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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열

구술자소개

구술자
서광열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김현주)
구술일자
2010년 8월 6일
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41분 34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경기.강원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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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939년생인 구술자는 경남 함양 출생으로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나와 인하공대에 진학하였다. 구술자는 원래 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준비하던 중 시험 15일 전에 부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8년 인하공대에 진학하였다. 인하공대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립자로, 하와이 교민들의 후원을 받아 설립되었는데, 장래 발전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인하공대로 진학을 결정하였다. 당시  인하공대는 유능한 교수진을 초빙하여 수업을 했고, 학사관리가 엄격하고 장학금 제도가 좋았다. 또 이승만이 설립자, 이기붕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었지만, 학교 학생들이 그 부분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학내에 학장을 단장으로 한 학도호국단이 있었고, 학생들의 투표로 구성되는 학생운영위원회가 있었는데, 구술자는 덩치가 크고 운동을  잘하는 관계로 선배들 눈에 띄어 2학년이었지만 규율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학내 서클로는 주로 공과대학이라는 특성에 맞는  학술모임이 주를 이루었는데, 구술자는 주변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 몇 몇과 루트(Root)그룹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인하대에는 4‧19를 주도하거나 현실 참여에 보다 적극적인, 특별히 이념서클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3‧15 부정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대해 인하공대생들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탄하였으나 공과대학이라는 특성상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송도중학교가 시위에 나섰던 3월 14일과 4‧19 당일 인천공고의 시위에 대해서도 구술자는 별다른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4월 11일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고, 특히 4월 19일 고대생 피습사건에 큰 영향을  받았다. 4월 19일 몇몇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서울 지역 시위에 참여한 후 구술자를 찾아오면서 시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4학년생들이 했고 구술자는 3학년생으로 규율부장을 했을 때였다.
당시 인하공대는 4월 20일부터 휴교에 들어가 다른 학생간부들은 귀가하여 남아있지 않았고, 학교에 남아있던 구술자가 규율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구심점이 되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구술자는 학교 근처에 하숙을 하였기 때문에 구술자를 중심으로  연락이 이뤄질 수 있었다. 구술자에 따르면 4월 20일 휴교조치 이전까지 인하공대는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시위에 관한 준비는 4월 20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는데, 구술자와 자주 교류하던 루트그룹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를 진행했다. 
휴교조치로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간 상황이어서 기숙사나 학교 주변에서 남아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규합하였고, 4월 21일  12시에 답동 네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당일 아침 플래카드를 준비하여 시위장소 주변에 흩어져 있다가 구술자의 구호를  시작으로 학생들이 대열을 이루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대열의 뒤를 따랐다. 행진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는 가운데 인천시청 앞에 도착하여 연좌를 하고 시위를 이어가는 와중에 인하공대  최승만 학장이 버스를 대동하고 나타나 학생들을 설득하였다. 많은 시민들이 만류하는 가운데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고,  23일 이후에는 부상자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운동에는 인하공대 교수들이 봉급에서 일괄적으로 갹출을 하기도 했다.
이후에 구술자는 승리에 대한 성취감과 함께 사회 혼란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컸다고 증언했다. 이는 학교 전체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4‧19 이후 학도호국단은 해체가 되고 자치회가 생겼을 때 구술자는 떠밀리다시피 하여 회장직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5‧16이 날 때까지 자치회장으로 활동했다.
학내에는 여러 파벌이 형성되어 의견 충돌이 많았고 재단 문제로 학교를 떠나는 교수들도 있었다. 학교는 연일 데모를 했고, 또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매일같이 총회를 열었다. 졸업할 즈음에는 후배들의 신뢰가 쌓여 학교에 남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결국 조교생활을  시작했고, 당시로서는 그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한편 구술자는 4‧19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자각하게 된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역사적인 것을 발굴하여 그런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5. 참고자료

- 나광조과 동일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서광열(경기강원)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566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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