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YWCA위장결혼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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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전도관에 다닌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회에 다녔고, 고등학교 때 KSCF에 적극 참여했다. 폐결핵 걸린 친구 요양을 도우러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대한수도원에서 생활한 것이 인연이 돼서 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감신대 기숙사 생활과 방학 중 빈민촌 합숙훈련, 군 입대, 제대 후 빈민운동 현장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1976년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회장을 맡아 각 교단 청년 대표들과 함께 한국기독청년회(EYC)를 창립, 초대 현장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철폐 운동 분위기가 대학가에 돌면서 고교 동창 정문화의 권유로 감신대 긴조9호 반대 집회를 기도했다가 사전 발각돼 구속,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EYC 회장에 취임해 6개 교단 청년세력을 조직화하고 전국 규모 사회선교대회를 개최하는 등 교류를 강화했다. 그러던 중 10.26사태가 일어나고 박종렬 목사가 찾아와 통대선거반대 집회 개최를 제안했다. 기독청년세력 내부에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노선 차이는 있었으나 유신 연장 불가 입장에는 이견이 없어 집회 참여를 결정했다. 집회 형식은 장례식보다 결혼식이 낫다고 생각했고, 민청협에서 신랑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결혼식 사회는 EYC가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내가 자청했다. 우리가 맡은 것은 하객 동원이었는데, 결혼식 당일 분위기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집회는 금방 깨졌고, 꼼짝 없이 연행돼 보안사로 이송됐다. 보안사에서는 분풀이 식의 가혹행위가 이어졌고, 정치권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YWCA위장결혼식 집회 및 시위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혼미한 정정 속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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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할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랐고, 사회적 신학을 공부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 초등학교 때 4.19를 경험하고 중학교 때 함석헌 강연회 파문, 고등학교 때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운동을 겪었다. 대학 때는 학생회장이 없는 학생회의 총무를 맡아 3선개헌반대운동을 치렀으며, 졸업 후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에 연루돼 감옥을 살기도 했다. 출소 후 KSCF 간사를 맡아 기독교민주화운동에 몸담았다.
10.26사태 후 기독교계의 정국 인식이 ‘맹목적 낙관주의’로 흘렀다는 얘기는 많이 있었다. 계엄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섣부르게 행동하면 역으로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성우가 와서 YWCA위장결혼식집회를 통해 집회 시위를 크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년 봄에 정말 피를 흘리는 엄혹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했을 때 별로 감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양순직, 박종태 같은 분이 참여한다면 정치적인 활동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결혼식을 위장해서 집회를 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지만 계엄 하에서 집회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함석헌 선생 같은 분과 함께 시민적 입장에서 하는 것으로 절충점을 찾아 타협을 했다. EYC 회장이던 김정택한테 청년그룹 설득을 부탁하고, 나는 원로 목사들과 접촉했다. 청년그룹은 당시 신보수와 진보 간의 IT논쟁이 참여 여부를 놓고 찬반 논쟁을 벌일 만큼 첨예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원로그룹은 설명을 상세하게 하지 않고 이름만 걸치는 형태로 허락을 얻었다.
원래 나는 현장 역할이 없어 잡히지 않아야 했지만 집회 상황이 궁금해서 행사장에 들어갔다가 연행됐다. 보안사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으며 연루자를 불지 않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란 기억도 난다. YWCA사건으로 인해 신학 공부를 하고 인천에서 노동, 빈민 선교와 사회운동을 하는 쪽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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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원래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해 파일럿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동기생보다 3년 늦게 1969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다. 정경대학 1학년이 중심이 되어 3선개헌반대운동을 주동하고 신방과가 앞장서 청강생 문제를 제기하였다. 갑자기 영장이 나와 먼저 군 복무를 마쳤고, 중앙대 교련반대운동을 주도하고 강제 징집된 남철희를 통해 최열을 알게 되었다. 군 제대해서는 백남기와 교유하고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게 하였다. 민청학련사건으로 많은 학생, 민주화운동가가 쓸려나가자 그 다음을 위해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사건이다. 실체가 없는 조직이었지만 재판 거부하고 항소 포기하는 바람에 8년 중형을 받았고, 4년 복역한 뒤 1979년 최열과 함께 출감하였다. 민청협 부회장 겸 인권위원장을 맡아 10.26사태 이후 YWCA위장결혼식집회를 준비하였다. 현장팀과 1980년 준비팀으로 나눠 집회를 추진하였다. 집회 당일 현장에 있다가 아수라장이 되자 중앙 연단으로 간 뒤 유유히 빠져나왔다. YWCA사건 때 잡히지 않은 조성우, 문국주, 이석표, 김경남, 그리고 YWCA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이호웅, 심재권, 이해찬 등과 후속 대응을 위한 회합을 수시로 가졌다. 수배가 내려진 상황에서 아직 결혼식 올리지 않은 처가 등에 숨어서 회의를 하였다. 1980년 휴교령이나 계엄확대조치가 내려지면 전 대학이 궐기한다는 약속을 전남대만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광주가 큰 희생을 당한 것이다. 1982년 3월 마지막으로 잡혀 YWCA사건 조사만 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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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회재수 끝에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서 방황하다 선배의 권유로 학보사 기자로 들어갔다. 친구 권오걸의 영향으로 사회의식에 눈을 뜨고 야학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권오걸이 연루된 것을 보고 학보사 다니면서 눈여겨보았던 친구 몇 명을 규합해 최초의 시위를 벌이려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한 친구의 신고로 친구 두 명과 함께 구속되고 말았다. 옥중에서 고교 동기 문국주, 최권행 등을 알게 되고 그 인연으로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홍보위원을 맡아 회보를 발행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1979년 조성우 회장이 2선으로 빠지면서 회장을 맡은 상태에서 10.26사태가 터졌다. 당시 종로 5가를 중심으로 향후 정국에 대해 낙관하는 분위기도 있었으나 민청협은 강력한 대처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국장 반대 활동은 종로 5가 쪽에서 뒷덜미를 잡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결정적으로 내가 튀어버리는 바람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통대저지 국민대회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 특별담화 이전부터 결정되어 YWCA위장결혼식 집회로 이어졌다. 나는 집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잡히면 안 되니까 준비 과정에는 깊이 참여하지 못하였다. 집회 당일 먼저 현장에 있다가 체포돼 보안사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 바람에 윤보선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을 진술하게 되어 역으로 추궁받는 일을 겪었다. 내게 가장 많은 형이 내려진 것은 민청협 회장으로서 ‘직책수당’이라고 본다. YWCA위장결혼식사건은 당시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그게 내 소임이라면 잘했건 못했건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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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정196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한 직후 4.19가 일어났다. 고려대는 4.18부터 시작인데 그때 개인적으로 단호한 자세로 시위에 나섰다.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농성하고 이철승, 장택상 등 선배 정치인과 대면하고 경찰에 의해 강제로 택시에 태워져 학교로 돌아왔다. 이 경험이 인생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영화사에 취직했다가 실망하고 동아일보에 다시 들어갔다. 평범하게 기자 생활을 하던 중에 동아사태가 나고 해직돼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일원이 되었다. 동아투위에는 자주 나갔지만 집행부에 속하거나 중심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당시 재야는 실행력 없는 명망가 중심의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국민연합)과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청년 모임으로 실천투쟁을 강조하는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그리고 종로 5가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민주화세력 등이 있었고 노동자, 문학인, 지식인, 언론인 등 각 부문운동으로 분업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언론운동은 나름의 순수성과 자기중심성을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0.26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편으로는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국장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조성우에게 국민대회를 제안한 것은 싸움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운동의 휴지기간이 장기화하는 것을 군부가 노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제안은 동아투위나 국민연합의 뜻이라기보다 개인의 의견이었다. 조성우가 동지들과 상의한 후 좋다고 했다. 민청협이 안국동(윤보선 전 대통령)과 연결이 되어 있고 함석헌 옹이 대회장을 맡았다는 것 등은 나중에 알았다. 위장결혼식 집회 때는 제안한 사람으로서 안 가볼 수가 없어 갔다가 연행되었다. 보안사에 가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 구타로 귀가 찢어져 소아과 의사가 와서 꿰매주었다. YWCA사건과 관련된 여러 음모설 가운데 군부가 집회를 유도해 저항세력의 역량을 시험한 것이었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군부는 당황하고 일격을 당했다는 분위기였다는 얘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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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우고려대 행정학과 입학하고 곧바로 해병대에 지원하였다. 거기서 만난 함호철의 소개로 복학해서 청년문제연구회(청연)에 가입,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순수 봉사 서클이던 청연을 뒷날 강력한 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서클연합회를 조직, 고려대 학생운동의 기틀을 닦았다. 1975년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재판 거부와 항소 포기로 중형이 확정돼 3년 복역하고 나왔다. 그 뒤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회장을 맡았다가 표면상 2선으로 물러나 1980년 봄 전민항쟁을 일으킬 전국 조직을 구성하던 중 10.26사태를 맞았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야당과 재야 내부에도 많은 혼선이 있었다. 민청협은 독재자 국장은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NCC를 필두로 한 재야 일각에서는 향후 민주화 일정에 대한 낙관론에 경도되어 있었다. 미 대사관 측의 ‘움직이지 마라, 잘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민주화진영 내부를 상당히 교란시켰다고 본다. 특히 김대중·김영삼 양김씨는 오히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체제를 강화시켜 직선제 개헌을 주도하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군부가 나올 것으로 우려하면서 통대선거저지 국민대회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혼란과 혼선 때문에 박정희 사후 YWCA위장결혼식 집회가 열리기까지 한 달이나 걸린 것이다. YWCA위장결혼식 집회는 현장 팀과 1980년 준비 팀으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1980년 준비 팀은 집회 후 검거되지 않았고, 수배된 가운데서도 각 대학 복학생조직과 연계해 대학가의 정치투쟁을 이끌고자 하였다.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은 잘못된 결정이었고, 민청협 논의 사항이 현장 지도부에 잘 전달되지 못하였다. 결국 나를 비롯한 민청협 활동가들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어져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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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1969년 3선개헌반대운동에 참여하고, 1971년 교련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75년에는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다. 재판 거부로 인해 징역 6년을 받고 4년 복역했다. 그때 환경운동으로 진로를 잡고 대구교도소 이감 후 본격적인 환경 공부를 했다. 1979년 5월 출소했을 때 민주화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해서 환경운동은 미뤄두고 민주청년협의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던 중 10.26사태가 터져 YWCA위장결혼식 집회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당시 정세가 혼미해 잘못하다가는 권력을 쥔 세력의 양동작전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볼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진영이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입장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관철되었다.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정상적인 집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위장하게 되었다. 참여 범위를 넓히기 위해 EYC를 끌어들이고 재야세력과 폭넓게 접촉했다. 대회 당일 축의금을 받다가 연행되었다.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 끌려가 엄청나게 맞은 뒤 조사를 받았다. 12.12사태 후에는 조사와 재판이 빠르게 진행됐다. 교도소에서도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계엄확대 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이부영 선배 같은 이는 교도소 내 삼청교육까지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돼 나오는 백기완 선생이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처럼 돼 있었다. 백 선생을 모시고 1년 동안 요양을 한 결과 건강이 호전되었다. 다음해 YWCA에서 진짜 결혼식을 올리고 백 선생이 주례를 섰다. YWCA위장결혼식사건을 무료변론해주었던 인연으로 이세중 변호사께서 환경운동연합 초대 공동대표, 환경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