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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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자집안환경과 성장과정, 진안섬유 입사와 야학 참여, 근신섬유입시와 소모임 활동, 대우어패럴 입사, 노조결성과 구속, 서울노동운동연합 활동, 취업시도와 객공생활, 하청공장 운영과 사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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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계진성장과정과 학창시절, 대학입학과 학생운동과 구속, 복학 포기 후 부흥사 입사, 부흥사 활동가 관계와 노조상태, 대우어패럴 노조간부구속사건 당시 노동자 반응, 부흥사 노동자 파업과 사측의 폭력적 탄압, 구속 및 수감생활,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 활동, 산선활동, 한벗노동자회 조직, 금속연맹과 민주노동당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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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갑
권순갑은 1955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동대문구 면목동 언니 집으로 상경했다. 집 인근에 붙어있는 YH 공고문을 보고, 입사했다. YH는 전성기였으며, 이른바 ‘미용실’로 부서 배치되었다. 사장 진동희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충청도 출신의 여공들이 많았다. YH는 가발을 생산했는데, 100% 수출이었다. 상여금과 야근수당이 없었다.
YH 노동조합은 1975년 (5월 24일)에 결성되었다. 초반 노동조합 활동에 열심이었던 분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최순영 지부장을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 보냈던 것은 기억이 난다. 1976년 대의원으로, 1977년 쟁의부장으로, 1978년 부지부장으로 참여했다. 1977년에 기숙사에 입사했는데, 매우 열악했다. YH 노동조합은 산업선교회, JOC와 관련이 없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은 노동조합 집행부가 거의 대부분 받았다. ‘세븐클럽’이 실존했는가 여부는 모르겠다. 사무장은 민경애가 결혼하면서 박태연으로 바뀌었다. 박태연과 친구여서 노동조합에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박태연은 매우 현명하고 업무를 잘 수행했다. YH는 최고 성장기에는 종업원이 4,000여 명이었다.
회사는 1977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공장을 이전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회사가 폐업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노동자들이 대거 사직했다. 이들은 다른 회사로 취업하기도 했으나, YH 근무 경력은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권순갑은 가발 샘플을 만드는 부서여서 사직을 면했다. 회사는 인천에 있던 봉제공장을 면목동으로 이전시켰고, YH의 주력 생산품은 가발에서 신사복으로 바뀌었다. 이 일을 위해 400여 명이 이동했는데, 모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1978년경 노동조합은 인근의 동일교회 야학을 매개로 소모임 활동을 하고, 연극 연습 등을 했다. 회사는 노동조합 간부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한 명도 넘어가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매우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단결력이 높았다.
회사가 1979년 3월 29일 폐업을 공고할 무렵에는 종업원이 1,000여 명 가량이었다. 노동자들은 4월 13일부터 현장에서 2박 3일을 농성하며 타개책을 모색했다. 해결이 안 되자, 7월 30일부터 농성에 다시 들어갔다. 회사는 8월 7일 폐업공고를 발표했고, 10일까지 임금과 수당 그리고 퇴직금을 인수하라고 했다. 진압이 곧 시작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8월 9일 신민당사 농성에 들어갔다. 이 일은 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했던 황주석의 역할이 컸고, 이문영, 문동환, 고은, 인명진, 김영삼 총재 등이 지원했다. 권순갑은 농성장 외부에서 YH의 실정을 언론과 은행 그리고 단체 등에 알리는 일을 맡았다.
구술자는 숨어 지내다 10월 30일 연행되었고, 12월 말경에 석방되었다. 바로 고향 경찰서로 인계되어 감시를 받고 지냈다. 매년 김경숙 추모제를 지내왔는데, 현재는 여성노동계에서 담당하고 있다. ≪YH노동조합사≫의 실제 집필자는 고대 학생운동 출신자였던 천영초였다. YH 출신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되지 않았다. 1985년경 문익환 목사가 시무하던 한빛교회를 다녔는데, 여기에서 알게 된 윤여연을 통해 대동인쇄소에서 일했다. 윤여연이 민청련 사건으로 잠행함에 따라 사업체를 맡았다. 1986년 인천5·3사건에 배포될 유인물을 제작해 보내주고, 바로 연행되어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자, 바로 인쇄소를 폐업하고 1년 동안 숨어 지냈다. 1987년에 인쇄골목에서 동방기획을 개업하여 6월항쟁에 사용된 유인물을 엄청나게 인쇄했으나, 제대로 비용을 받지 못해 손실이 컸다. 노동조합 활동가들 가운데 기억나는 인물은 민경애, 김양호, 김은정, 장남수, 고영난, 설영란, 최순영, 정만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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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수출생지, 가족관계와 유소년기, 대학입학과 학생운동, 민민청 활동과 1차 인혁당 사건,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와 한국노총 중앙조직에서의 활동, 한국노총과 산별노조 및 민주노조와의 관계, 공장새마을운동, 한국노총 해직, 한국노동교육협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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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집안조건과 성장과정, 고등학교 3학년 삼선개헌반대시위, 공장활동과 청계노조 지원활동, 한일도루코취업과 무명당 관계, 노조활동과 1980년 금속노조민주화추진위 활동, 전태일기념사업회 등 에서 노동운동 지원활동, 서노련 내부 활동, 의식변화와 제도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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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성성장과정과 집안환경, 가리봉 공장취업, 효성물산 입사, 현장이전 학생교류와 노동의식 고취, 야학참여, 노조 결성 및 활동, 대우어패럴 노조간부구속사건과 동맹파업, 폐업투쟁, 서울노동자연합 활동, 원림상사 입사와 해고, 복직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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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출생, 출생지, 가족관계, 유소년기 활동, 대학 입학과 학생운동, 3선개헌반대운동, 교련반대운동, 위수령과 강제징집, 졸업 후 성남 주민교회에서 활동, 공장활동, 한국노총 섬유노조에서의 활동, 섬유노조와 민주노조와의 관계, 안산, 안양지역에서의 노동운동,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결성과 활동, 민주노동연구소 활동,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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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김연자는 1955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출생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집안일을 돕다가, 연기군 인근과 천안시 소재 가발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1972∼73년경 상경해 친척이 소개한 문래동 소재 서울통상에 입사했다. 관리자가 노동자를 폭행한 것을 보고 친구와 이직을 결심했다.
김연자는 1974년 남영나일론에 입사했다. 신용협동조합에 저축한 것을 계기로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인연을 맺었고, 각종 프로그램과 소모임에 참가했다. 구술자가 소속된 소모임은 ‘늘벗’으로, 남영나일론의 같은 라인 동료들이었다. 입사할 때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1,000여 명이 동시에 점심식사를 하여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정시 퇴근을 해본 적이 없고, 회사는 카드로 출퇴근을 관리했다. 7년 동안 근무했는데, 5년 동안은 여러 이유들을 대며 ‘시다’로 근무하게 했고, ‘미싱사’로 근무한 것은 2년이었다. 산업선교회에 다니면서 노동법과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다른 회사 노동조합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 각성하게 되었다.
1976년 어용노조 민주화가 실행되었다. 대의원대회(1976. 5. 15.)에서 지부장을 문창석에서 나주식으로 교체하고자 했다. 투표 결과 50대 50표가 나왔다. 산업선교회의 지원을 받았던 노동자들은 섬유노조를 대신해 참석한 방용석 지부장을 신뢰했는데, 정회 후 속개하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농성이 한 달 가량 계속되자, 노동조합 집행부에 3명이 들어가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이것은 기존 노조를 합법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1976년 11월 15일 이른바 ‘정전사건’으로 노사갈등이 격화되었다. 회사가 근무시간 변경을 시도하자, 노동자들은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회사 측에 의해 14명이 구타를 당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피해자를 연행했다. 이 일로 그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교육선전부장 이순정이 해고되었다.
1977년 3월에는 잔업거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정시 근무 후 잔업을 거부하자, 회사는 출근카드를 돌려주지 않아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5월에는 임금인상 투쟁이 발생했다. 양남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려다 11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았다. 구술자는 용케 연행을 면했으나,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 곤혹스러웠다. 11명은 YWCA 등이 주도한 불매운동 덕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노동자들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난입해 인명진 목사와 명노선 전도사를 폭행하고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다. 11명은 6월 24일 현장에 복귀해지만, 별도 관리되었고, 결혼한 사람들이 퇴직하면서 위축되었다. 1978년 3월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5개사 연합시위를 전개하다 6명이 구속되었다. 남영나일론에서는 진혜자가 옥살이를 했는데, 구술자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석방 이후 소식이 단절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사망 이후 1980년 5월 17일 이전까지는 노동자 교육을 강화하는데 활동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5월 17일 인명진 목사가 연행되면서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구심이 약화 및 해체되었다. 김연자 등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알리는 유인물을 회사에 비밀리 배포하기도 했다. 정화조치가 시작되자, 회사는 사직과 삼청교육대 입소 중에 선택하라고 했다. 구술자는 사직하고, 1981년 결혼했다. 이후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2008년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못 다한 공부를 했다. 노숙인 상담과 자원봉사,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등의 활동을 걸쳐 약 10년 전부터는 인천에서 결식아동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도시락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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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성장과정, 세화섬유 입사와 노동환경, 청계피복입사, 야학생활, 대기업 노조 결성 노력, 야학연합회사건과 효성물산 입사, 한마음야학 활동, 효성물산 노동조합 결성과정, 사측의 노조 탄압과 노조 간 연대교육, 효성물산 임금인상투쟁 주도, 노동조합들과의 교류, 효성물산 내 소모임 활동, 노조간부구속사건과 구로지역 노조의 대응방안, 대우어패럴 노조탄압에 맞선 연대투쟁, 동맹파업 해산과 가리봉 연좌농성, 서울노동조합운동연합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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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성장과정과 사춘기, 서클 활동과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고문과 감옥생활, 1977년 현대중공업 입사과정과 취업, 재 구속과 현장 복귀, 건강문제로 사직, 1984년 이후 인천지역에서의 노동운동, 1990년 민중당활동과 이념의 변화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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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임유령노조 지부장 퇴사로 선거 위한 총회 개최 정보를 화학노조에게 듣고 민주노조로 혁신하는 과정, 임금 인상을 위한 끊임없는 농성, 파업 투쟁, 80년대 노학연대투쟁의 성공사례, 극한투쟁 배제로 민주노조 유지, 여성근로자의 모자보건 조항을 단체협약에 명시, 파업투쟁으로 구속, 출감 후 상위 노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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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임
김은임은 1955년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형편상 진학하지 못하고 상경했다. 동대문구 장안동 소재 풍미제과에서 1년 간 근무했다. 1974년 6월 6일 삼성제약에 입사했다. 삼성제약은 계절 요인에 따라 근무환경이 달랐고, 임금은 보통수준이었다. 회장은 김영설인데, 약사회 초대 회장을 지낼 정도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1977년 방위성금 등을 납부하지 않는 등 정부에 미온적 협조로 세무조사 등을 받았고, 1977년부터 10년간 법정관리를 받았다. 근무 시간 이후 무보수 노동에 규칙적으로 동원되었고, 비자발적으로 야근이 이루어졌다. 삼성제약은 예상하는 것보다 위상상태가 좋지 않았다. 경조사 휴가도 없었다. 노조가 결성된 후에 유급휴가가 보장되었다. 급식도 열악했다.
1975년 5월 한국노총 화학노련의 홍보를 계기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했던 4인 가운데 지부장 후보는 신고필증이 나오기 전에 회사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3인은 다른 사업장들로 전출되었다. 회사는 사장 비서(김영남)를 내세워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약 1년 만에 김영남이 결혼하고 사직하면서, 지부장을 새로 선출하게 되었다. 회사는 김영순(김현진), 권오선 등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회유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총회를 휴회하고 개회하지 않았다. 조향자, 김명선 등도 주요 인물들이었다. 한편 1972년 정종애 등이 추석보너스 인상지급 요구투쟁을 했던 사안과 1974년 여름 상여금 관련 투쟁은 입사 이전과 직후여서 거의 기억이 없다. 김석자 등이 1972년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1971년 외자기업 한국화이자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 계기가 되어 화학노련 후원으로 제약회사들에서 노동조합이 대거 결성되었다. 1976년 8월 권오순이 지부장으로, 김영순은 부지부장으로, 정종애가 부녀부장에 선임되었다. 윤미숙은 간부가 되었다. 회사가 권오순이 학력을 속였다며 해고하자, 1977년 경 김영순이 정식으로 지부장이 되었고, 김은임이 부지부장이 되었다. 이 체제가 거의 그대로 1980년 정화조치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1977년 회사가 법정관리를 받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회사는 노조를 장악하기 위해 소모임을 결성했다. 삼성제약 노조는 산업선교회나 JOC와 인연이 없었다. 필요하면, 인근 대학들의 학생과 노동부문 전문가(단체)들로부터 직접 지원을 받았다. 따라서 다른 노조들에 비해 내부 구성원들의 결속력이 높았고, 이른바 노동문화의 수준도 높았다. 삼성제약 노동조합과 화학연맹의 관계도 비교적 좋았다.
1980년 임금투쟁은 3월에 마무리되어 당국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노보를 제작했는데, 1985년 빨갱이라고 탄압을 받았다. 김은임은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인맥도 중요했다. 한국노총이 1980년 9월 정화조치 대상자들을 하달하자 항의 방문했다. 12월에는 당국이 일제히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삼성제약에서는 지부장 김영순과 김은임이 합수5국으로 연행되어 약 2주간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김영순은 정화조치의 대상자로, 김은임은 관련자로 조사를 받았다. 김영순은 지부장을 사퇴해야 했고, 김은임이 지부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김영순을 지도위원으로 선임해 노동조합 활동에는 영향이 없었다.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어렵게 전개했는데, 기대보다 낮은 수준에서 타결되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노고를 인정해주었다. 1990년 3월 12일 노동부 업무조사 거부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나, 해고되지는 않았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민주화실천위원회의 결성과 활동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화학연맹, 한국노총 조직국장, 한국노총 경기본부 여성국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전노협 참여 등의 권유도 있었지만, 한국노총 민주화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노동운동에서 급진주의나 편을 가르는 방식의 사고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