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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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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홍길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8월 20일
구술장소
전남대학교5‧18연구소
구술시간
57분 14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0년 출생 1960년 당시 광주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4월혁명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이홍길은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출신으로, 1942년생이다. 1960년 당시 구술자는 광주고등학교(광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사적 인연이나 서클 활동으로 교우관계가 활발했다. 구술자는 이승만 정권의 3선개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활동  소식을 접하면서 분개하였고,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3‧15 선거 국면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을 알리는 벽보를  부착하기도 한다.
3‧15 부정선거 이후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가 일어나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는데, 구술자는 친구들과 함께 광고의 시위를 모의하거나 광주 고등학교의 연합 시위를 시도하지만 시위가 이뤄지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8일 고려대학교 피습사건이 알려지면서 구술자는 친구 홍갑기와 바로 다음날 시위를 계획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하숙방에 모이게 된다. 자신의 하숙방에 모여서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짜고 각자 역할을 맡게 되는데, 구술자는 다른 학생들을 시위에  동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누출되면서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이 등굣길에 한 명씩 교장실로  불려가게 된다. 교장실에 모인 학생들 사이에서 시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사이 시위에 동참하고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게 된다. 이에 교장실에 감금되었던 학생들이 유리창 문을 열고 나와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고, 구술자는 정문으로 나가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문으로 빠져나왔다가 이후 빠져나온 광고생들과 합류하여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구술자는 광고생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중앙초등학교까지 진출하였으나 경찰의 진압에 흩어져 오후 2시 경까지 시내를 돌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구술자는 전남여고 앞쪽에서 경찰에 쫓기다가 금남로에서 붙잡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 광고로 다시 돌아왔다가  하교하였다. 
이후 다시 집을 나와 저녁 7시에 동명동 수의과대학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갔으나 아무도 없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후 구술자는 경찰을 피해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으나 함평 사찰계에서 붙잡아 가려는 것을 마을  유지들의 도움으로 잡혀가지 않고 있다가 이승만의 하야 소식을 듣고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고 한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1, 도서출판 심미안, 2006
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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