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사북노동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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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신경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경북 영덕군 강구면으로 이주하여 강구중학교를 졸업하고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군 복무 중 경주로 이주한 후, 생활고로 동원탄좌 사북탄광에서 광부생활을 시작하였으나, 학력이 거의 없었던 광부들에 비해 고학력이었던 신경은 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노동법을 공부하기도 했고 1972년 11월에는 광부 사망에 대한 항의로 작업거부운동을 벌여 국가보위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권력의 비호 하에 동원탄좌는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고 노조는 어용화하여 방관하자, 노조지부장에 이원갑을 당선시켜 바로잡고자 했으나 부정선거로 좌절되었다. 당국은 계엄령을 내세워 광부들의 항의집회를 불허하고 신경을 연행하는가 하면 1980년 4월 21일 광부들이 경찰차에 치이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4월 23일까지 사북 전체를 수천 명의 광부와 가족들이 점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이원갑, 신경 등 대표들이 당국과 협상하여 사북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으나 계엄 당국은 가담자를 색출하여 광부들은 물론 부녀자까지도 고문을 자행하였고, 2년 만기출감 후 정보부원의 감시를 받으며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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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순전남 완도 출생. 부친 사망으로 초등학교 2년 수료의 학력으로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광부가 되었다. 탄광의 열악한 환경, 암행독찰대를 동원한 회사의 횡포 등을 외면한 노조지부장을 교체하기 위해 이원갑을 내세웠으나 부정선거로 좌절되었고, 경찰의 비이성적 행동 등으로 사북항쟁이 폭발했다. 결국 항쟁지도부와 당국이 합의에 이르러 사북지역의 질서가 회복되었으나 경찰에 연행되어 경찰과 보안대원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해 지금까지도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석방된 후 회사에 복귀하여 생계유지를 위해 온갖 차별대우를 참고 정년 때까지 근무했다. 현재 진폐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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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천강원도 평창군에서 출생하였으나 청주로 이주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농사로는 생계유지가 되지 않아 1974년 2월 동원탄좌에 입사했다. 광부생활을 하며 이원갑, 신경 등과 가깝게 지냈고, 열악한 광부들의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노조지부장 이재기를 이원갑으로 교체하려 했으나 부정선거로 좌절됐다. 광산노련에 항의한 결과 당국은 집회허가를 약속했으나 이를 번복했을 뿐더러 광부까지 경찰차에 치게 되자, 사태가 악화되어 이재기 부인 납치 폭행, 경찰관 사망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원갑이 공수단이 사북 공격을 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탄약고 등을 점거했다. 결국 부녀회장 등도 참여한 가운데 협상에 들어가 합의사항을 마련하고 사북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집에서 연행되어 짐승처럼 고문을 당했고 여자들에게는 성고문을 가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1년 후 탄광으로 되돌아갔으나 부인이 만성신부전증으로 13년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이원갑 등과 명예회복운동을 하여 성과를 거뒀다. 대우받는 삶을 사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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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득이북 태생으로 5세 때 월남, 경북 봉화에서 성장했다. 결혼 후, 광부인 남편을 따라 1970년 강원산업에서 사북탄광으로 옮겨와 처참한 광산 사택생활을 했다. 사북항쟁 당시 B지구 부녀회장이었고 두 차례에 걸쳐 시위참여를 권유하는 방송을 했다. 사북 항쟁 후 끌고 가서 무릎 아래에 각목을 넣고 짓밟는 등 심한 고문을 하며 헬기에서 촬영한 사진에 아는 이를 대라고 했고, 지목하면 바로 데려다 고문을 했다. 지금도 심한 고문으로 다리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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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갑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영주 영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광부생활을 했다. 1964년 군에서 제대한 후 처자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광부생활을 시작하여 1973년 퇴직한 후,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 감독으로 들어갔다. 당시 동원탄좌는 기업주, 권력, 노동조합이 삼위일체가 되어 광부들을 억압, 착취했다.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은 옆집 얘기가 들릴 정도이고, 20가구마다 엉성한 화장실과 우물이 있었다. 노조지부(지부장 이재기)는 매월 봉급의 1.5%(1년 총액 1억 5천만 원)를 조합비로 징수하면서도 부비끼, 암행독찰대 같은 회사의 착취, 탄압 행위는 모른 체했다. 이런 노동조합을 바꾸자는 생각에서 지부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이재기 측에서 무자격 대의원을 7명이나 투입하여 낙선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과 노조와 사측이 비밀리에 임금인상을 합의한 것, 그리고 평소 광부들이 갖고 있던 불만 등이 도화선이 되었고, 여기에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1980년 4월 21일 사북항쟁이 마침내 폭발했다. 당국자들과 협상이 결렬된 후, 4월 23일 오전 누군가가 그날 밤 12시에 공수부대가 공격한다고 귀띔해 주어 싸우기 위해 예비군 무기고와 탄광 화약고에 광부들을 배치했다. 이에 공수부대를 동원하지 않는다는 당국자들의 다짐을 받고 협상에 들어가 4월 24일 오전 11개 항의 합의를 이끌어내어 사북은 정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5월 6일 사후 대책회의를 한다며 소집한 후 모인 13명을 폭력을 휘둘러 보안대로 연행하여 고문했고, 이후 계속 가담자를 체포하여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고문을 자행했다.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으로 감형되었으며 대법원에서 원심 파기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석방되었다.(1983년 12월 23일 복권됨) 석방 후 거액을 줄 테니 사북을 떠나달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사북에 남아 보험 일을 하여 영업소장이 되기도 했고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1년 9월 사북사건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마침내 2005년 사북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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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오경북 문경 출생으로 종조부가 광부였고, 부친도 광부로 작업반장을 지냈다. 동생 황인혁과 황인욱도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1968년 9월 사북으로 이주, 1971년 가정 사정으로 사북중학교 2년을 중퇴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고자 상경, 공장 직공 등으로 취업하여 책도 읽을 수 있었으나 공장이 문 닫을 지경에 이르러, 신문이라도 읽으려면 탄광이 낫겠다 싶어 17세이던 1972년 9월 사북으로 돌아와 광부 생활을 했다. 1974년 울산, 서울, 인천을 떠돌다 그해 겨울 다시 사북으로 돌아와 광부생활을 하며 《동아일보》, 《신동아》, 《고시계》 등을 구독했고 1979년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그 사이 광산 탈출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던 중 《기독교사상》 등 서적을 접하며 의식 변화를 겪으며 1980년 1월경 사북탄광에 복귀했다. 사북항쟁 당시에는 이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중심인물이었던 이원갑은 장수, 신경은 책사에 비유할 수 있다. 항쟁이 터진 4월 21일 오후 도시산업선교회에 연락했고 다음날 천영초, 정문화, 이소선 등이 내려와 사태파악을 하는 데 협조했다. 후일 공수부대 중사였던 당숙인 황영연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진압하기 위해 영월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5월 8일 검거를 피해 상경하여 통일사회당 사람들과 교우하던 중, 광주학살의 비극과 신군부의 헌정파괴를 전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에서 CBS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될 미스유니버스 대회장을 장악할 목적으로 폭약(다이너마이트)을 구하러 6월 26일 사북으로 갔다가 밀고로 체포되어, 이근안 등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한 후 1982년 12월 24일 석방됐다. 석방된 후 노점상으로 돈을 모아 1984년 말 사북으로 내려가 활동하다 1987년 9월 파업 배후조종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한 후 결혼했다. 1990년 10월 북한의 실체를 보고자 월북하여 1992년 조선로동당중부지역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8년 석방됐다. 이후 부천에 정착하여 2004년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