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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술

구술자소개

구술자
구양술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7월 14일
장소
광주 호남매일신문사
구술시간
1시간 51분 4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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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구양술은 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 출신으로 1939년생이며, 1960년 당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조대부고)  3학년이었다. 구술자는 3‧15 선거와 관련해 이 지역에서 일어난 보성닭죽사건, 함평올빼미사건 등 당시 정치적 정세와 분위기에  대해서 구술하였다.
4‧19시위 상황에 대해서는 오후 6시 동방극장에서 집결된 이후부터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구술자는 동방극장 앞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시위를 계속 해 나갈 것을 모여 있는 시위대들과 결의하고 적극적으로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시위대가 도청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시위대가 광주시청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을 구술자는 시청에 불이 나면 주변까지 위험해지므로 불을 지르면 안 된다고  시위대를 막았다고 한다. 시위대가 학동파출소에 이르자 학동파출소 소장인 김남중은 시위대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고,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대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고, 여기에서 한 학생이 총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이에  구술자는 주변에 있던 학생들과 함께 시신을 전대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그 학생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가 바로 광주  4‧19의 첫 번째 희생자인 故강정섭이다.
구술자는 양림동파출소로 가서 시위대에 합류했고 양림동파출소를 지나 광주경찰서 쪽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때는 모든 시위대들이 운집한  상태였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시위대의 열기는 높아갔다고 한다. 9시 40분경,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를 에워싸자 경찰서 쪽에서  갑자기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쏴라, 밀어라, 공격하라'라는 소리와 함께 시위 군중들을 향해 발포가 시작되었다. 경찰의 총알을 피해  시위 군중들은 도망쳤으나, 이곳에서 7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구술자는 시위대 앞에 있었지만 다행히  부상을 당하지 않고 경찰의 연행을 피하기 위해 밤새 숨어 있다가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구술자는 20일 전남대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위에도 참석했다고 하나 이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내용을 구술하지 않았으며, 이후 4‧19광주발포사건 재판 과정에서 참관하여 목격한 내용을 소상히 구술하였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구양술(전남)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885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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