 학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가두시위에서 구술자는 온천장 쪽으로 간 대열에 속했는데,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방향이 온천장 쪽이었는지 몰랐다고 한다. 구술자가 속한 대열은 온천장 입구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4월 26일을 경과하면서 시위는 잦아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산에서는 학생들 일부가 치안 활동에 참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격렬했던 시위의 와중에 경찰서와 파출소가 성난 군중의 습격을 받게 되자 대부분의 경찰들이 도주하여 치안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4월 19일 비상계엄령이 발포되면서 부산의 치안은 부산계엄사무소(소장 박정희)가 맡게 되는데, 계엄사무소에서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동아대, 부산대, 수산대, 부산연세대, 부산사범학교 등이 근처의 경찰서를 맡아 치안 활동을 보조하게  된다. 당시 동래경찰서가 배당된 것은 부산대였고 동래고등학교도 함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동래고 학생이었던 구술자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경찰서 정문에서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한 학생 대부분이 시위의 폭력화 양상에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들이 계엄사의 치안활동을 보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보인다. 
이런 연유로, 또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이유로 구술자는 이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민주화운동과 자주화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고 참여하지 않았다. 동래고 졸업 후 동아대에 진학하였지만 이후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는 관계하지 않고 지냈다. 


5. 참고자료

《국제신보》
《부산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동래고등학교, 1993, 『동래고 4‧19혁명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
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이종문(부산)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4268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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