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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주

구술자소개

구술자
조동주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김현주)
구술일자
2010년 7월 16일
장소
경기도 이천시 한국양돈기술원
구술시간
1시간 53분 14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경기.강원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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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부산에서 출생하여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국가, 민족,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키우면서 생활하였고, 농과대학에 가서 농촌을  일으키고 농민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1958년 서울대 농대 생물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 농대는 선후배간의 사이가  돈독하고 농과대학 특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나 자유당 정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야당인 민주당에 대해서도 대안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서울대 농대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학도호국단 외에 각종 서클이 있었는데, 구술자는 1959년 김성훈(전 농림부 장관)과 함께  '한얼'이라는 농촌문제 서클을 만들었고, 4월혁명 이후에는 '농사단'이라는 서클을 별도로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이우재의  구술에서는 4‧19 이전에 활동한 것으로 증언되었다). 
구술자는 1960년 3월 10일 수원 시내에서 벌어진 수원농고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오히려  구술자는 당일 민주당 유세장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에게 잡혀 구타당하고 있던 수원농고 학생들을 도와주려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생들은 시위하다가 붙잡히면 훈방조치로 끝나지만 대학생들은 군대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마산시위 이후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학내에 자유당 프락치들이 활동하고 있어  공개적으로 모여서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면서 구술자를 비롯한 몇 몇 학생들이 모여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4월 19일에도 서울대 농대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여론이 고조되어 있었다. 당시  구술자는 유서까지 써놓고 하숙집에서 나와 학교로 갔는데, 4월 20일 아침 학교 기숙사 앞 식당과 다방 근처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500~6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구술자의 선동에 호응하여 학생들이  대열을 이루어 학교 밖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맨 앞줄에는 여학생들을 서게 했는데 이는 설마 여학생들에게 총을 쏘겠느냐는 계산이  있었다.
당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육교를 건너야 했는데, 육교 쪽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과의 협상  끝에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합의를 보고 시내로 진출하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고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해산 후 구술자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학내에 남아 단식투쟁을 하다가 논의 끝에 단식을 풀고, 서울지역 학생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한국 동맥인 경부선을 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차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농대 교수들의 만류에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구술자의 서울 농대의 시위가 『서울농대 100년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전 모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오륙년 전부터 모의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의해 서서히 달궈지면서 저절로 모의된 것이라고 했다.

5. 참고자료

- 나광조와 동일"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조동주(경기강원)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076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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