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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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술구술자 구양술은 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 출신으로 1939년생이며, 1960년 당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조대부고) 3학년이었다. 구술자는 3‧15 선거와 관련해 이 지역에서 일어난 보성닭죽사건, 함평올빼미사건 등 당시 정치적 정세와 분위기에 대해서 구술하였다.4‧19시위 상황에 대해서는 오후 6시 동방극장에서 집결된 이후부터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구술자는 동방극장 앞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시위를 계속 해 나갈 것을 모여 있는 시위대들과 결의하고 적극적으로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시위대가 도청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시위대가 광주시청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을 구술자는 시청에 불이 나면 주변까지 위험해지므로 불을 지르면 안 된다고 시위대를 막았다고 한다. 시위대가 학동파출소에 이르자 학동파출소 소장인 김남중은 시위대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고,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대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고, 여기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이에 구술자는 주변에 있던 학생들과 함께 시신을 전대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그 학생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가 바로 광주 4‧19의 첫 번째 희생자인 故강정섭이다.구술자는 양림동파출소로 가서 시위대에 합류했고 양림동파출소를 지나 광주경찰서 쪽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때는 모든 시위대들이 운집한 상태였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시위대의 열기는 높아갔다고 한다. 9시 40분경,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를 에워싸자 경찰서 쪽에서 갑자기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쏴라, 밀어라, 공격하라'라는 소리와 함께 시위 군중들을 향해 발포가 시작되었다. 경찰의 총알을 피해 시위 군중들은 도망쳤으나, 이곳에서 7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구술자는 시위대 앞에 있었지만 다행히 부상을 당하지 않고 경찰의 연행을 피하기 위해 밤새 숨어 있다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갔다.구술자는 20일 전남대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위에도 참석했다고 하나 이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내용을 구술하지 않았으며, 이후 4‧19광주발포사건 재판 과정에서 참관하여 목격한 내용을 소상히 구술하였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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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현
어린시절 성장과정과 조부 김종주 선생, 통일민주청년동맹 결성과정과 2대악법반대투쟁, 5.16 군사쿠데타 후 구속․수감생활, 민족통일학생연맹 결성과정과 통일민주청년동맹 성격, 통일민주청년동맹과 민주민족청년동맹과의 통합, 1960, 70년대 조직사건, 불꽃회사건과 4월혁명 당시 시위 문화, 1962년 출소 당시 추억, 통일민주청년동맹 : 강령, 주요 참여 인사, 연대활동, 전남대학교 민족통일학생연맹 결성과정, YTP(청사회, Young Thought Party), 광주지역 운동 계보, 전두환대통령저격사건, 교사 시절 체 게바라에 대한 일화, 1990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활동과 NL, PD, 4월혁명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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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용구술자는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만금리 출신으로, 1943년생이다. 1960년 당시 구술자는 광주공업고등학교(공고) 전기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공고생들은 3‧15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4월 18일 고려대학교피습사건을 기점으로 학생들이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공감하고 있었다고 한다.구술자는 4월 19일 오전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진행되지 못했고 밖으로 나가려는 공고생들을 각 반에서 교사들이 제지했다고 한다. 구술자 역시 교실에서 담임의 제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시위에 동참해야 하겠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교실 2층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뜨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를 계기로 공고생들은 교실 밖으로 나와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정작 구술자는 유리창을 깨고 넘어지면서 오른팔 동맥과 후두부 파열상을 입고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 신외과로 이송되었다. 당시 오른팔 동맥 파열이 심각한 상태로 응급수술을 받고 치료를 위해 큰아버지가 계신 영광군으로 몸을 피하고 거기에서 재가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내상이 더욱 심각해졌고, 견디다 못해 광주로 올라와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구술자는 공고생들의 시위를 촉발하게 한 장본인이지만 정작 본인은 부상을 당해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4‧19 이후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4‧19혁명민심수습학생대책위원회'가 조직되는데, 구술자는 공고 대표로 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구술자는 '4‧19혁명민심수습학생대책위원회'를 4‧19계몽반이라고도 칭했는데, 당시 조선대학교 박노경의 책임 하에 고등학교 10곳에서 대표 2명, 대학교 2곳에서 대표 2명으로 구성되어 광주전남지역을 3일간 돌면서 4‧19의 당위성과 의미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구술자의 경우 광양 지역을 담당하여 광양군민들 앞에서 4‧19관련 강연을 했던 경험을 구술하였다.이후 구술자는 4‧19기념사업과 관련해 활동을 전개했는데, 혁명동지회 광주전라지부장을 맡으면서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와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을 발행했으며, 4‧19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4‧19 문화운동을 전개해 4‧19를 문화예술 영역과 삶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사업을 전개하였다. 현재 구술자는 4‧19문화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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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동구술자 서수현은 1930년생으로 평안남도 평양 출생이다. 구술자의 부친은 목사였는데,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기독교에 대한 탄압 때문에 가족들을 두고 월남을 하게 된다. 4남 2녀 중 장남이었던 구술자는 어머니와 함께 가족들 생계를 꾸려나가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아버지를 찾아 열여덟 살에 홀로 월남한다.월남한 구술자는 1년 정도 장돌뱅이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목포 문태중학교 3학년에 편입시험을 보고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나면서 광주에 연합대학이 생기게 되자 구술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2학년까지 낮에는 연합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미군부대 교환수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다가 3학년 때 서울대학교가 다시 서울로 옮기게 되자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다. 당시 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SO훈련을 받아야만 했는데, 구술자도 SO훈련을 받기 위해 광주로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구술자는 갈 곳이 없어 절에 들어갔다가, 친교가 있던 숭일고등학교 교장이 떠올라 숭일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보게 된다.숭일고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게 된 구술자는 1960년 당시 3학년 1반 담임과 학생지도부 부과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경찰들의 학원사찰과 정치적 이용이 있었는데, 숭일고에서도 경찰이 교무실에 근무하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동향을 살폈다고 한다. 예컨대 3‧15 선거 국면에서는 경찰들이 선생님들에게 가정방문을 하고, 투표참여 여부를 조사하여 파악하라는 지시까지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학생지도를 담당하고 있던 구술자는 경찰의 학생 사찰에 대해서 몇몇 학생들에게 귀띔을 해주며,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4월 16일 숭일고 3학년 학생들 10여 명을 중심으로 시위 모의가 이루어지는데, 구술자는 이들의 시위 모의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학생들에게 폭력적인 시위가 되지 않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4월 19일 오후 1시경 숭일고생들이 무리를 지어 운동장에 모여 교문을 나서려하자 학교 측에서는 교문을 잠그고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본 구술자는 학생들의 시위를 드러내놓고 지지할 수 없어 우회적으로 담 뛰어 넘지 말라는 소리를 해, 학생들이 담을 뛰어 넘어 학교 밖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숭일고 학생 200여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시내 쪽으로 나가게 되는데, 구술자는 학생지도 담당으로서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을 느끼고 학생들을 뒤쫓아 시내로 나가게 된다. 구술자는 시내 동방극장 쪽에서 조대부고생들과 숭일고생들이 합류하게 되고, 시청 쪽에서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 학생시위대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게 되자 사태를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숭일고에서는 교무회의를 통해 4‧19에 참여한 학생들의 징계 문제를 논의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뜻에 암암리에 동의하던 선생님들 사이에서 강력한 처벌보다는 경미한 경고 정도로 징계를 내리기로 합의하게 된다. 20일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일부 학생들이 서수현의 집에 찾아와 이후 문제들을 상의하자, 구술자는 학교 측의 결정과 상황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독려했다고 한다.이후 광주에서 교사로서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던 구술자는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서울로 올라가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광주에서 할 수 없었던 정권에 대한 규탄과 답답한 마음을 서울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자신의 뜻을 풀고자 했다고 했던 것이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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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현구술자 서수현은 1930년생으로 평안남도 평양 출생이다. 구술자의 부친은 목사였는데,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기독교에 대한 탄압 때문에 가족들을 두고 월남을 하게 된다. 4남 2녀 중 장남이었던 구술자는 어머니와 함께 가족들 생계를 꾸려나가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아버지를 찾아 열여덟 살에 홀로 월남한다.월남한 구술자는 1년 정도 장돌뱅이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다가 목포 문태중학교 3학년에 편입시험을 보고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나면서 광주에 연합대학이 생기게 되자 구술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2학년까지 낮에는 연합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밤에는 미군부대 교환수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하다가 3학년 때 서울대학교가 다시 서울로 옮기게 되자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다. 당시 대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SO훈련을 받아야만 했는데, 구술자도 SO훈련을 받기 위해 광주로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구술자는 갈 곳이 없어 절에 들어갔다가, 친교가 있던 숭일고등학교 교장이 떠올라 숭일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보게 된다.숭일고에서 독일어 교사로 재직하게 된 구술자는 1960년 당시 3학년 1반 담임과 학생지도부 부과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경찰들의 학원사찰과 정치적 이용이 있었는데, 숭일고에서도 경찰이 교무실에 근무하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동향을 살폈다고 한다. 예컨대 3‧15 선거 국면에서는 경찰들이 선생님들에게 가정방문을 하고, 투표참여 여부를 조사하여 파악하라는 지시까지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학생지도를 담당하고 있던 구술자는 경찰의 학생 사찰에 대해서 몇몇 학생들에게 귀띔을 해주며,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4월 16일 숭일고 3학년 학생들 10여 명을 중심으로 시위 모의가 이루어지는데, 구술자는 이들의 시위 모의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학생들에게 폭력적인 시위가 되지 않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4월 19일 오후 1시경 숭일고생들이 무리를 지어 운동장에 모여 교문을 나서려하자 학교 측에서는 교문을 잠그고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를 본 구술자는 학생들의 시위를 드러내놓고 지지할 수 없어 우회적으로 담 뛰어 넘지 말라는 소리를 해, 학생들이 담을 뛰어 넘어 학교 밖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숭일고 학생 200여 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시내 쪽으로 나가게 되는데, 구술자는 학생지도 담당으로서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을 느끼고 학생들을 뒤쫓아 시내로 나가게 된다. 구술자는 시내 동방극장 쪽에서 조대부고생들과 숭일고생들이 합류하게 되고, 시청 쪽에서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후 학생시위대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게 되자 사태를 파악하고 수습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숭일고에서는 교무회의를 통해 4‧19에 참여한 학생들의 징계 문제를 논의하게 되는데, 학생들의 뜻에 암암리에 동의하던 선생님들 사이에서 강력한 처벌보다는 경미한 경고 정도로 징계를 내리기로 합의하게 된다. 20일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일부 학생들이 서수현의 집에 찾아와 이후 문제들을 상의하자, 구술자는 학교 측의 결정과 상황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독려했다고 한다.이후 광주에서 교사로서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던 구술자는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서울로 올라가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광주에서 할 수 없었던 정권에 대한 규탄과 답답한 마음을 서울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자신의 뜻을 풀고자 했다고 했던 것이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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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식구술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출신으로 1942년생이다. 1960년 당시 신강식은 광주고등학교(광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체격이 좋고 교우관계가 활발하여 광고 내에서 씨름부, 규율부로 활동하였으며, 친구들과 친목 모임인 형제서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당시 이승만 정권의 3선개헌, 3‧15 부정선거 등의 소식을 접하면서 광고생들 사이에서는 비판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피습사건이 계기가 되어 광고생들은 시위를 모의하게 되는데, 구술자를 포함 12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밤새 시위를 계획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구술자는 조병수와 함께 시위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기로 한다. 하지만 19일 구술자는 시위를 알리는 종을 치기가 여의치 않아 다른 학우에게 종치기를 부탁하고 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간다. 광고생들이 교문 밖으로 흩어지면서 진격하는 과정에서 구술자는 시위대 사이로 지나가는 백차에 올라타고 광고에서 가톨릭센터 앞까지 백차를 타고 이동했으며, 가톨릭센터 앞에서 내려 시위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진압하자 시위대는 흩어지고 구술자도 시위대에서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구술자는 시위 참여를 막는 누나들에 의해 고향인 고흥으로 내려가게 되고 더 이상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1, 도서출판 심미안, 2006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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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웅구술자 윤승웅은 1942년생으로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동율리에서 태어났다. 구술자는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었고, 고등학교도 미션 계통인 광주숭일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구술자는 숭일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교내 예배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부패, 마산 시위로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당시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구술자는 김주열 시신이 실린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고 동년배들과 시위를 모의하게 된다.4월 16일 숭일고 학생들 6명(윤승웅, 김귤근, 최영길, 김소현, 서동룡, 박태성)이 학교 후문 할머니빵집에서 만나 1차로 시위를 모의하게 된다. 이들은 학생들을 시위에 가담하게 하기 위해서 3학년 각 반에서 3명의 대표를 선출하고, 이후 다른 학교와 연대 및 동향을 살핀 후 다시 모여 구체적인 시위를 계획하기로 한다.4월 18일 고려대학교 시위 소식이 알려지면서 19일 시위를 하기 위해 2차 시위 모의를 하게 된다. 하교 후 구술자를 비롯하여 김귤근, 최영길, 서동룡, 김소현, 김소만, 김용석, 박태성이 최영길의 집에 모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결정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이들은 숭일고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각자 설득조, 동원조로 역할을 나누고, 구호를 정하여 플래카드를 제작하기로 했으며(구술자 윤승웅, 김소현 담당), 시위행진 방향과 경찰 저지 시 행동방침, 흩어졌을 시 재집결 장소까지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결정한다.4월 19일 이들은 아침 자습시간에 예배실에 모여 전날 계획했던 시위 결정사항을 재점검하고 세부적인 시위준비를 한다. 오후 1시경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저지하기 위해 학교의 정문과 후문을 모두 잠그지만, 학생들 50여명이 후문 담을 뛰어 넘어 양림교 쪽으로 먼저 뛰어갔고, 이어서 150여 명이 합류하여 약 200여 명의 숭일고 시위대가 형성되게 된다. 이들은 양림교를 지나 금동 사거리에서 경찰에게 저지를 당하는데, 선두에 있던 이들이 경찰 저지를 뚫고 시내로 진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 있던 학생들이 경찰의 곤봉에 맞아 팔과 다리에 타박상을 입는데, 구술자도 머리에 상처를 입게 된다.숭일고 시위대는 동방극장을 지나 우체국 쪽에서 조대부고 생들과 합류했으며, 금남로로 진입하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대 시위를 구성하게 된다. 시위대는 충장로 파출소로 향하여 파출소를 습격하는데, 구술자는 경찰서 내부에 걸려있던 태극기를 밖으로 떼어와 시위대들을 박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금남로 쪽으로 다시 돌아와 광주경찰서 앞에서 경찰의 저지를 당하면서 시위대는 학동파출소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구술자는 시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남광주 쪽으로 빠지는데, 학동파출소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를 목격하게 된다. 학동파출소에서 경찰의 발포에서 의해 강정섭이 사망하고 시위대는 흩어지게 되는데, 구술자도 시위대에서 떨어지면서 밤11시경 귀가하게 된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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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교
어린시절 성장기 이야기, 4월혁명 발생 당시의 상황, 조선대학교 박철웅총장 퇴진운동과 7.29 총선거에서의 활동상황, 4월혁명 1주년 행사, 2대악법반대투쟁 : 참여단체, 모금방법, 학생동원방법, 5.16 군사쿠데타와 지명수배, 구속 후 광주, 서울 구치소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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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구술자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도림리 출신으로, 1935년생이다. 구술자는 1958년부터 광주전라남도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60년 당시 3‧15 선거나 민주당의 정치집회와 시위에 대해 구술하였다. 구술자는 1960년 3‧15 선거 국면에서 자유당의 정치적 횡포를 막기 위해 전라남도 지역을 순회하기도 하였고, 민주당 정치인들의 유세나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3월 15일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과 당원들이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의미에서 전개한 '곡(哭) 민주주의' 시위다. 이날 월파 서민호 선생을 포함 주요 정치인 5-60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민주 당사부터 시내 법원거리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시위에는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이가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1960년 4‧19 당시 구술자는 유동 근처에서 영수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근처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그 소리를 듣고 학원생들 20여 명과 함께 시위에 합류한다. 이준수가 시위대에 합류한 시간은 오후 1-2시 경이며, 유동다리를 지나 농고생, 서중생들과 합류하여 충장로2가까지 진입하게 된다. 시위대는 시내로 진격하면서 주위에 있던 파출소에 구호를 외치면서 돌을 던졌다. 당시 시위대가 외쳤던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 '3‧15 부정선거 다시 해라' '김주열군을 살려내라' 등이었다고 한다.충장로2가에 진입한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고 있던 경찰과 대치 상태에 이르는데,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위대들이 계속해서 진격하자 총소리가 났고 시위대가 점차 해산하자 이준수도 집으로 귀가하였고 이후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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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구술자 이홍길은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출신으로, 1942년생이다. 1960년 당시 구술자는 광주고등학교(광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사적 인연이나 서클 활동으로 교우관계가 활발했다. 구술자는 이승만 정권의 3선개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활동 소식을 접하면서 분개하였고,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3‧15 선거 국면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을 알리는 벽보를 부착하기도 한다.3‧15 부정선거 이후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가 일어나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는데, 구술자는 친구들과 함께 광고의 시위를 모의하거나 광주 고등학교의 연합 시위를 시도하지만 시위가 이뤄지지는 못했다.그러다가 18일 고려대학교 피습사건이 알려지면서 구술자는 친구 홍갑기와 바로 다음날 시위를 계획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하숙방에 모이게 된다. 자신의 하숙방에 모여서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짜고 각자 역할을 맡게 되는데, 구술자는 다른 학생들을 시위에 동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누출되면서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이 등굣길에 한 명씩 교장실로 불려가게 된다. 교장실에 모인 학생들 사이에서 시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사이 시위에 동참하고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게 된다. 이에 교장실에 감금되었던 학생들이 유리창 문을 열고 나와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고, 구술자는 정문으로 나가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문으로 빠져나왔다가 이후 빠져나온 광고생들과 합류하여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구술자는 광고생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중앙초등학교까지 진출하였으나 경찰의 진압에 흩어져 오후 2시 경까지 시내를 돌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구술자는 전남여고 앞쪽에서 경찰에 쫓기다가 금남로에서 붙잡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 광고로 다시 돌아왔다가 하교하였다.이후 다시 집을 나와 저녁 7시에 동명동 수의과대학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갔으나 아무도 없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후 구술자는 경찰을 피해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으나 함평 사찰계에서 붙잡아 가려는 것을 마을 유지들의 도움으로 잡혀가지 않고 있다가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듣고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고 한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1, 도서출판 심미안, 2006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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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채구술자 정동채는 1937년생으로 전라남도 장성군 북의면 모현리 출생이다.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동채는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17살에 고향을 떠나 광주로 상경한다. 광주에서 이발 기술을 배우기로 한 구술자는 충장로5가에 있는 삼양이발관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3년간 기술을 배웠다. 이발 경력을 쌓기 위해 월산동에 있는 월성이발관으로 옮기는데, 이곳에서 일하면서 4‧19를 맞이하게 된다.월성이발관 주인은 김수복이었으며, 구술자 외에 김재덕, 노병회, 김진성 이상 3명의 동료와 함께 일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3‧15 부정선거가 문제가 되고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소식을 신문이나 이발관 손님들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여기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거나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한다.그러다가 구술자는 4월 19일 광주지역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발관 손님들에게 전해 들었다. 구술자는 근무시간이라 시내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을 듣거나 시내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저녁이 되자 구술자는 동료 김재덕, 노병회, 김진성과 함께 시내로 나가서 시위에 참석하게 된다. 구술자가 시내로 나갔을 때는 젊은 시민들이 주로 시위대의 앞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기에 구술자도 시위대 앞으로 가서 시위대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구술자는 시위대를 따라 계림파출소, 충장로파출소를 습격하고, 금남로를 지나 광주경찰서 앞 시위까지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밤 9시 40분경 광주경찰서 앞 시위대를 향해 헤드라이트가 켜지면서 경찰들의 발포가 시작됐는데, 구술자는 주변에서 쓰러지는 시위대들을 보고 도망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찰에게 제압을 당하고 곤봉으로 여러 곳을 타격 당한 후 그 자리에 실신하게 된다. 부상당한 구술자는 광주경찰서 2층에 연행되었는데, 당시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졌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고 경찰서에 연행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늦은 밤 군인들과 구급차 와서 중상자들을 육군 77병원으로 이송하는데, 구술자도 중상자 약 20여명과 함께 육군77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하게 된다.육군77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 같은 동네에서 안면이 있던 기자로부터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후 방문객들과 위문품들이 전달되어 치료받는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구술자는 한 달여간 육군77병원에서 치료 받은 후 퇴원하였고, 다시 이발관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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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기구술자 정상기는 1942년생으로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마천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 당시 정상기는 전라남도 순천군 국립순천사범학교(이하 순천사범)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구술자는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교 대표로서 순천지역 다른 고등학생들과 교류를 가졌는데, 순천고, 순천농고, 매산고, 순천여고 학생들과 매산등에 모여 정치적인 동향이나 정세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구술자는 순천사범 병설중학교 시절 동급생 중 약 30여 명이 광주지역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는데, 이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지냈기 때문에 광주지역 고등학교 대표들이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고려대학교 데모까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전국적인 시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순천지역 학생들 역시 이에 대한 관심과 정세를 주시하고 많은 논의를 했다. 구술자는 광주지역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하여 광주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 모의 과정이나 시위 준비과정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를 순천지역 친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18일 구술자는 광주고에 재학 중인 친구 선일례를 통해 광주고에서 19일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순천사범 운영위원장인 이우평과 운영위원 허상남에게 소식을 전하고, 광주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19일 학교를 무단으로 결석한 이들 세 명은 광고 앞에서 친구인 선일례를 만나고, 광고생들의 시위 참여수가 적으니 광주공고생들과 합류하여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얻고 광주공고 쪽으로 합류하게 된다. 오후 2시경부터 광주지역 중심가에서 시위하던 학생들과 합류하여 광주4‧19에 참여하게 되는데, 3시경 충장로파출소로 가서 파출소를 습격하고 시위대를 따라 학동파출소로 이동하게 된다.7시가 넘어 학동파출소 시위대에 합류하였는데, 이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면서 광주지역 최초의 희생자인 강정섭이 사망하게 되었고 시위대는 흩어지게 된다. 시위대가 흩어지고 상황이 악화되자 구술자를 비롯하여 허상남, 이우평은 광주지역 상황을 목격하였으니 순천으로 내려가 소식을 전하고 시위를 모의하기로 결정한다.이들은 친구인 선일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순천으로 내려왔으나 순천사범 교사들의 감시에 의해 시위를 모의하거나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5일 순천사범운영위원회를 주도하여 오전 12시경 순천사범운영위원 6명(이우평, 허상남, 김재영, 김명국, 박희자, 함은자)이 학교 정원 오동나무 동산에 모의하게 되는데, 이들 모임이 학생과장이었던 정용상 교사에게 발각되어 1시간 만에 해산하게 된다. 하지만 4월 26일 여수에서 민주당 여수시당원과 시민들이 규합한 시위가 일어나자 이 소식을 접한 구술자, 이우평, 허상남은 순천시내 고등학생들과 연대하여 시위를 모의할 계획을 세운다.구술자는 순천시내 학교 대표들에게 연락을 취해 4월 26일 오후 3시경 순천고, 순천농고, 순천여고, 순천매산고, 순천매산고 교목 1명이 포함된 총 21명이 매산고 뒤 매산등에 모이게 된다. 여기에서 4월 27일 11시에 중앙로에 집결하고, '자유당 순천 국회의원 김병수 타도', '정권허수아비 순천경찰서 습격', '각 학교 교사 중 어용, 무능교사 축출'이라는 세 가지 요구 사항도 결정하게 된다.4월 27일 11시 순천지역 고등학생들은 순천 시내 중심가인 중앙로에 집결했으며, 연좌농성을 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날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이 전해진 이후라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으며, 밤 12시경 자진 해산하였다고 한다. 이후 구술자는 순천사범학교에서 어용, 무능교사 퇴진운동을 벌려 7명의 교사가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이후 구술자는 4‧19혁명동지회 창립을 위해 앞장섰으며, 2003년 4‧19혁명동지회를 창립하고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5. 참고자료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