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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승
면담자
이광욱, 김선미
구술일자
2010년 9월 14일
장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술시간
5시간 11분 1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부산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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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김승은 1942년 부산 좌천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갔기 때문에 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형과  동생(김승) 모두 우등생으로 공부를 잘했는데 형은 동아고등학교에 수석 입학을 하고 학생위원장을 지냈으며, 동생도 부산중학교를 나와  부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을 하는 등 학업이 뛰어났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질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으며, 자녀의  이름을 항렬 따라 짓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지어 줄 만큼 주관이 뚜렷했다. 이 어머니에게서 그는 깊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술자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정국은 무척 혼란했다. 마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마산사건의 책임과 경위를 묻는 여야의 싸움이 시끄러웠으며, 이어 3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열렸지만 여당의 지나친  관권 선거와 부정이 극심해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기성세대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혼란에  대해 학생들은 분노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구술자를 비롯한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경찰과 학교  교사의 감시망을 피해 학교 밖에서는 신성범의 집에서 자주 모였으며, 학교 안에서는 강당에 있는 음악실을 통해 학생들과 접촉했다.  견제와 감시가 엄했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으며, 점조직과 같이 개별적인 접선을 통해 시위를 준비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혼자 독자적으로 진행해가기 보다는 주변의 학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형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상황이 변해 결과적으로는 3월 24일의 시위는  부산고가 주도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초량교회의 등사기를 빌려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밤새 작성하며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했다. 
3월 24일 아침, 학생들은 교무회의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해 나가려 했으나 마침 그날 교무회의가 없어지면서 첫 단추부터 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눈치를 보면서 교실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술자 등 시위주도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며 동기들과 후배들을 선동해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교문을 막으러 나온 선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며 시위는 실패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담장을 뛰어 넘고, 밖에서 다시 돌아와 교문을 여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자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의 행렬이 부산역 가까이 이르자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부딪히며 부상자와 검거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힘껏 외쳤고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학생들을 돕고 격려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고의 시위 과정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침 마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조사단의 행렬이  부산진을 지나다가 시위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로 착각하고 돌을 던지는 등 조사단을 공격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고 학생들의 시위는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화제가 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구술자와 신성범, 박현용 등 시위주도 학생들 몇몇은 이날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선생님들에게 붙들려 교내에서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강압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눌리기는 했지만 이 사건을 단순시위로 접근하다가 마산사건 조사단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난 뒤에는 순수한 학생시위가 아닌 배후세력에 의한 조직사건으로 혐의가 두어져 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부산고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만 할 줄 알았던 모범적인 학생들이었고 시민들 대부분도 그러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순한  사건으로 몰아가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평소 공부만 알고 자기만 챙길 줄 아는 스타일로 놀림을 당하던 부산고 학생들은 이 시위를 통해 많은 부산 시민들로부터 칭찬과  격려, 따뜻한 관심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3월 24일의 시위 이후에 부산고 학생들 대부분은 어떠한 사회 활동이나 학생시위에  가담하지 않고 다시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3학년으로 진급했기에 당장 눈앞에 닥친 대학입시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3월 24일의 시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 충분히 문제 제기를 했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그 뒤에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보다는 학업에 힘쓰는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다만 부산고의 학생위원장으로 그 대표성을 가지고 있던 구술자의 경우에는  4‧19의 시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여러 간담회와 학생들의 회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당시 4‧19 이후  학생들의 동향과 사회적, 지역적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산고 학생들의 경우 4‧19 이후의 시위 양상에 대해서 우려와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다. 관공서를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국 국가적인 손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치안 부재 등 지나친 혼란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인식도 구술자와 다른 구술자들 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정섭과 박현용의 경우 자유당의 부정과 비리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선 유보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술자의 경우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책임 소재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야당인 민주당의 정치적인 한계도 이해하고 있는 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시위를 주도한 그룹의 안에서도 현실인식 등에서 편차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5. 참고자료

《국제신문》
《부산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부산고등학교, 1960, 『청조』제10호, 부산고등학교
박현용의 개인 일기
부산고등학교, 2005, 『부산고등학교1960년사』, 부산중‧고등학교총동창회 재경부산중‧고등학교동창회
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
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승(부산)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5848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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