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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정
사업개요
- YWCA위장결혼식사건
- 18년 5개월 10일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던 중,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격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때까지의 과도기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차 연도에서는 이 시기의 주요 사건인 ⑴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11.24.), ⑵서울역 회군(1980.05.15.)까지의 학생운동, ⑶사북항쟁(1980.04.21.~24.)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을 수행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임채정
- 면담자
- 신동호
- 구술일자
- 2018. 8. 28
- 구술장소
-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 구술시간
- 100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YWCA위장결혼식사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0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1964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1967 동아일보 기자
1975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상임위원
1981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위원장, 사무처장
1992 제14대 국회의원(민주당, 노원구을)
1996 제15대 국회의원(새정치국민회의, 노원구을)
2000 제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노원구을)
2002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
2004 제17대 국회의원
2005 열린우리당 의장
2006~2008 국회의장
- 구술내용 요약
-
196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한 직후 4.19가 일어났다. 고려대는 4.18부터 시작인데 그때 개인적으로 단호한 자세로 시위에 나섰다.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농성하고 이철승, 장택상 등 선배 정치인과 대면하고 경찰에 의해 강제로 택시에 태워져 학교로 돌아왔다. 이 경험이 인생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영화사에 취직했다가 실망하고 동아일보에 다시 들어갔다. 평범하게 기자 생활을 하던 중에 동아사태가 나고 해직돼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일원이 되었다. 동아투위에는 자주 나갔지만 집행부에 속하거나 중심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당시 재야는 실행력 없는 명망가 중심의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국민연합)과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청년 모임으로 실천투쟁을 강조하는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그리고 종로 5가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민주화세력 등이 있었고 노동자, 문학인, 지식인, 언론인 등 각 부문운동으로 분업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언론운동은 나름의 순수성과 자기중심성을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0.26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편으로는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국장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조성우에게 국민대회를 제안한 것은 싸움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운동의 휴지기간이 장기화하는 것을 군부가 노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제안은 동아투위나 국민연합의 뜻이라기보다 개인의 의견이었다. 조성우가 동지들과 상의한 후 좋다고 했다. 민청협이 안국동(윤보선 전 대통령)과 연결이 되어 있고 함석헌 옹이 대회장을 맡았다는 것 등은 나중에 알았다. 위장결혼식 집회 때는 제안한 사람으로서 안 가볼 수가 없어 갔다가 연행되었다. 보안사에 가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다. 구타로 귀가 찢어져 소아과 의사가 와서 꿰매주었다. YWCA사건과 관련된 여러 음모설 가운데 군부가 집회를 유도해 저항세력의 역량을 시험한 것이었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군부는 당황하고 일격을 당했다는 분위기였다는 얘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YWCA위장결혼식 집회 최초 제안 내막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