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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영길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엄경식)
구술일자
2010년 7월 15일
장소
원주시 자택
구술시간
1시간 35분 24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경기.강원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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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강원도 원주시의 4월혁명은 당시 대표적인 고등학교인 원주농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구술자인 김영길 당시 원주농고 학생운영 부위원장으로서 『사상계』나 일간지 호외를 즐겨 읽는 등 평소 의식이 깨어있던 편이다.
구술자는 장춘길 학생운영위원장을 비롯한 김건호, 안국황, 성수길 등 핵심인사들과 함께 1960년 3월 14일 당일에 기습적이면서도  치밀하게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이끌었다. 등굣길에 결의를 하고 하교길에 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원주군청 앞에서 약 1백 명이 모여  규탄시위를 벌였다. 더군다나 뿌릴 삐라를 도시락에 넣어 이동하였다는 것에서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군다나  정보의 누설을 염려하여 종례 직전에야 전교생 및 타 학교에 알리고 바로 실행에 옮긴 점에서는 과감한 결단력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진행된 원주군청 앞에서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舊 군인극장 앞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제지로 주모자들이 연행되면서 일단락된다.  하지만 이때 고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후를 캔다는 명목 하에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고초를 겪게 된다. 조사 이후 풀려난  주동자들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집에서 감금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또다시 시위를 모의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경찰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조차 통제를 하는 관계로 근 한 달 동안을 일체 외부 접촉 없이 지내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요시찰은 이후 한일협정 반대데모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암흑기를 거쳐 4월 19일을 기점으로 전국적 시위가 벌어지자 원주에서도 다시금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4‧19 이전까지 활발했던 움직임에 비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있던 4‧19 당일에는 원주에서 본격적인 시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구술자도 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원주의 중‧고등학교가 연합으로 시위를 준비하여 4월 26일에 원주공설운동장에 모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원주농고를 비롯한 몇몇 학교는 만세삼창 이후 해산하고 일부 학교만이 시가행진을 하게 된다. 
이후 5월 9일에는 서울에서 시위를 참여했다가 희생된 장영옥이라는 원주출신 학생에 대한 추모대회를 원주초등학교에서 개최한다. 이는  재경 대학생회와 원주의 중‧고등학교 연합회가 공동으로 학생장을 치른 것으로 각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조문을 하였다고 한다.
구술자는 대학이 없던 원주에서 4월혁명 이전에 강원도에서 유일한 시위를 주도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민주화운동의 시초이자 뿌리인 4월혁명에 대한 연구에 큰 의의를 부여하면서 이런 노력이 민주화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5. 참고 자료

1) 저서
홍영유, 『4월혁명통사』, 죽산, 2010
2) 연구논문
신병식, 「원주지역의 4월혁명과 그 역사적 의미」, 심포지움『4월혁명 50주년 기념 - 강원지역에서의 4월혁명』, 2010년 4월 16일

3) 신문기사
《한국일보》, 1960년 3월 15일,  <"원주에서도 원성군청 앞에 약 1백여 명의 원주농업고등학교 1, 2학년생들 데모">
《조선일보》, 1960년 4월 26일, <"원주시장 사임, 4‧19에 인책">"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영길(경기강원)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712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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