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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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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준수
면담자
양라윤
구술일자
2010년 7월 15일
구술장소
전남대학교5‧18연구소
구술시간
1시간 45분 59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남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5년 출생 1958년 광주전남 민주당 입당 1960년 당시 영수학원을 운영 증 4월혁명 시위에 학원생들과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도림리 출신으로, 1935년생이다. 구술자는 1958년부터 광주전라남도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60년 당시 3‧15 선거나 민주당의 정치집회와 시위에 대해 구술하였다. 구술자는 1960년 3‧15 선거  국면에서 자유당의 정치적 횡포를 막기 위해 전라남도 지역을 순회하기도 하였고, 민주당 정치인들의 유세나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3월 15일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과 당원들이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의미에서 전개한 '곡(哭) 민주주의' 시위다.  이날 월파 서민호 선생을 포함 주요 정치인 5-60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민주 당사부터 시내 법원거리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시위에는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이가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1960년 4‧19 당시 구술자는 유동 근처에서 영수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근처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그  소리를 듣고 학원생들 20여 명과 함께 시위에 합류한다. 이준수가 시위대에 합류한 시간은 오후 1-2시 경이며, 유동다리를 지나  농고생, 서중생들과 합류하여 충장로2가까지 진입하게 된다. 시위대는 시내로 진격하면서 주위에 있던 파출소에 구호를 외치면서 돌을  던졌다. 당시 시위대가 외쳤던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 '3‧15 부정선거 다시 해라' '김주열군을 살려내라' 등이었다고  한다.
충장로2가에 진입한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고 있던 경찰과 대치 상태에 이르는데,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위대들이 계속해서 진격하자 총소리가 났고 시위대가 점차 해산하자 이준수도 집으로 귀가하였고 이후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5. 참고자료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編纂委員會, 『湖南 四‧一九 三十年史』, 三和文化社, 1995
四‧一九革命負傷者會 光州‧全羅支部, 『湖南 四‧一九革命 資料史』上, 코리아기획인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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