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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채

구술자소개

구술자
정동채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11월 17일
장소
광주시 계림1동 동아이발소
구술시간
51분 45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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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정동채는 1937년생으로 전라남도 장성군 북의면 모현리 출생이다.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동채는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17살에 고향을 떠나 광주로 상경한다. 광주에서 이발 기술을 배우기로 한 구술자는 충장로5가에 있는 삼양이발관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3년간 기술을 배웠다. 이발 경력을 쌓기 위해 월산동에 있는 월성이발관으로 옮기는데, 이곳에서 일하면서 4‧19를 맞이하게 된다.
월성이발관 주인은 김수복이었으며, 구술자 외에 김재덕, 노병회, 김진성 이상 3명의 동료와 함께 일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3‧15 부정선거가 문제가 되고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소식을 신문이나 이발관 손님들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여기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거나 민감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구술자는 4월 19일 광주지역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발관 손님들에게 전해 들었다. 구술자는 근무시간이라 시내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을 듣거나 시내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저녁이 되자 구술자는 동료 김재덕, 노병회, 김진성과 함께 시내로 나가서 시위에 참석하게 된다. 구술자가 시내로 나갔을 때는 젊은 시민들이 주로 시위대의 앞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기에 구술자도 시위대 앞으로 가서 시위대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구술자는 시위대를 따라 계림파출소, 충장로파출소를 습격하고, 금남로를 지나 광주경찰서 앞 시위까지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밤 9시 40분경 광주경찰서 앞 시위대를 향해 헤드라이트가 켜지면서 경찰들의 발포가 시작됐는데, 구술자는 주변에서 쓰러지는 시위대들을 보고 도망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찰에게 제압을 당하고 곤봉으로 여러 곳을 타격 당한 후 그 자리에 실신하게 된다. 부상당한 구술자는 광주경찰서 2층에 연행되었는데, 당시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졌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고 경찰서에 연행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늦은 밤 군인들과 구급차 와서 중상자들을 육군 77병원으로 이송하는데, 구술자도 중상자 약 20여명과 함께 육군77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하게 된다. 
육군77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 같은 동네에서 안면이 있던 기자로부터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후 방문객들과 위문품들이 전달되어 치료받는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구술자는 한 달여간 육군77병원에서 치료 받은 후 퇴원하였고, 다시 이발관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정동채(전남2)_구술자료상세목록.pdf 5954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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