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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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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욱광주일고 다닐 당시 15개 남녀 고등학교 연합서클인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열심히 했다. 형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고,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공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 중국집을 운영했다. 종로학원 재수생 시절 5.18이 일어났고, 재수생들 중 광주 출신들이 모여 광주에 내려가려고 했지만 항쟁이 끝나 무산된 일이 있었다.
대학 진학 후 농법회에 가입했고, 3월 19일 첫 데모부터 열심히 참여했다. 덩치가 작고 빠른 편이어서 잘 도망가는 편이었다.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대학 2학년 때 2주간 혹독히 농활을 다녀온 뒤 사회변혁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80학번에 이어 81학번 법대 포스트가 되었고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조직사건을 일으켜 사람들을 잡아가면 운동 바람이 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학생운동이 사회변혁에서 중심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는 사건이다. 박종운은 자기네가 다 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단식으로 몸무게를 빼서 군대 문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식과 실천방향’과 같은 문건을 통해 깃발을 통해 별도의 투쟁조직 필요성을 주장하던 MT그룹을 비판했다. 삼민투가 한 미문화원 점거 농성도 우리가 주도한 투쟁이었다. NL-CA국면으로 넘어가면서 종전의 Po시스템은 1985년도에 해소되었다.
학교생활 이후 신광표 형광등에 취직하는 한편, 인천 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6월 항쟁 후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제정구 의원실에 들어가 입법보좌관 일을 했고, 광주에 와서 변호사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운동 내부의 갈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군사독재정권의 불법성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개인적인 고민과 결단 이후 인생투신을 존중해야 한다. 개인사적으로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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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호강창호는 진주 동명고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에 수석 입학 후 학생운동을 하면서 민정당연수원 점거사건, ML당 사건 등으로 두 차례 구속되었다. 복학 후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국립사범대 우선임용조항에도 불구하고 교원임용에서 제외되었으며, 1989년 1차 발령투쟁 및 전교조 상근 활동, 1998년 2차 발령 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특별채용 후 서초고 교사로 발령받아 교육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전교조 교육민주화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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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전라북도 옥구(군산)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농촌 계몽운동가가 되리라 희망했지만, 축산학과에 진학 후 전공보다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군복무 후 늦게 복학한 뒤, 농업을 전체 산업 속에서 다룰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언론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75년 합동통신사에 입사하고 정권의 언론 감시, 외신 보도 통제의 실상을 알고 문제의식이 생겼다. 10·26사건 이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유명무실한 기자협회를 개혁하고자 회사 선배인 김태홍이 기자협회장이 되도록 지원했다.
기자협회의 주도 아래 검열 철폐를 주장하다가 비상계엄령의 확대로 자유언론 운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국시부정이라 이유로 8월 4일 강제해직 당했다. 취업이 제한되자 대학원에 진학하여 언론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어렵게 대우그룹에 입사하여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와 언협 활동에 참여했다.
6월항쟁 이후에 퇴사하여 <말>지 편집장을 맡았고 12월 대선을 앞두고 공정보도를 위해 노력했다.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하였다. 사회부장 시절인 1990년 9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하여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여론매체부장으로서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 시도했다. 나아가 언론계의 자정과 언론인의 윤리 강조하여 언론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한겨레 퇴사 이후,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저술하였다. 민언련 이사장 시기에는 민언련 후원회원 증대와 시민운동의 변화에도 기여했다. 조용수와 민족일보 사건, 국가보안법, 한미상호방위조약,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80년 언론인 해직 사태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피해자 보상을 위하여 오랜 세월 앞장섰다. 2021년 광주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보상이 가능하게 됐지만 입법상 오류가 발생하여 이를 개정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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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형구술자는 1966년 조선대학교 생물교육과에 입학하여, 1974년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대학 때부터 YMCA 활동을 해서 광주Y교협이 결성되는 1981년을 전후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광주Y교협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민주교육추진 전남교사협의회 회장, 1989년 전교조 초대 전남지부장, 2대, 4대, 6대, 7대 지부장을 역임했다. 전교조 결성을 주도하여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94년 정부의 특별채용 조치 당시 학교 현장을 복귀하지 못하고,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전남 교육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06년 9월 목포기계공고로 복직하여 학교로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뒤늦게 지킬 수 있었다. 2011년 영산 성지고 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평생을 교육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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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김명인은 1958년 강원도 삼척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4세에 서울로 이사하였고, 부친의 광업이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1971년 휘경중학교, 1974년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서울대 인문계열에 입학하였고, 문학비평에 뜻이 있어 국문과를 택했다. 입학 후 인문대 역사철학회와 지양편집실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학년 때 인문대생을 선동하여 교련수업을 거부하는 시위를 주도한 적도 있었다.
유신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서울대생들은 76학번부터 각 단대 써클의 2학년 학생 중 핵심적 인물들을 모아 비밀학생운동 조직 ‘언더’를 운영하였고, 동기들 중 특히 적극적인 소수의 학생은 ‘언더 지도부’가 되어 다음 기수의 교육까지 맡았다. 김명인은 77학번 ‘언더’(77언더)의 멤버가 되었고, 조직 내 핵심적 사안을 논의하면서 ‘78언더’를 교육하는 ‘77언더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을 지도한 76학번의 대표적 인물은 이원주였다.
김명인 외 ‘77언더 지도부’에는 현무환과 최영선이 있었다. 이들은 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건설을 주도하였고, 5월 15일 서울역에 집결한 10만의 학생 시위대를 통솔하여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규모 인파의 시위를 접하자 이를 통제할만한 역량과 여건을 갖추지 못했던 언더 지도부는 총학생회장들의 해산(서울역 회군)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광주학살로 이어졌다.
80년 2학기가 개강하자 언더 지도부는 소모적 시위를 자제하고 81년 신군부와의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서울대의 침묵에 대해 즉각행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도 높았는데, 그 회답 차원에서 벌인 시위가 12월 11일 시위였다. 이날 시위의 성명서 ‘반파쇼학위투쟁선언’을 작성한 김명인은 학생운동 조직 내 소모적 논쟁들을 종식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학생운동의 방향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경찰 당국에 의해 서울대 운동권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조직사건으로 비화되었으니, 이른바 ‘무림사건’이다. 특히 김명인은 성명서 작성자이기에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으며, 취조 과정에서 만난 이근안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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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김문수는 1961년 경북 안동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중학교 과정을 비인가 시설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로 이수했다. 성동기계공고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했다. 연합고사를 보고 영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영동고등학교는 명문고였으며, 진보적인 학교였다.
1981년 3월에 서울시립대학교에 입학하고, 1982년 무역학과로 진급했다. 무역학과에도 진보적인 교수들이 있었다. 서울시립대는 입학 정원이 적었고, 등록금이 낮았다. 1981년에 민족문화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82년 10월 초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개최된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영등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경찰은 조직사건을 만들기 위해 거의 매일 밤마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가 폭행과 고문에 의한 조사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제징집 되었다. 103보충대를 거쳐 강원동 원통 소재 12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신병교육대에서도 폭행을 당하고 주시를 받았다. 12사단 오지에 배치되어 정말 고생했다. 부대 내에서도 보안대로부터 주기적으로 감시를 당했고, 고참이 되었음에도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전역 전날까지 근무를 섰다.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사단 보안대로 호출되어 1주일간 폭행을 동반한 녹화 교육을 받았다. 휴가 중에도 감시를 받아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이윤성의 죽음은 분명 살인이다.
1985년 5월 복학을 포기하고 건설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조합을 조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86년에는 전혀 예기하지 않게 건국대 점거농성사건에 연루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1988년 취업했다. 그러나 신분이 탄로 나 퇴출이 되었고, 여러 회사를 전전했다. 이후 인천지역에서 합법과 비합법 노동운동을 했다. 1990년부터는 국민연합과 사회당 등에서 활동했다. 1992년 4월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 상태가 되었고, 1999년에 해제되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그리고 사회운동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 특히 분노조절장애가 느껴질 정도로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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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곤김민곤은 진주고를 졸업하고, 1972년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에 입학 후 대한항공에 취업하였다가 영동여고 교사가 되고, 그 후 서울사대부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1982년 YMCA중등교사협의회 활동을 시작하고,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을 주도하였다. 1988년 전교협 결성 이후 전국교사신문 발행을 주도하고,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하였다. 대량해직 사태가 발생하자 3선 지도부로서 명동성당 단식농성을 주도하고, 전교조 주요 인물로 수배가 되고, 구속되었다. 출소 후 전교조 사무처장을 비롯하여 교육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94년 특별채용 후에도 교육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동안의 교육민주화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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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김봉준은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67년 용산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고, 재수 후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여 1980년 졸업했다. 대학 재학 당시 민속문화 서클을 결성하여 탈춤·풍물·탈·민화·불화·민요 등 민속예술의 학습과 연구에 열중하였다. 졸업 직후 첫 직장 ‘창작과 비평’사를 다닌 지 3개월도 안 되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알려는 유인물 제작 및 배포로 수배(5·18 계엄포고령 위반)되었다. 1여 년간의 도피 생활 끝에 사회에서의 직장 생활을 접고 사회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기독교농민회의 문화간사, 1982년 굴레방 놀이기획실, 1983부터 1984년까지 애오개 문화마당 운영위,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로 이어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운동과 문화운동을 하였다. 1986년에는 민족굿회 결성하며 굿 문화에 대한 실기와 연구를 병행하였다. 1987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실행위원회 결의로 미주 지역 동포사회에 민중문화 보급의 사명을 지명 받고 도미, 5개 도시(뉴욕, 워싱턴, 마이애미, LA, 샌프란시스코, 독일 보쿰 등)에 풍물패를 조직하고 민중미술을 보급하였다. 1987년 12월, 대선 전에 귀국하였으나 활동을 보고할 단체도 와해되었다. 민주 진영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크게 실망하고 서울 활동을 접고 지역으로 내려갔다.
1981년 걸개그림 〈만상천화〉 제작과 농민회 만화책 『농사꾼 타령』(기독교농민회 발간)으로 민중미술을 시작하였다. 졸업 직후, 1983년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미술동인 두렁을 결성하였다. 1983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과 1984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을 펼치고, 동인지 『산 그림』과 『산 미술』을 출간하였다. 두렁과 애오개 소극장(문화공간) 활동을 하며 걸개그림운동, 민중목판화운동을 펼쳤다. 여러 마당극의 출연과 연출, 그리고 미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85년 『민중미술』(도서출판 공동체) 발간 편집위원장을, 1985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기획국장을 맡았다. 1987년 이후 5년 간 부천에서 놀이마당 복사골을 운영하며 노조문화 지원 활동과 시민미술공방 흙손공방을 경영하였다. 1993년 이후 강원도 원주 문막으로 낙향,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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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구술자는 1962년 동지상업고등학교 졸업하고, 1966년 포항수산초급대학을 졸업한 후 경남 칠곡군 관내 국민학교에서 첫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한국사회사업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마산여상 교사가 되었다. 1989년 전교조 초대 마산지회장으로 경남지역 교육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대량 해직 사태에 직면해 교사들이 명동성당 단식농성을 전개하자 여기에 참여해 전교조 위원장 권한대행으로 활동했다. 1990년 경남도교육청 교섭투쟁 과정에서 구속되고, 1991년부터 제2대, 제3대 전교조 경남지부장으로 활동했다. 전교조 초대 감사위원장, 전교조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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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전도관에 다닌 어머니의 영향으로 교회에 다녔고, 고등학교 때 KSCF에 적극 참여했다. 폐결핵 걸린 친구 요양을 도우러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대한수도원에서 생활한 것이 인연이 돼서 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감신대 기숙사 생활과 방학 중 빈민촌 합숙훈련, 군 입대, 제대 후 빈민운동 현장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1976년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회장을 맡아 각 교단 청년 대표들과 함께 한국기독청년회(EYC)를 창립, 초대 현장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철폐 운동 분위기가 대학가에 돌면서 고교 동창 정문화의 권유로 감신대 긴조9호 반대 집회를 기도했다가 사전 발각돼 구속,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EYC 회장에 취임해 6개 교단 청년세력을 조직화하고 전국 규모 사회선교대회를 개최하는 등 교류를 강화했다. 그러던 중 10.26사태가 일어나고 박종렬 목사가 찾아와 통대선거반대 집회 개최를 제안했다. 기독청년세력 내부에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노선 차이는 있었으나 유신 연장 불가 입장에는 이견이 없어 집회 참여를 결정했다. 집회 형식은 장례식보다 결혼식이 낫다고 생각했고, 민청협에서 신랑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결혼식 사회는 EYC가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내가 자청했다. 우리가 맡은 것은 하객 동원이었는데, 결혼식 당일 분위기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집회는 금방 깨졌고, 꼼짝 없이 연행돼 보안사로 이송됐다. 보안사에서는 분풀이 식의 가혹행위가 이어졌고, 정치권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YWCA위장결혼식 집회 및 시위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혼미한 정정 속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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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김정헌은 1946년 평양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두 형님을 따라 건축과 진학을 희망했으나 진학에 실패, 재수 시절 취미로 다니던 신영헌 화실에서 조교 이경직을 만나며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 65학번으로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함. 1960년대 중후반의 서울대학교 미대 학풍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 대학 세미나에서 임영방 선생이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던 것과 『창작과 비평』에 실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글들에 많은 영향을 받음. 학창 시절 어울리던 임세택, 오경환, 오윤 등이 현실동인을 만들고, 1969년《현실동인》전을 치르려다 서울미대 교수들의 고발로 무산된 소식을 알게 됨. 대학원 시절이었던 1972년부터 졸업 후 1980년 무렵까지 미술교사 생활을 함. 이 시기 오수환(1946~), 원승덕(1941~) 작가와 어울리며《잡초전(三人展)》(1975, 1977) 등의 전시를 함.1979년, 김정헌의 명륜동 화실로 선배 최민과 동기 오윤 등이 찾아와 현실과 발언의 결성을 제안, 그 외 4‧19 20주년을 기념하며 동인 결성을 주도한 원동석 무리와 성완경 무리 등이 모여 1980년 10월 미술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을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전시 작품의 비판 수위를 보고 놀란 관장이 일방적으로 전시 취소를 결정, 김정헌 작가 등이 관장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운영위원회까지 소집하여 취소 결정을 단행하고 전시장의 전기를 끊어버림. 이에 전시장에 방문한 관람객들이 촛불을 켜고 작품을 관람한 일화로 ‘촛불 전시’로 알려짐. 한달 후 동산방화랑에서 창립전 재개최를 제안하여 창립전이 치러짐. (평론가 윤범모, 성완경, 원동석, 최민과 작가 김정헌, 김용태, 민정기, 임옥상, 주재환, 권순철, 강요배, 노원희 등 참여) 당시 『중앙일보』에서 이 전시에 대해 조명하며, 많은 관람객이 찾았고, 임술년 등과 같은 후배 민중미술 소집단의 결성에 영향을 미침.1985년 군사정부의 예술탄압 사건을 대표하는 이른 바 `힘전' 사건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의 전시 강제 취소 및 그림 탈취(압수) 사건- 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결성되고, 안전한 전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김용태, 유홍준 등과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반고문전》을 비롯하여, 민중미술 활동을 위한 각종 기금마련전을 운용하며 종로서 형사들의 감시 공간이 됨. 1986년 일본의 화가 도마야마 다에코와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의 초청으로 손장섭, 성완경 등과 《JAALA전》(민중의 아시아)에 참석, 이 과정에서 민중미술 계열 예술가들의 일본행을 탐탁지 않아하던 정부 관계자들의 훼방이 있었음.1980년 공주사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학내에서 불온교수로 낙인찍힘. 1984년 무렵 공주사대 불문과 강사로 온 퐁세 신부의 제안으로 공주교도소 벽화 <꿈과 기도>를 제작함. 당시 현실과 발언에서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벽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때라 수락, 농촌의 세 계절을 소재로 작업을 진행, 현재는 사라짐.1994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임영방 관장의 제안으로 유홍준, 임옥상, 최열, 김인순, 라원식[양원모] 등과《민중미술 15년전》 기획을 돕고, 전시에 참여함, 같은 해 예술의 전당에서 《동학 100주년 기념전》을 기획하고 참여함. 이후 1999년 문화연대 상임공동대표를, 2007-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12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4‧16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김종례김종례는 1946년 서울에서 출생. 1961년 중학교 시절, 5‧16 군사정변 지켜봄. (보수적 학풍의) 진명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울교대에 진학. 서울교대 시절 박광진(1935~) 교수의 영향으로 미술을 배우고, 1967년《국전》에 입선.《국전》입선 작품을 덕수궁미술관에서 박정희가 관람한 후, 당시 장기영 경제부총리에 의해 구입. 졸업 후에도 박광진 교수의 일을 도우며, ‘일요화가회’ 등의 모임의 총무를 맡았고, 민족기록화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음. ‘한국 근대여성 지도자 100인’에 선정.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결혼과 연이은 출산으로 인해 교직 생활을 그만둠. 1남 3녀 중, 아들이 4살 되던 해 아들을 잃음, ‘죽음’에 대한 화두가 그림에 등장. 1980년대 초, 서초동의 제3화실을 오가며, 김인순, 윤석남 등과의 작가들과 교류. 1982년 이들과 함께 《11인의 소묘전》을 치르고, 이 무렵부터 정문규, 유홍준 등의 도움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함.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에서 죽음과 상처, 회복을 주제로 다룬 작품 발표. 1985년 힘전 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때, 김종례의 작품도 함께 등장, 이 시기 ‘민중이란 무엇인가?’, ‘민중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 김인순 등과 함께 ‘힘전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한 모임(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참여. 1985년 ‘시월모임’의 창립에 관여는 하였으나, 개인사로 인해 지속적으로 함께하지는 못함. 1986년에서 1987년 무렵, ‘민미협’ 활동을 하며 《반고문전》, 《통일전》, 《인간전》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면서, 박종철 열사·권인숙 성고문 사건 등에 작업으로서 발언. ‘민미협’ 안에서 여성미술분과(1986~) 활동을 하면서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운동 안으로 끌어옴. ‘민미협’ 소속의 여성 작가들과 모여 ‘여미연’(1987년 6월 결성)을 만들어내는 데 역할을 함. 김인순·윤석남·정정엽 등과 ‘여미연’ 활동을 하며《여성과 현실전》을 연례적으로 기획하여 한국 여성주의미술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줌. 그림패 ‘둥지’ 활동에 부분적으로 개입하여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다수의 걸개그림 공동제작. 1980년대 여성들의 문제, 특히 여성인권과 관련한 문제들을 문화예술의 주제로 다뤄온 과정 구술. 가족법 개정과 같은 실질적 법 개정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