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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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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원갑
면담자
송철원
구술일자
2018. 7. 28
구술장소
사북 구술자 자택
구술시간
188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사북노동항쟁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61 경북 영주 영광고등학교 졸업

1961∼1964 군 입대 및 제대

1964∼1973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근무

1973.12.17 동원탄좌개발(주) 사북광업소 입사(감독)

1979.3.27 전국광산조합 동원탄좌지부 고토일갱 대의원 피선

1980.1.11 동원노조지부 지도위원 피선

1980.8.6 사북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 5년 선고 받음. (3년으로 감형)

1981.9.11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석방됨.

1981.10∼1991 제일생명 영업사원으로 취업(1983년 소장으로 진급)

1994∼1999 식당(신토불이가든) 운영

2001.9.20 사북사건 명예회복추진위원회 결성(회장)

구술내용 요약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영주 영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광부생활을 했다. 1964년 군에서 제대한 후 처자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광부생활을 시작하여 1973년 퇴직한 후,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 감독으로 들어갔다. 당시 동원탄좌는 기업주, 권력, 노동조합이 삼위일체가 되어 광부들을 억압, 착취했다.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은 옆집 얘기가 들릴 정도이고, 20가구마다 엉성한 화장실과 우물이 있었다. 노조지부(지부장 이재기)는 매월 봉급의 1.5%(1년 총액 1억 5천만 원)를 조합비로 징수하면서도 부비끼, 암행독찰대 같은 회사의 착취, 탄압 행위는 모른 체했다. 이런 노동조합을 바꾸자는 생각에서 지부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이재기 측에서 무자격 대의원을 7명이나 투입하여 낙선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과 노조와 사측이 비밀리에 임금인상을 합의한 것, 그리고 평소 광부들이 갖고 있던 불만 등이 도화선이 되었고, 여기에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1980년 4월 21일 사북항쟁이 마침내 폭발했다. 당국자들과 협상이 결렬된 후, 4월 23일 오전 누군가가 그날 밤 12시에 공수부대가 공격한다고 귀띔해 주어 싸우기 위해 예비군 무기고와 탄광 화약고에 광부들을 배치했다. 이에 공수부대를 동원하지 않는다는 당국자들의 다짐을 받고 협상에 들어가 4월 24일 오전 11개 항의 합의를 이끌어내어 사북은 정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5월 6일 사후 대책회의를 한다며 소집한 후 모인 13명을 폭력을 휘둘러 보안대로 연행하여 고문했고, 이후 계속 가담자를 체포하여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참한 고문을 자행했다.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으로 감형되었으며 대법원에서 원심 파기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석방되었다.(1983년 12월 23일 복권됨) 석방 후 거액을 줄 테니 사북을 떠나달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사북에 남아 보험 일을 하여 영업소장이 되기도 했고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1년 9월 사북사건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마침내 2005년 사북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공수부대 진입에 대한 광부들의 화약고 점거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