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경기.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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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강원도 원주시의 4월혁명은 당시 대표적인 고등학교인 원주농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구술자인 김영길 당시 원주농고 학생운영 부위원장으로서 『사상계』나 일간지 호외를 즐겨 읽는 등 평소 의식이 깨어있던 편이다.구술자는 장춘길 학생운영위원장을 비롯한 김건호, 안국황, 성수길 등 핵심인사들과 함께 1960년 3월 14일 당일에 기습적이면서도 치밀하게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이끌었다. 등굣길에 결의를 하고 하교길에 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원주군청 앞에서 약 1백 명이 모여 규탄시위를 벌였다. 더군다나 뿌릴 삐라를 도시락에 넣어 이동하였다는 것에서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정보의 누설을 염려하여 종례 직전에야 전교생 및 타 학교에 알리고 바로 실행에 옮긴 점에서는 과감한 결단력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이렇게 진행된 원주군청 앞에서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舊 군인극장 앞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제지로 주모자들이 연행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이때 고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후를 캔다는 명목 하에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고초를 겪게 된다. 조사 이후 풀려난 주동자들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집에서 감금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또다시 시위를 모의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경찰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조차 통제를 하는 관계로 근 한 달 동안을 일체 외부 접촉 없이 지내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요시찰은 이후 한일협정 반대데모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이러한 암흑기를 거쳐 4월 19일을 기점으로 전국적 시위가 벌어지자 원주에서도 다시금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4‧19 이전까지 활발했던 움직임에 비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있던 4‧19 당일에는 원주에서 본격적인 시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구술자도 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원주의 중‧고등학교가 연합으로 시위를 준비하여 4월 26일에 원주공설운동장에 모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원주농고를 비롯한 몇몇 학교는 만세삼창 이후 해산하고 일부 학교만이 시가행진을 하게 된다.이후 5월 9일에는 서울에서 시위를 참여했다가 희생된 장영옥이라는 원주출신 학생에 대한 추모대회를 원주초등학교에서 개최한다. 이는 재경 대학생회와 원주의 중‧고등학교 연합회가 공동으로 학생장을 치른 것으로 각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조문을 하였다고 한다.구술자는 대학이 없던 원주에서 4월혁명 이전에 강원도에서 유일한 시위를 주도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민주화운동의 시초이자 뿌리인 4월혁명에 대한 연구에 큰 의의를 부여하면서 이런 노력이 민주화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5. 참고 자료1) 저서홍영유, 『4월혁명통사』, 죽산, 20102) 연구논문신병식, 「원주지역의 4월혁명과 그 역사적 의미」, 심포지움『4월혁명 50주년 기념 - 강원지역에서의 4월혁명』, 2010년 4월 16일3) 신문기사《한국일보》, 1960년 3월 15일, <"원주에서도 원성군청 앞에 약 1백여 명의 원주농업고등학교 1, 2학년생들 데모">《조선일보》, 1960년 4월 26일, <"원주시장 사임, 4‧19에 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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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조구술자 나광조는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피난 중에 가족과 떨어져 인천으로 와 미군부대를 전전하던 중, 돌봐주던 미군이 귀국하면서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던 교회 고아원에 맡겨져 생활하였다. 인천공고 진학 후에는 학생운영위원회 규율부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유도부로도 활약하였다.인천공고는 평소에 선생님들이 시위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순찰조를 편성해 감시를 한다든가 학교가 위치한 수봉사에 규율선생님이 나와 감시를 하기도 했다. 김주열 사망사건이 보도되었을 때에는 북한의 사주라는 얘기가 떠돌았는데 젊은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었다.3월 10일경에는 고려대 학생 1인과 신문기자가 찾아와 교회에서 목사님과 함께 만났는데 구술자가 데모를 주도할 수 있게끔 목사님이 도와달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다른 학생회 간부도 접촉했는지는 모르겠는데 3월 16일과 이후에도 또 찾아와 만났다. 고대 학생의 말은 4월 19일에서 20일 사이 전국의 각 학교에서 일어날 터이니 숫자가 많고 실업계라 과격한 인천공고에서 참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만남이 구술자가 인천공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구술자는 학교 규율부원들과 유도부원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시위를 준비했고 4월 19일날 조회시간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를 눈치 챈 학교 측에서 조회를 취소하였으나 주동 학생들이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연락을 취하여 2교시 종이 울림과 동시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수봉산을 넘는 학생들과 교문을 돌파하여 시내로 향하는 학생들 이렇게 2진으로 나뉘어 학교를 빠져나갔다. 전교생 1천 명 중에 1학년을 제외한 약 7백 명이 나왔다. 두 갈래로 가되 나중에는 인천시청 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플래카드도 준비했는데 빵집에다 사전에 맡겨 놓았고 삐라도 전 날 준비하였다.시내로 진출하여 목적지인 인천시청 쪽으로 가던 와중에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을 당하거나 연행되는 학생들도 있었다. 맨 앞줄에는 유도부, 태권도부 등 운동부가 앞장을 서서 경찰들도 함부로 막지는 못했다. 소방차가 나와 물을 뿜어대기는 했지만 총소리는 듣지 못했다. 결국 인천시청까지는 가지 못하고 제물포역에서 모두 흩어졌는데 이때까지 다른 학교에서는 동참을 하지는 않았다.인천공고 외 다른 학교도 동참한 시위는 22일부터 있었다. 22일부터의 시위는 인천공고에 자극받은 게 컸으며 동인천 광장과 답동성당 광장에 주로 모였다.4월 19일 시위 후 구술자는 목사의 보호 아래 교회에서 숨어 지내면서 이후 지속적으로 벌어진 인천시내 중고생들의 시위에 간간이 참여하다가 4월 23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취조과정에서 경찰은 구술자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이북에서 온 누군가와 접촉하지 않았는가를 계속 추궁하였다. 이후 학교 선생님들과 교회 목사의 보증으로 4월 25일 경찰에서 풀려났고, 5월 1일 학교에 등교하였다.5. 참고자료(이하 서광열, 송강진, 조동주, 하근수 같음, 정병호는 제외)1) 저서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김정남 지음,『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한완상 외저,『4‧19 革命論, 1』, 일월서각, 1983일월서각 편집부 엮음, 『4‧19 革命論, 2 : 資料編』, 일월서각, 1983학민사 편집실 편,『4‧19의 民衆史』, 학민사, 19844‧19혁명기념사업회 엮음, 『4‧19革命史』, 4‧19혁명기념사업회, 2003姜萬吉 [外著],『4월혁명론』, 한길사, 1983서중석 지음 ;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07사월혁명연구소 編,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1,2』, 한길사, 19902) 잡지, 기관지 등서중석, 『1960년 4월혁명 개념 소고』, 『成大史林』12, 13, 成均館大學校史學會, 1997韓完相, 『4‧19 精神과 學生運動』, 『씨알의소리』42, 씨알의소리사, 1975신용하, 『4‧19 혁명과 한국현대사의 전환』, 『2000年』276, 현대사회문화연구소, 2006조동걸, 『4‧19 혁명의 민족주의적 성격』, 『통일로』212, 안보문제연구원손봉호, 『4‧19와 학생』, 『새가정』7, 새가정사, 1960박현채, 『4‧19 민주혁명과 이의 계승; 민족민중론의 시각에서』, 『사상』4, 사회과학원, 1990정대화, 『4‧19 정신으로 본 4‧11 총선』, 『신문로포럼』32, 신문로Forum, 1996신용하, 『4‧19 혁명과 한국현대사의 전환』, 『통일로』200, 안보문제연구원, 2005이부영, 『4‧19가 남긴 과제』, 『國會報』342, 國會事務處, 1995金成植 外, 『韓國의 學生運動 : 다시 4‧19를 돌이켜보며〈座談〉』, 『新東亞』128, 東亞日報社,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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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열1939년생인 구술자는 경남 함양 출생으로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나와 인하공대에 진학하였다. 구술자는 원래 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준비하던 중 시험 15일 전에 부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8년 인하공대에 진학하였다. 인하공대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립자로, 하와이 교민들의 후원을 받아 설립되었는데, 장래 발전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인하공대로 진학을 결정하였다. 당시 인하공대는 유능한 교수진을 초빙하여 수업을 했고, 학사관리가 엄격하고 장학금 제도가 좋았다. 또 이승만이 설립자, 이기붕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었지만, 학교 학생들이 그 부분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학내에 학장을 단장으로 한 학도호국단이 있었고, 학생들의 투표로 구성되는 학생운영위원회가 있었는데, 구술자는 덩치가 크고 운동을 잘하는 관계로 선배들 눈에 띄어 2학년이었지만 규율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학내 서클로는 주로 공과대학이라는 특성에 맞는 학술모임이 주를 이루었는데, 구술자는 주변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 몇 몇과 루트(Root)그룹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인하대에는 4‧19를 주도하거나 현실 참여에 보다 적극적인, 특별히 이념서클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3‧15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대해 인하공대생들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탄하였으나 공과대학이라는 특성상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송도중학교가 시위에 나섰던 3월 14일과 4‧19 당일 인천공고의 시위에 대해서도 구술자는 별다른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그러나 4월 11일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특히 4월 19일 고대생 피습사건에 큰 영향을 받았다. 4월 19일 몇몇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서울 지역 시위에 참여한 후 구술자를 찾아오면서 시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4학년생들이 했고 구술자는 3학년생으로 규율부장을 했을 때였다.당시 인하공대는 4월 20일부터 휴교에 들어가 다른 학생간부들은 귀가하여 남아있지 않았고, 학교에 남아있던 구술자가 규율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구심점이 되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구술자는 학교 근처에 하숙을 하였기 때문에 구술자를 중심으로 연락이 이뤄질 수 있었다. 구술자에 따르면 4월 20일 휴교조치 이전까지 인하공대는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본격적인 시위에 관한 준비는 4월 20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는데, 구술자와 자주 교류하던 루트그룹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를 진행했다.휴교조치로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간 상황이어서 기숙사나 학교 주변에서 남아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규합하였고, 4월 21일 12시에 답동 네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당일 아침 플래카드를 준비하여 시위장소 주변에 흩어져 있다가 구술자의 구호를 시작으로 학생들이 대열을 이루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대열의 뒤를 따랐다. 행진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는 가운데 인천시청 앞에 도착하여 연좌를 하고 시위를 이어가는 와중에 인하공대 최승만 학장이 버스를 대동하고 나타나 학생들을 설득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만류하는 가운데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고, 23일 이후에는 부상자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운동에는 인하공대 교수들이 봉급에서 일괄적으로 갹출을 하기도 했다.이후에 구술자는 승리에 대한 성취감과 함께 사회 혼란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컸다고 증언했다. 이는 학교 전체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4‧19 이후 학도호국단은 해체가 되고 자치회가 생겼을 때 구술자는 떠밀리다시피 하여 회장직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5‧16이 날 때까지 자치회장으로 활동했다.학내에는 여러 파벌이 형성되어 의견 충돌이 많았고 재단 문제로 학교를 떠나는 교수들도 있었다. 학교는 연일 데모를 했고, 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매일같이 총회를 열었다. 졸업할 즈음에는 후배들의 신뢰가 쌓여 학교에 남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결국 조교생활을 시작했고, 당시로서는 그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도 하였다.한편 구술자는 4‧19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자각하게 된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역사적인 것을 발굴하여 그런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5. 참고자료- 나광조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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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진수원에서 태어나 수원농고에 진학한 구술자는 수원농고 재학시절 학생운영위원회 규율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고등학생들을 각종 행사에 동원하는 일이 많았으나 거기에 대해 별다른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1960년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책동에 대해 의분을 느끼고 시위에 대한 생각을 키우던 중 대구에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듣고 학생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시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3월 10일 수원에서 예정된 민주당의 마지막 유세를 앞두고 학교 측에서 예정에 없던 시험을 치르겠다고 발표하면서 3월 9일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운영위원회 간부들, 학도호국단 연대장 등 학생들이 모여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작성하는 등 시위 준비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원 지역에 다른 고등학교에도 연락을 취했으나 당일 경찰의 봉쇄로 다른 학교 학생들은 시위에 동참하지 못하였다.3월 10일 선생님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구술자는 학교 뒷산에 올라가 있다가, 다른 학생이 종을 울림과 동시에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시내로 향하던 중 경찰과 충돌하여 많은 학생들이 구타나 연행을 당하여 목적지였던 민주당 유세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가지 못하였다. 그날 밤 구술자는 집에 있다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취조과정에서 경찰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였다. 다음날 경찰서에서 풀려났으나 다시 경찰의 출두 요청을 받고 사찰계 분실로 가서 조사에 응했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은 구술자에게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 시위를 막으라는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각서를 쓰고 풀려난 구술자는 그 길로 수원 외곽의 외가로 가서 1주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도 학교 측에서는 선생님을 통해 구술자를 한동안 계속 감시하였다. 구술자의 시위 주동으로 인해 토건업을 하던 부친의 사업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이승만 하야에 대한 소감이 남달랐는데 김구를 존경한다는 구술자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정부패의 주범을 이승만보다는 측근들로 보았으나 구술자는 이승만의 책임을 지적하였다.5. 참고자료- 나광조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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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구술자는 춘천고 학생운영위원장으로서, 『사상계』와 야당지인 《강원일보》 등을 탐독하여 사회과학적 인식이 남달랐으며, 당시 춘천이 1958년 총선에서 계광순 후보가 당선한 야도라는 점도 비판의식을 높이는 이유가 됐다.강원도 춘천시의 4월혁명은 춘천고등학교가 중심이었다. 구술자인 정병호 당시 춘천고 학생운영위원장과 설정일 학생운영 부위원장, 박건이 등 핵심인사들이 1960년 3월 19일에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모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3월 21일 '제1회 사방의 날'을 D-day로 해서 춘천의 전 고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도중에 정보가 누설된 관계로 3월 20일에 춘천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의 급습을 받고 연행됨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구술자는 이틀 동안의 조사과정을 거친 후 3월 22일에 석방되었는데, 이때는 강원도에 중‧고등학교 휴교령이 내렸던 시기로 학교 측의 별다른 처벌 없이 집에 연금되는 처지가 된다. 담당 형사들의 감시로 인해 외부 접촉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집에서의 피신 권유로 강원도 양구 방산면 외삼촌댁으로 가면서 한 달 정도 춘천을 떠나 있게 된다.이러한 당국의 감시로 인해 춘천에서의 4월혁명의 분위기는 근 한 달 동안 침체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전국적인 시위 물결과 4월 19일 대학생들의 전면적인 가담으로 춘천에서도 다시금 4월 25일 춘천고 설정일 학생운영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시위를 계획한다. 구술자는 그때까지 피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춘천의 학생연합조직은 없었으나 춘천고의 위상이 워낙 막강하여 춘천고에서 움직이면 다른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분위기였다.4월 25일 춘천고 제36회 개교기념일에 춘천고 학생 500명의 시위대가 교정을 출발하여 춘천경찰서를 경유하여 도청에 이르렀다. 춘천고는 당시 주‧야간 합쳐 1천5백 명 가량 되었는데 이중 1/3이 참여했으며 이는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비상연락망을 통해 가능하였다. 도청에서 홍창섭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표를 뽑은(제비뽑기) 두 명의 학생들이 들어가 대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요구 사항은 '학원에 정치적으로 간섭하지 말아라' '수업을 조속하게 빨리 하자'이었다.또 이때는 춘천여고, 성수고, 춘천농대 등이 합류하였는데 도지사와의 면담 후 귀교 과정에서 경찰 경비차, 춘천시청, 강원일보, 자유당 강원도당에 투석을 하였다고 한다. 25일 데모는 춘천고 김병로 교장선생님의 설득으로 해산되었다.이후 4월 26일에도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4월 29일에 '4‧19, 4‧26 희생동지위령추도식'으로 계획을 변경하여 진행하게 된다. 이때는 학생과 시민 7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춘천고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 주최는 춘천학도호국단과 재경강원도학우회가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춘천고와 춘천여고 교장이 조사를 하였다.구술자는 당시의 4월혁명 참여가 전체적으로 작은 부분이었지만 그러한 개개인의 의지가 축적되어 민주화의 초석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5. 참고자료1) 저서홍영유,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학민사 편집실, 『4월혁명자료집 四.一九의 民衆史』, 학민사, 19842) 연구논문엄한진, 「춘천의 4‧19혁명」, 심포지움『4월혁명 50주년 기념 - 강원지역에서의 4월혁명』, 2010년 4월 16일3) 신문기사《한국일보》, 1960년 4월 25일, <"춘천서 학생데모, 25일에 강원도에서 처음으로">《동아일보》, 1960년 4월 26일, <"川서도 一大데모">《강원일보》, 1960년 4월 26일, <"4‧19사건에 충격을 받은 춘천시내 700여명 학생들은 25일 10시 데모 감행">《강원일보》, 1960년 4월 29일, <"4‧19, 4‧26 희생동지위령추도식이 학생, 시민 등 7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11시 춘천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동아일보》, 1960년 4월 30일, <"犧牲學徒慰靈祭 29日 春川서 嚴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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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주구술자는 부산에서 출생하여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국가, 민족,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키우면서 생활하였고, 농과대학에 가서 농촌을 일으키고 농민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1958년 서울대 농대 생물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 농대는 선후배간의 사이가 돈독하고 농과대학 특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나 자유당 정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야당인 민주당에 대해서도 대안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서울대 농대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학도호국단 외에 각종 서클이 있었는데, 구술자는 1959년 김성훈(전 농림부 장관)과 함께 '한얼'이라는 농촌문제 서클을 만들었고, 4월혁명 이후에는 '농사단'이라는 서클을 별도로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이우재의 구술에서는 4‧19 이전에 활동한 것으로 증언되었다).구술자는 1960년 3월 10일 수원 시내에서 벌어진 수원농고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오히려 구술자는 당일 민주당 유세장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에게 잡혀 구타당하고 있던 수원농고 학생들을 도와주려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시위하다가 붙잡히면 훈방조치로 끝나지만 대학생들은 군대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마산시위 이후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학내에 자유당 프락치들이 활동하고 있어 공개적으로 모여서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면서 구술자를 비롯한 몇 몇 학생들이 모여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4월 19일에도 서울대 농대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여론이 고조되어 있었다. 당시 구술자는 유서까지 써놓고 하숙집에서 나와 학교로 갔는데, 4월 20일 아침 학교 기숙사 앞 식당과 다방 근처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500~6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구술자의 선동에 호응하여 학생들이 대열을 이루어 학교 밖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맨 앞줄에는 여학생들을 서게 했는데 이는 설마 여학생들에게 총을 쏘겠느냐는 계산이 있었다.당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육교를 건너야 했는데, 육교 쪽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과의 협상 끝에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합의를 보고 시내로 진출하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고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해산 후 구술자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학내에 남아 단식투쟁을 하다가 논의 끝에 단식을 풀고, 서울지역 학생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한국 동맥인 경부선을 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차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농대 교수들의 만류에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구술자의 서울 농대의 시위가 『서울농대 100년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전 모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오륙년 전부터 모의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의해 서서히 달궈지면서 저절로 모의된 것이라고 했다.5. 참고자료- 나광조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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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근수하근수는 평안도에서 출생해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동년생들보다 3, 4년 늦게 인천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하근수는 인천고 학도호국단 연대장으로 활동했는데 직선으로 선출되었다. 인천고의 학도호국단은 반공행사에서 학생들을 인솔하는 역할과 선생님과 학생들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배구선수로 활동해 도 대표가 되기도 했다.4월 19일 이후 시위 발발을 염려한 학교장이 교사를 동반시켜 구술자와 학생회장을 강화도 전등사에서 이틀간 지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전등사에 있을 때 인천공고 시위를 주도했던 나광조, 김경원, 박영섭 등의 추동으로 강화도에서 도망을 한다. 당시 구술자는 엘리트 의식이 강하였는데, 인천공고가 명문인 인천고보다 먼저 시위를 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 이후 인천고 시위를 계획하는 데 큰 이유가 됐다고 한다.학교로 돌아간 하근수는 21일 시위를 계획했으나 정작 당일에는 학교를 빠져나오던 중 갈비뼈 부상을 당해 이후 인천고등학교 시위나 다른 시위에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구술자가 기억하는 당시 학교 분위기는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데모 저지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생회 간부들 중심으로 일상적으로 회유를 하였다.5. 참고자료- 나광조와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