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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정섭
면담자
이광욱, 김선미
구술일자
2010년 8월 23일
장소
부산 민주공원
구술시간
3시간 18분 42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부산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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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김정섭은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3남 2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구술자의 부모님은 해방이 되자 바로 부산 영도로  들어왔다. 구술자의 부친은 작은 철공소를 운영하였다. 사업을 하는 덕분에 부친은 영도에서 지역유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불가피하게 자유당에 협력을 하는 관계가 되었다. 당시의 지역 유지들은 거의 자동으로 자유당에 입당이 되었으며 선거가 있을 때  협조해야 했다. 구술자는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인 룸비니학생회의 고등학교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구술자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정국은 무척 혼란했다. 마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마산사건의 책임과 경위를 묻는 여야의 싸움이 시끄러웠으며, 이어 3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열렸지만 여당의 지나친  관권 선거와 부정이 극심해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기성세대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혼란에  대해 학생들은 분노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김승을 비롯한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경찰과 학교  교사의 감시망을 피해 학교 밖에서는 신성범의 집에서 자주 모였으며, 학교 안에서는 강당에 있는 음악실을 통해 학생들과 접촉했다.  견제와 감시가 엄했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으며, 점조직과 같이 개별적인 접선을 통해 시위를 준비하였다.  
처음부터 학생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이 마음이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위를 의논하던 학생들 가운데는 부모가 공무원이나 경찰  등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 참여 자체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 소극적인 입장의 학생들은 시위 준비에서  빠지는 대신 그러한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제외된 학생들에게는 시위와 관련해 어떠한 이야기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혼자 독자적으로 진행해가기 보다는 주변의 학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형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상황이 변해 결과적으로는 3월 24일의 시위는  부산고가 주도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초량교회의 등사기를 빌려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밤새 작성하며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했다. 
3월 24일 아침, 학생들은 교무회의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해 나가려 했으나 마침 그날 교무회의가 없어지면서 첫 단추부터 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눈치를 보면서 교실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승  등 시위주도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며 동기들과 후배들을 선동해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교문을 막으러 나온 선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며 시위는 실패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담장을  뛰어 넘고, 밖에서 다시 돌아와 교문을 여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자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의 행렬이 부산역 가까이 이르자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부딪히며  부상자와 검거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힘껏 외쳤고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학생들을 돕고 격려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고의 시위 과정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침 마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조사단의 행렬이  부산진을 지나다가 시위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로 착각하고 돌을 던지는 등 조사단을 공격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고 학생들의 시위는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화제가 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구술자의 경우 다른 학교의 시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부산고 이전의 시위가 있기는 했으나 그  규모를 따져 볼 때 소규모였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파장도 사실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전부는 아니겠지만 시위를  하는 학생들 일부는 깊은 고민을 한 후 시위를 하기보다는 놀기 좋아해서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술자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4‧19 이후의 시위 양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4‧19를 거치면서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4월혁명의 모든 것이 긍정적이었기보다는 부정적인 요소도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그의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지역유지나 부자의 집을 습격하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공격을 받았으며 약탈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경험은 그에게 대중의 선동적인 인상을 크게 심어주었다. 또한 사회적 혼란보다는 질서 유지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5. 참고자료

《국제신문》
《부산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부산고등학교, 1960, 『청조』제10호, 부산고등학교
박현용의 개인 일기
부산고등학교, 2005, 『부산고등학교1960년사』, 부산중‧고등학교총동창회 재경부산중‧고등학교동창회
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
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정섭(부산)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103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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