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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교

구술자소개

구술자
이문교
면담자
박찬식, 김규리
구술일자
2010년 11월 15일
장소
제주관광대학 구술자의 연구실
구술시간
1시간 9분 7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제주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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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1960년 3월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부정선거를 통한 정‧부통령 선거를 자행할 당시 제주대학 법학과 2학년 대의원으로서 학과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었다.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의 피해, 구호곡 비리사건 발발 등으로 민심이 동요한 데다,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내도에 따른 반공단체의 통합, 공무원친목단체의 통합 등 노골적인 사전선거운동을 벌여서 자유당에 대한 반감이 누적되었다. 1960년 3월 3일 민주당의 부정선거 사실 폭로와 3월초 제주도에서의 야당인사 구금사건 등으로 제주대학 법과학생들은 3월 7~8일경에 자유토론을 통해 부정선거 규탄 논의가 부상했다.
1960년 4월 20일에는 제주대학 법학과 2학년 강의실에서 데모 계획을 공식 논의하고, 결의문 낭독(이문교), 성명서 낭독(고시홍)을 통해 의지를 다졌다. 이후 제주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회와 연대하여 동년 4월 22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갖기 위한 계획을 진행했다. 이 계획은 대학생들의 동향과 구술자를 감시하던 경찰에 노출되어 가족, 교수, 경찰들이 동원된 방해와 분산 공작으로 실패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는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계속 일어났고, 제주에서도 구술자를 비롯한 7∼8명이 계속 데모 준비를 해 오던 중 1960년 4월 26일 이숭만 대통령 하야 당일 제주시 관덕정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데모에 나서게 되었다. 4월 27일에는 학생‧시민 등 2,000여 명이 운집하여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 부정선거 규탄집회는 29일까지 계획되었고, 이 집회에서 구술자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대통령 하야 후 사회 질서가 혼란해지자 '전도학생연합선무대'를 조직하여 경찰과 합동으로 전도를 일주하면서 질서 회복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4‧19학생희생자돕기 모금운동을 벌였다.

제주대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통일문제연구회'를 결성하여 통일방안 공청회(1960. 11. 13, 제주시 중앙극장)를 열어 제주도민들의 남북통일에 대한 의견을 집약하였다.(《제주신보》, 1960. 11. 11 ; 《제민일보》, 1960. 11. 14)

1960년 5월 제주대학 법학과 학생 7명으로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하여 7일 동안 도보로 제주도 일주를 하며 4‧3사건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국회 4‧3사건 진상조사단이 제주도 방문 시 4‧3 피해 내용을 증언하였다.

1961년 5월 17일 5‧16쿠데타 이후 계엄군 당국에 의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6개월 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어(1961. 11. 13) 복학하게 되었다.(《한국일보》, 1961. 11. 11)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이문교(제주)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37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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