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강동욱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유화국면에서 MC와 MT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경위
근황 및 배경, 재수 때 들은 광주상황, 광주출신 재수생들의 참가결의, 졸업정원제와 농법회 참여, 첫 데모 참여, 학습교재 및 5대 패밀리, 방황하던 2학년 시절, 농법회 농활, 동기와 후배들, 동원팀 조직방식 D팀과 P팀, 녹화사업과 83년 집회, 유화국면 직전 상황, 학자추 국면, 포시스템과 학간페더, 유화국면 바라보는 시각차와 집회상황 변화, MT 등장과 포시스템과 갈등, 포책임자를 맡게 된 이유, MT-MC 대립, 깃발그룹과 반비판, 미문화원 점거농성, 삼민투와 MC-MT, CNP 논쟁, MC에서 NL의 등장, 포의 해체, MT지도부 와해, 수배도피생활, 위장취업, 노동운동과 6월 항쟁, 정치권 들어간 경위, 고시공부와 변호사 생활, 변호사로서 관심사 변화, 구술 소회와 남기고 싶은 이야기
-
강창호
강창호는 진주 동명고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에 수석 입학 후 학생운동을 하면서 민정당연수원 점거사건, ML당 사건 등으로 두 차례 구속되었다. 복학 후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국립사범대 우선임용조항에도 불구하고 교원임용에서 제외되었으며, 1989년 1차 발령투쟁 및 전교조 상근 활동, 1998년 2차 발령 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특별채용 후 서초고 교사로 발령받아 교육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전교조 교육민주화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평가했다.
- 가족 이야기와 성장과정, 진주에서의 고교시절
-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입학, 대학생활과 학생운동
- 민정당연수원 점거사건, ML당 사건 관련 구속 수감
- 복학과 교생실습
- 교육민주화운동 참여
- 교원임용제외가 된 배경
- 교원임용제외 1차 발령투쟁, 2차 발령투쟁의 배경
- 발령투쟁과정에서의 어려움
- 특별법 제정 과정, 교사발령
- 전교조 활동
-
고승우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언론 검열이 철폐되지 않자 기자협회의 결의에 따라 언론사들이 합심하여 제작 거부에 들어가는 과정과 해직언론인들의 단결을 막기 위해 해직 사유를 다르게 적용한 신군부의 계략을 증언
합동통신사 자유언론실천 운동 주도, 계엄당국에 맞서 보도검열과 제작 거부 주도, 강제해직,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설립, <말>지 편집장,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한겨레신문 사회부장, 여론매체부장,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
김명인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무림사건의 배경이 된 1980년 12월 11일 시위의 준비과정과 김명인이 작성한 ‘반파쇼학위투쟁선언’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
근황, 출생 및 가족사항, 유년과 청소년시절의 가정형편과 성장과정, 대학 입학과 써클 활동, ‘77언더’ 활동, 1977~1979년의 서울대 유신반대 시위, 부마항쟁과 10.26사건,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 무림과 학림,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의 작성 경위, 무림사건, 이근안과의 만남과 현재 심경, 재판과정과 수감생활, 석방 이후 1980년대 중·후반 활동, 비평 활동과 ‘민중적 민족문학’에 대한 소회, 노무현 정권에 평가,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촛불시위를 지켜본 심경, 문재인 정권에 대한 전망, 잡지 『황해문화』에 대한 소개와 최근 관심사, 교직 생활, 민주화운동 보상법에 대한 생각과 과거 동지들 간 친목모임 여부, 무림사건에 대한 현재의 소회 등
-
김문수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강제징집되어 철책 근무(사천리 1003일 고지)를 서야 했던 사연
출생과 가정환경, 학업, 대학 진학 이전의 정치 상황과 민주화운동, 대학 진학과 학과 선택, 1980년대 초반 대학가 분위기, 서울시립대학교의 학생운동 상황, 학생운동에 참여한 배경과 계기, 학생운동 관련 주요 사건, 강제징집이 된 주요 원인, 경찰과 학교 당국 등의 조사, 강제징집 선행 사례에 대한 인식, 강제징집으로 인한 군 복무의 고충과 난항, 보안대에서의 조사, 전역 이후 군과의 연계, 복학, 후유증과 피해, 제대 후 노동운동을 하게 된 배경,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피해의 해결방안, 구술채록과 관련하여 남기고 싶은 얘기
-
김민곤
김민곤은 진주고를 졸업하고, 1972년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에 입학 후 대한항공에 취업하였다가 영동여고 교사가 되고, 그 후 서울사대부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1982년 YMCA중등교사협의회 활동을 시작하고,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을 주도하였다. 1988년 전교협 결성 이후 전국교사신문 발행을 주도하고,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하였다. 대량해직 사태가 발생하자 3선 지도부로서 명동성당 단식농성을 주도하고, 전교조 주요 인물로 수배가 되고, 구속되었다. 출소 후 전교조 사무처장을 비롯하여 교육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94년 특별채용 후에도 교육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동안의 교육민주화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평가했다.
- 출생과 성장, 대학진학과 대학생활, 대학생활과 군제대 후 복학, 취업
- 영동여고 초임 교사 시절
- 1980년대 초반 학교의 비민주적 상황, 1980년대 초반 학교현장의 분위기, 영동여고 축제
- YMCA중등교육자협회 결성 배경, YMCA교협 활동
- 서울사대부고로 학교를 옮김, Y교협 활동과 교육민주화선언 준비
- 교육민주화선언 초안 집필과 참교육 모토가 만들어진 배경
- 교육민주화선언의 준비와 실행, 교육민주화선언 이후의 후폭풍
- 부당전출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단식농성
- 단양 단산고 생활과 6월 항쟁의 영향, 6월 항쟁 직후 전국교사협의회 결성, 전국교사신문 발행 주도
- 전교협 활동과 교사노조로의 전환 준비
- 교원노조 결성을 위한 본격적 준비
- 전교조 결성대회를 성사시킨 배경, 전교조 결성 대회 이후 전개된 7.9대회
- 명동성당 단식농성과 평민당사 앞 연행, 구속 당시의 상황, 출소 후 전교조 사무처장 활동
- 1990-1991년 전교조 사무처장 활동
- 간첩단 사건 관련 조사와 특별채용, 특별채용 후 느낀 학교 현장의 달라진 분위기
- 전교조 합법화와 원상회복추진위 출범
- 과거사위 평가, 교육민주화운동의 보람과 소회
-
김봉준
김봉준은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67년 용산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고, 재수 후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여 1980년 졸업했다. 대학 재학 당시 민속문화 서클을 결성하여 탈춤·풍물·탈·민화·불화·민요 등 민속예술의 학습과 연구에 열중하였다. 졸업 직후 첫 직장 ‘창작과 비평’사를 다닌 지 3개월도 안 되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알려는 유인물 제작 및 배포로 수배(5·18 계엄포고령 위반)되었다. 1여 년간의 도피 생활 끝에 사회에서의 직장 생활을 접고 사회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기독교농민회의 문화간사, 1982년 굴레방 놀이기획실, 1983부터 1984년까지 애오개 문화마당 운영위,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로 이어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운동과 문화운동을 하였다. 1986년에는 민족굿회 결성하며 굿 문화에 대한 실기와 연구를 병행하였다. 1987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실행위원회 결의로 미주 지역 동포사회에 민중문화 보급의 사명을 지명 받고 도미, 5개 도시(뉴욕, 워싱턴, 마이애미, LA, 샌프란시스코, 독일 보쿰 등)에 풍물패를 조직하고 민중미술을 보급하였다. 1987년 12월, 대선 전에 귀국하였으나 활동을 보고할 단체도 와해되었다. 민주 진영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크게 실망하고 서울 활동을 접고 지역으로 내려갔다.
1981년 걸개그림 〈만상천화〉 제작과 농민회 만화책 『농사꾼 타령』(기독교농민회 발간)으로 민중미술을 시작하였다. 졸업 직후, 1983년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하였다. 1983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과 1984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을 펼치고, 동인지 『산 그림』과 『산 미술』을 출간하였다. 두렁과 애오개 소극장(문화공간) 활동을 하며 걸개그림운동, 민중목판화운동을 펼쳤다. 여러 마당극의 출연과 연출, 그리고 미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85년 『민중미술』(도서출판 공동체) 발간 편집위원장을,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기획국장을 맡았다. 1987년 이후 5년 간 부천에서 놀이마당 복사골을 운영하며 노조문화 지원 활동과 시민미술공방 흙손공방을 경영하였다. 1993년 이후 강원도 원주 문막으로 낙향,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1954년 서울 출생
- 홍익대학교 조소과 75학번으로 입학 후, 1980년 졸업
- 홍익대학교 민속문화 동아리 결성, 탈춤 풍물 민화 등 민속문화 학습
- 봉원사 만봉스님에게 탱화, 불화 전수
- 1978년, 노동마당극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공동연출
- 1980년 창작과 비평 재직 중, 5·18 광주 유인물 제작 및 살포로 계엄포고령 위반,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도망자 생활
- 미술동인 두렁 창립회원, 문화예술운동, 민중미술에 참여
-
김정택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YWCA위장결혼식 집회 현장 상황.
근황, 고교시절 KSCF 학생회 활동, 감리교신학대학 입학하게 된 사연, 1976년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회장 맡아 EYC 창립에 참여한 이야기, 감신대 시위미수 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 옥고, 출소 후 EYC 회장 맡아 활동, YWCA위장결혼식사건 참여 결정한 내막, YWCA집회 사회 자청 감옥행,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 출소 후 산마루민중교회 설립, 요가·단식 가르치다 귀농
-
김정헌김정헌은 1946년 평양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두 형님을 따라 건축과 진학을 희망했으나 진학에 실패, 재수 시절 취미로 다니던 신영헌 화실에서 조교 이경직을 만나며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 65학번으로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함. 1960년대 중후반의 서울대학교 미대 학풍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 대학 세미나에서 임영방 선생이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던 것과 『창작과 비평』에 실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글들에 많은 영향을 받음. 학창 시절 어울리던 임세택, 오경환, 오윤 등이 현실동인을 만들고, 1969년《현실동인》전을 치르려다 서울미대 교수들의 고발로 무산된 소식을 알게 됨. 대학원 시절이었던 1972년부터 졸업 후 1980년 무렵까지 미술교사 생활을 함. 이 시기 오수환(1946~), 원승덕(1941~) 작가와 어울리며《잡초전(三人展)》(1975, 1977) 등의 전시를 함.1979년, 김정헌의 명륜동 화실로 선배 최민과 동기 오윤 등이 찾아와 현실과 발언의 결성을 제안, 그 외 4‧19 20주년을 기념하며 동인 결성을 주도한 원동석 무리와 성완경 무리 등이 모여 1980년 10월 미술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을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전시 작품의 비판 수위를 보고 놀란 관장이 일방적으로 전시 취소를 결정, 김정헌 작가 등이 관장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운영위원회까지 소집하여 취소 결정을 단행하고 전시장의 전기를 끊어버림. 이에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객들이 촛불을 켜고 작품을 관람한 일화로 ‘촛불 전시’로 알려짐. 한달 후 동산방화랑에서 창립전 재개최를 제안하여 창립전이 치러짐. (평론가 윤범모, 성완경, 원동석, 최민과 작가 김정헌, 김용태, 민정기, 임옥상, 주재환, 권순철, 강요배, 노원희 등 참여) 당시 『중앙일보』에서 이 전시에 대해 조명하며, 많은 관람객이 찾았고, 임술년 등과 같은 후배 민중미술 소집단의 결성에 영향을 미침.1985년 군사정부의 예술탄압 사건을 대표하는 이른 바 `힘전' 사건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의 전시 강제 취소 및 그림 탈취(압수) 사건- 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결성되고, 안전한 전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김용태, 유홍준 등과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반고문전》을 비롯하여, 민중미술 활동을 위한 각종 기금마련전을 운용하며 종로서 형사들의 감시 공간이 됨. 1986년 일본의 화가 도마야마 다에코와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의 초청으로 손장섭, 성완경 등과 《JAALA전》(민중의 아시아)에 참석, 이 과정에서 민중미술 계열 예술가들의 일본행을 탐탁지 않아하던 정부 관계자들의 훼방이 있었음.1980년 공주사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학내에서 불온교수로 낙인찍힘. 1984년 무렵 공주사대 불문과 강사로 온 퐁세 신부의 제안으로 공주교도소 벽화 <꿈과 기도>를 제작함. 당시 현실과 발언에서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벽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때라 수락, 농촌의 세 계절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 현재는 사라짐.1994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임영방 관장의 제안으로 유홍준, 임옥상, 최열, 김인순, 라원식[양원모] 등과《민중미술 15년전》 기획을 돕고, 전시에 참여함, 같은 해 예술의 전당에서 《동학 100주년 기념전》을 기획하고 참여함. 이후 1999년 문화연대 상임공동대표를, 2007-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12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4‧16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차)- 1946년 평양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회화과 입학 후, 197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1979년 말 현실과 발언 동인 창립 회원이자 초대 대표를 맡음. 1980년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창립전이 취소되어 ‘촛불 전시’가 됨- 현실과 발언 결성 과정과 주요 전시- 1985년《한국미술, 20대의 힘전》사태에 대한 미술계의 대응과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결성 과정- 일본의 (민중미술 관련 전시)《JALLA전》 초청과 참여 과정(2차)- 현실과 발언 해체 과정까지 구술- 공주사대 재직 시절,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불온 교수로 낙인찍힌 과정- 1985년, 공주교도소 벽화 작업 <꿈과 기도> 제작 계기, 제작 과정, 작품 설명- 그림마당 민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그림마당 민의 역할- 일본의 《JALLA전》 참여 과정 재진술, 이 전시 참여에 대한 정부 관계자들의 대응 진술- 《민중미술 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1994) 개입 과정과 참여- 《동학 100주년 기념전》(예술의 전당, 1994) 기획 과정- 민중미술에 대한 생각
-
김종례
김종례는 1946년 서울에서 출생. 1961년 중학교 시절, 5‧16 군사정변 지켜봄. (보수적 학풍의) 진명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울교대에 진학. 서울교대 시절 박광진(1935~) 교수의 영향으로 미술을 배우고, 1967년《국전》에 입선.《국전》입선 작품을 덕수궁미술관에서 박정희가 관람한 후,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에 의해 구입. 졸업 후에도 박광진 교수의 일을 도우며, ‘일요화가회’ 등의 모임의 총무를 맡았고, 민족기록화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음. ‘한국 근대여성 지도자 100인’에 선정.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결혼과 연이은 출산으로 인해 교직 생활을 그만둠. 1남 3녀 중, 아들이 4살 되던 해 아들을 잃음, ‘죽음’에 대한 화두가 그림에 등장. 1980년대 초, 서초동의 제3화실을 오가며, 김인순, 윤석남 등과의 작가들과 교류. 1982년 이들과 함께 《11인의 소묘전》을 치르고, 이 무렵부터 정문규, 유홍준 등의 도움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함.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죽음과 상처, 회복을 주제로 다룬 작품 발표. 1985년 힘전 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때, 김종례의 작품도 함께 등장, 이 시기 ‘민중이란 무엇인가?’, ‘민중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 김인순 등과 함께 ‘힘전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한 모임(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참여. 1985년 ‘시월모임’의 창립에 관여는 하였으나, 개인사로 인해 지속적으로 함께하지는 못함. 1986년에서 1987년 무렵, ‘민미협’ 활동을 하며 《반고문전》, 《통일전》, 《인간전》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면서, 박종철 열사·권인숙 성고문 사건 등에 작업으로서 발언. ‘민미협’ 안에서 여성미술분과(1986~) 활동을 하면서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운동 안으로 끌어옴. ‘민미협’ 소속의 여성 작가들과 모여 ‘여미연’(1987년 6월 결성)을 만들어내는 데 역할을 함. 김인순·윤석남·정정엽 등과 ‘여미연’ 활동을 하며《여성과 현실전》을 연례적으로 기획하여 한국 여성주의미술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줌. 그림패 ‘둥지’ 활동에 부분적으로 개입하여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 공동제작. 1980년대 여성들의 문제, 특히 여성인권과 관련한 문제들을 문화예술의 주제로 다뤄온 과정 구술. 가족법 개정과 같은 실질적 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함.
- 1946년 서울 출생
- 서울교대 입학 후 졸업(1968)
- 서울교대 시절 박광진 교수의 영향으로 미술을 배우고, 1967년《국전》입선
- ‘한국 근대여성 지도자 100인’에 선정
- 초등학교 교사 생활
- 결혼, 임신, 출산 등으로 교직 생활을 그만둠
- ‘죽음’에 대한 화두가 그림에 등장.
- 1980년대 초, 서초동 제3화실에서, 김인순, 윤석남 등과의 작가들과 교류
- 1982년《11인의 소묘전》
- 정문규, 유홍준 등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 작품 활동
- 1985년 관훈미술관 첫 개인전: 죽음, 상처, 회복을 주제로 다룬 작품 발표
- 1985년 ‘힘전’ 사건 뉴스 보도에 작품 등장, ‘민중, 민중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 ‘민미협’ 내 여성미술분과 활동하며,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운동 안으로 끌어오는 과정
- ‘여미연’ 결성 및 활동,《여성과 현실전》참여, 한국 여성주의미술운동
-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 공동제작에 참여
- 가족법 개정과 같은 실질적 법 개정에 영향을 미침
-
김주언
하일라이트 영상 내용: <보도치침>을 입수하게 된 경위. <보도지침> 폭로 이후, 자신이 주역임을 감추던 구술자가 1986년 12월 수사당국에 잡혀가 조사를 받으며 당했던 고초
출생, 가족사, 청소년기, 대학 시기, 민청학련사건, 군 복무, 해직기자와 만남, YWCA위장결혼식사건, 보안사 서빙고 분실, 한국일보 입사, 5∙18민주화운동, 보도 사전검열, 보도지침,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온산병’ 특종, 기자협회 한국일보 분회 조직 및 활동, 보도지침 입수, 폭로 방법 모색, 보도지침 전달, 폭로 기자회견, 비밀 유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조사∙재판∙석방, 한국일보 복직, 한국일보 노동조합 설립 주도, 휴직, 서울경제신문, 언론청문회, 한국기자협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개혁 운동, 언론 관련 활동, ‘죠스’라는 별명, 80년 강제해직과 언론통제,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언론과 언론인의 현실에 대한 평가, 불신 받는 언론인, 외국에도 알려진 보도지침사건, 언론개혁의 방향, 자본에 종속되고 있는 언론계, 언론중재법, 저널리즘의 위기
-
김주형
김주형(예명 김준호)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7년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 입학 후,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일로 제적당했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79년에 탈춤반 눈솟말 재인패에서 회장을 맡았다. 1980년 홍익여자중학교에서 교생실습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접하게 되고, 이후 관련하여 학내 유인물을 제작 및 살포하였다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종로경찰서, 마포경찰서, 서울구치소, 교도소 등을 거치며 취조, 수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구타 및 고문을 당하였다. 1981년 8·15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성남 만남의 집을 중심으로, 노동자 의식화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문화운동 단체를 만들어 그림·풍물·탈춤·노래·대동놀이 등을 이용하여 노동자문화 강습 활동을 했다. 신명, 질경이 우리 옷, 한국문화운동연구소(한문연) 등의 활동을 하며, `공동체놀이'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급한 활동 내용을 정리하여 『공동체놀이』(동녘출판사, 1985년 초판 인쇄, 공동제작)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1985년 목동 철거민의 항거를 다룬 『나뭇골 사람들』(연성수 구성, 공동체 펴냄, 공동제작)을 출간했다.
미술동인 두렁의 창립 회원으로 1984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에 전태일과 노동자의 삶을 그려낸 판화 연작 -<서울로 가는 길> 외- 을 출품했다. 원작은 소실되었지만 작품을 촬영한 인화사진 이미지가 남아 있다. 1984년 무크지 『우리들 I』에 만화 <웃으며 일하는 기쁨>을 실었다. 1985년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한 기금 마련 전시회'에 참여하는 등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전시와 강습 활동을 했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서 대우어패럴 노조투쟁을 지지하는 작품들 등이 경찰에 의해 탈취되었고, 두렁 및 서울미술공동체(서미공) 등의 작가들과 전시 탄압에 대한 투쟁 과정에 참여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등에 파견되어 만화·미술을 활용해 선전 활동을 했다. 주로 『민주노동』, 『민주화의 길』, 『서노련신문』의 만화 및 만평 작업에 참여했다. (1984~1986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파견 작업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간호 만평, 『민청련 구속자 소식』지에 삽화 등 제작, 회지에 만화 <민돌이 이야기>를 연재하였다. 1984년 전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작업 『민주노동』 회보 삽화 <그림으로 보는 노동의 역사>를 제작하였다. 『민주노동』 회보 작업 당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김문수와의 인연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에 참여, 1984~1986년 시기에 『서노련신문』 에 <깡순이>를 연재(공동제작), 1986년, <사장과 진실> (김문수 기획, 김주형·이기연·이은홍·(조형일) 공동제작)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작업으로 인해, 두렁과 신명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 이은홍이 구속되는 사건을 겪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 문화 단체에서 노동조합 교육과 문화 활동을 계속해왔다.
- 1958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출생
- 홍익대학교 미술교육과(회화 전공) 77학번으로 입학 후 제적
- 1980년 학내 5·18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유인물 제작, 살포,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
- 1981년 8·15 특사로 사면, 사면 후 학생운동, 노동자문화운동에 투신
- 미술동인 두렁 창립회원, 생활문화연구소 신명 활동 등 문화예술운동, 민중미술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