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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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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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홍구술자는 1958년 서울 교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한 뒤 1959년 4월 제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60년 3월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부정선거를 통한 정‧부통령 선거를 자행할 당시 제주대학 법학과 2학년이었다.1960년에 접어들자 부정선거 공작(3인조, 5인조 선거 등)에 관한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제주신보》 등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부정선거의 정보가 알려졌다. 1960년 2월 겨울방학 기간에 법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전국적으로 4월 18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제주도에서도 제주시내 고등학생 대표들과 연계하여 시위를 전개할 것을 모의하였다. 고등학생들과의 연결은 1958년과 1959년 두 해에 걸쳐 제주대학 법학과가 주최하는 세계인권선언기념식 행사에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4월 20일 아침 10시 30분에 제주대학생 30~40명이 대학 강의실에 모여서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했으나, 교직원들과 경찰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4월 27일 밤에 학생, 시민 등 천여 명이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전개하였다. 당시 고등학생 대표들은 제주대학 학도호국단 산하 농촌계몽단이 부정선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제주대학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대학생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이때 집회 군중 앞에 구술자가 나서서 혈서를 쓰며 '기성세대 물러가라'고 외치자, 고등학생들이 제주대학들의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당시 제주도 시위에는 서울에서 시위를 치르고 귀향한 강경선(서울대), 강영석(중앙대), 고태호(연세대), 양영식(고려대) 등 재경 유학생들도 동참하였다.5월 초에는 법학과 선배 이문교 등과 더불어 '4‧3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하여 4‧3진상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주대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통일문제연구회'를 결성하여 통일방안 공청회(1960. 11. 13, 제주시 중앙극장)를 열어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5‧16이 일어나서 수배령이 내렸는데, 구술자는 제주대학 법학과를 휴학하고 동국대에 입학한 때여서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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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구술자는 1957년 제주대학 법학과를 1회로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30일 해병대에 입대하여 9개월 간 교육을 받은 후 1958년 7월 초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진해에 근무하다가 1959년 말 해병제주경비대에 발령을 받았고 1960년 3월 1일 중위로 진급하여 경비소대장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구술자의 부친은 제주신보사 전무이사인 신두방으로, 제주도에서 민주당에 입당하여 신익희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 당시 선대본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구술자는 3‧15 선거 때 군부대에서 행해진 선거에서 투표권을 박탈당하게 되었다.제주지역에서 행해진 4월말 관덕정 시위 때에는 해병경비대 자격으로 도지사 관사 등 공공기관 경비 활동을 펼쳤다. 당시 관덕정 시위 때 고정협 제주시장이 시위대에 의해 단상에 불려 올라가 문책을 받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제주대학생들은 대부분 구술자의 후배들이었기 때문에 구술자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했다.제주시 시위가 진정된 후 제주도 일원을 순시하면서 경비 활동을 펼쳤다. 서귀포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서장은 도피하고 경찰서장실에는 관덕정 시위를 주도한 제주대 법학과 고시홍이 서장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법환국민학교에 갔을 때에는 상당수의 주민들이 집회를 열어 격렬한 분위기였는데, 육군 경비대가 진정시키지 못한 상황을 구술자가 나서서 정리하였다.4월혁명 당시 군은 시위 진압 등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경비활동을 벌였다. 군은 중립에 섰다고 할 수 있다.여수‧거창 등지에서 과거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규명운동이 전개되자 구술자의 부친은 제주신보사 전무로 재직하면서 4‧3사건 진상규명운동을 펼쳤다. 제주대학생들로 구성된 '4‧3사건진상규명위원회'는 원래 '양민학살진상규명동지회'로 시작했고, 구술자의 부친(신두방)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이문교의 구술 내용과 다름). 이 때문에 5‧16군사정변 직후 구술자의 부친은 구속되었는데, 함께 구속된 이문교와 연계되었는지 여부가 당시 재판의 쟁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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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하구술자는 1957년 대정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고향인 대정면 무릉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무릉리에는 4‧3사건 때 마을 주민들이 집단 희생된 터인 '왕개동산'을 관리하는 '향상회'라는 자치적인 청년회 조직이 있었는데, 구술자는 4월혁명 당시 향상회의 총무 자리에 있었다.3‧15 선거가 다가오자 무릉리 출신의 경찰 김일용이 서울에서 부정선거 사실을 폭로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청년들은 자극을 받았다. 마침 무릉리에서도 5인조 투표를 위한 사전선거운동이 전개되었고, 향상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5인조 조직 지침이 내려왔다. 이에 구술자를 포함한 향상회원 7명은 3월 7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뜻으로 선거벽보의 이승만‧이기붕 포스터를 훼손하는 행동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7‧29 총선 때 가파도 출신의 한국사회당 후보 김성숙의 선거를 도왔다. 김성숙 후보는 선거 기간에 4‧3사건 및 예비검속 희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약속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1960년 8월 군 입대했는데, 5‧16쿠데타 후 외출 나와서 헌병대에 근무하던 친구를 따라 서대문형무소에 갔다가 제주도 출신의 김성숙, 황대정, 채만화 등을 대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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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해구술자는 애월읍 장전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4‧19 전에 제주도청에서 촉탁을 근무하였다. 1960년 4월혁명 당시에는 민주당(위원장 고담룡) 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다.3‧15 선거 때 구술자의 명단이 선거인 명부에 누락되어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야당 인사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심했다.관덕정 시위 때 고익조 제주대학 학생위원장이 주동하는 것과 시위대에 의해 고정협 제주시장이 단상에 올라가 곤욕을 치르는 것을 목격하였다.애월읍 내에서 민주반역자 처단을 위한 집회가 열렸는데, 기관장, 전직 면의원, 경찰지서장 등을 불러 세워 성토하였다.7‧29총선 때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무소속 홍문중 후보를 지지하여 당선시켰다. 홍문중 후보는 당선된 뒤 민주당에 복당하였다.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빚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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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교구술자는 1960년 3월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부정선거를 통한 정‧부통령 선거를 자행할 당시 제주대학 법학과 2학년 대의원으로서 학과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었다.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의 피해, 구호곡 비리사건 발발 등으로 민심이 동요한 데다,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내도에 따른 반공단체의 통합, 공무원친목단체의 통합 등 노골적인 사전선거운동을 벌여서 자유당에 대한 반감이 누적되었다. 1960년 3월 3일 민주당의 부정선거 사실 폭로와 3월초 제주도에서의 야당인사 구금사건 등으로 제주대학 법과학생들은 3월 7~8일경에 자유토론을 통해 부정선거 규탄 논의가 부상했다.1960년 4월 20일에는 제주대학 법학과 2학년 강의실에서 데모 계획을 공식 논의하고, 결의문 낭독(이문교), 성명서 낭독(고시홍)을 통해 의지를 다졌다. 이후 제주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회와 연대하여 동년 4월 22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갖기 위한 계획을 진행했다. 이 계획은 대학생들의 동향과 구술자를 감시하던 경찰에 노출되어 가족, 교수, 경찰들이 동원된 방해와 분산 공작으로 실패했다.당시 전국 각지에서는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계속 일어났고, 제주에서도 구술자를 비롯한 7∼8명이 계속 데모 준비를 해 오던 중 1960년 4월 26일 이숭만 대통령 하야 당일 제주시 관덕정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데모에 나서게 되었다. 4월 27일에는 학생‧시민 등 2,000여 명이 운집하여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 부정선거 규탄집회는 29일까지 계획되었고, 이 집회에서 구술자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대통령 하야 후 사회 질서가 혼란해지자 '전도학생연합선무대'를 조직하여 경찰과 합동으로 전도를 일주하면서 질서 회복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4‧19학생희생자돕기 모금운동을 벌였다.제주대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통일문제연구회'를 결성하여 통일방안 공청회(1960. 11. 13, 제주시 중앙극장)를 열어 제주도민들의 남북통일에 대한 의견을 집약하였다.(《제주신보》, 1960. 11. 11 ; 《제민일보》, 1960. 11. 14)1960년 5월 제주대학 법학과 학생 7명으로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하여 7일 동안 도보로 제주도 일주를 하며 4‧3사건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국회 4‧3사건 진상조사단이 제주도 방문 시 4‧3 피해 내용을 증언하였다.1961년 5월 17일 5‧16쿠데타 이후 계엄군 당국에 의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6개월 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어(1961. 11. 13) 복학하게 되었다.(《한국일보》, 1961.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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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구술자는 제주시 소재 오현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민주당 비밀당원으로 가입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하였는데, 강원도 11사단 사령부 정훈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3‧15 선거를 군부대에서 치렀는데, 군대에서도 3인조, 5인조 토표가 실시되었다. 구술자는 야당 성향이기 때문에 야당 후보에게 투표했는데, 사실이 드러나서 곤욕을 치렀다. 투표장에 온 감시원들이 칸막이 뒤에서 기표 상황을 몰래 엿보고 있던 사실을 뒤에 알았다.4‧19 때 서울에 있는 사단장 숙소에 심부름 왔다가 동대문경찰서가 불타는 상황 등 서울 시위 상황을 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