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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용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영용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8월 2일
장소
광주 4‧19문화원
구술시간
1시간 11분 52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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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만금리 출신으로, 1943년생이다. 1960년 당시 구술자는 광주공업고등학교(공고) 전기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공고생들은 3‧15 부정선거가 기폭제가 되어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4월 18일  고려대학교피습사건을 기점으로 학생들이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공감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술자는 4월 19일 오전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진행되지 못했고 밖으로 나가려는  공고생들을 각 반에서 교사들이 제지했다고 한다. 구술자 역시 교실에서 담임의 제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시위에 동참해야 하겠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교실 2층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뜨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를 계기로 공고생들은  교실 밖으로 나와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구술자는 유리창을 깨고 넘어지면서 오른팔 동맥과 후두부 파열상을 입고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 신외과로 이송되었다. 당시  오른팔 동맥 파열이 심각한 상태로 응급수술을 받고 치료를 위해 큰아버지가 계신 영광군으로 몸을 피하고 거기에서 재가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내상이 더욱 심각해졌고, 견디다 못해 광주로 올라와 전남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구술자는 공고생들의 시위를 촉발하게 한 장본인이지만 정작 본인은 부상을 당해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4‧19 이후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4‧19혁명민심수습학생대책위원회'가 조직되는데, 구술자는 공고 대표로 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구술자는 '4‧19혁명민심수습학생대책위원회'를 4‧19계몽반이라고도 칭했는데, 당시 조선대학교 박노경의 책임  하에 고등학교 10곳에서 대표 2명, 대학교 2곳에서 대표 2명으로 구성되어 광주전남지역을 3일간 돌면서 4‧19의 당위성과  의미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구술자의 경우 광양 지역을 담당하여 광양군민들 앞에서 4‧19관련 강연을 했던 경험을  구술하였다.
이후 구술자는 4‧19기념사업과 관련해 활동을 전개했는데, 혁명동지회 광주전라지부장을 맡으면서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와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을 발행했으며, 4‧19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4‧19 문화운동을 전개해 4‧19를 문화예술 영역과  삶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사업을 전개하였다. 현재 구술자는 4‧19문화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홍영유, 『4월혁명통사』제8권, 도서출판 천지창조, 2010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영용(전남)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2803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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