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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조

구술자소개

구술자
나광조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김현주)
구술일자
2010년 8월 9일
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32분 4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경기.강원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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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나광조는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피난 중에 가족과 떨어져 인천으로 와 미군부대를 전전하던 중, 돌봐주던 미군이  귀국하면서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던 교회 고아원에 맡겨져 생활하였다. 인천공고 진학 후에는 학생운영위원회 규율부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유도부로도 활약하였다. 
인천공고는 평소에 선생님들이 시위 참여를 저지하기 위해 순찰조를 편성해 감시를 한다든가 학교가 위치한 수봉사에 규율선생님이 나와  감시를 하기도 했다. 김주열 사망사건이 보도되었을 때에는 북한의 사주라는 얘기가 떠돌았는데 젊은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었다.
3월 10일경에는 고려대 학생 1인과 신문기자가 찾아와 교회에서 목사님과 함께 만났는데 구술자가 데모를 주도할 수 있게끔 목사님이  도와달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다른 학생회 간부도 접촉했는지는 모르겠는데 3월 16일과 이후에도 또 찾아와 만났다. 고대  학생의 말은 4월 19일에서 20일 사이 전국의 각 학교에서 일어날 터이니 숫자가 많고 실업계라 과격한 인천공고에서 참여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만남이 구술자가 인천공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구술자는 학교 규율부원들과 유도부원들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시위를 준비했고 4월 19일날 조회시간에 시위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를 눈치 챈 학교 측에서 조회를 취소하였으나 주동 학생들이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연락을 취하여 2교시 종이  울림과 동시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수봉산을 넘는 학생들과 교문을 돌파하여 시내로 향하는 학생들 이렇게 2진으로  나뉘어 학교를 빠져나갔다. 전교생 1천 명 중에 1학년을 제외한 약 7백 명이 나왔다.  두 갈래로 가되 나중에는 인천시청 앞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플래카드도 준비했는데 빵집에다 사전에 맡겨 놓았고 삐라도 전 날 준비하였다. 
시내로 진출하여 목적지인 인천시청 쪽으로 가던 와중에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을 당하거나 연행되는 학생들도 있었다. 맨 앞줄에는  유도부, 태권도부 등 운동부가 앞장을 서서 경찰들도 함부로 막지는 못했다. 소방차가 나와 물을 뿜어대기는 했지만 총소리는 듣지  못했다. 결국 인천시청까지는 가지 못하고 제물포역에서 모두 흩어졌는데 이때까지 다른 학교에서는 동참을 하지는 않았다.
인천공고 외 다른 학교도 동참한 시위는 22일부터 있었다. 22일부터의 시위는 인천공고에 자극받은 게 컸으며 동인천 광장과 답동성당 광장에 주로 모였다.
4월 19일 시위 후 구술자는 목사의 보호 아래 교회에서 숨어 지내면서 이후 지속적으로 벌어진 인천시내 중고생들의 시위에 간간이  참여하다가 4월 23일 경찰에 연행되었다. 취조과정에서 경찰은 구술자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이북에서 온 누군가와 접촉하지 않았는가를  계속 추궁하였다. 이후 학교 선생님들과 교회 목사의 보증으로 4월 25일 경찰에서 풀려났고, 5월 1일 학교에 등교하였다.


5. 참고자료
(이하 서광열, 송강진, 조동주, 하근수 같음, 정병호는 제외)

1) 저서
홍영유, 󰡔홍영유가 쓰고 엮은 4월혁명통사󰡕, 천지창조, 2010
김정남 지음,『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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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서각 편집부 엮음, 『4‧19 革命論, 2 : 資料編』, 일월서각, 1983
학민사 편집실 편,『4‧19의 民衆史』, 학민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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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혁명연구소 編,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1,2』, 한길사, 1990

2) 잡지, 기관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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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나광조(경기강원)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524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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