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전북
-
강혜자구술자 강혜자의 고향은 충북 음성이다. 아버지가 석산 일로 전주로 이사를 오면서 전주에서 전주여고를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당시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거울』이라는 학교 교지를 만드는데 일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학교 대표로 배구 선수 활동도 했다. 4월혁명이 있던 시기에 구술자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3‧15 부정선거가 있기 하루, 이틀 전에 민주당에서 한창 운동을 하고 계시던 의원의 아들 집에 모여 선거함을 때려 부수자는 모의를 했다. 당시 모의를 같이 했던 학교들은 신흥고, 전주공고, 전주고, 전주여고, 사범학교 등 20명쯤 되었던 것 같은데, 전주고생이 네댓 명으로 제일 많았고, 전주여고는 구술자와 다른 한 친구 두 명이 참여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신발을 커다란 가마솥에 집어넣었지만, 결국 어떻게 된 일인지 발각이 되어 14일 밤 집에서 경찰 백차에 실려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갔더니 잡혀간 학생이 굉장히 많았다. 경찰서에서 계속 문초를 당했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학생은 맞지 않았지만 남학생은 맞기도 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나온 후에는 교장 선생님 댁에 감금되어 4, 5일 정도를 보냈다. 구술자는 어떻게 하여 의원 아들 집에 모이게 되었는지, 누구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그런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아들이 송(광우)씨였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구술자와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장면 박사와 친분이 있는 분 딸이었는데, 하루는 선생이 구술자를 불러 그 친구와 지내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구술자는 학교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막 대들었다. 그 때 구술자의 집은 중앙동이었고, 그 송씨 의원 집은 다가동이었던 것 같다. 구술자는 3‧15 선거 방해 모의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지내면서 '여명동지회'를 조직하고 시내 조기청소도 하고 고아원도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게 4월혁명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4월 시위는 서울보다 하루 늦었을 게다. 구술자는 친구들과 도청 광장에 모여서 당시 도지사인 박정권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유리에다 돌 던지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위 시각은 아주 일찍도 아니고, 오후도 아니고, 10시나 11시쯤이었던 것으로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시내를 돌아다녔는지, 안 돌아다녔는지도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했다. 4월혁명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없다. 4월혁명 이후 4‧19에 대해 시화전도 하고, 시낭독회도 하고 그랬다. 시내 조기청소도 계속 했다. 4월혁명 이후에는 학교 내에서 여당 쪽 활동을 했던 교사들 퇴진 운동도 했었는데,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 교사와 교장 선생 물러나라고 농성을 했다. 구술자는 그 분들도 직업이 있고, 가족도 있는데, 학생들이 용서를 해줘야 한다고 설득을 하러 다녔다. 그래서 그렇게 무마가 되고 교장 선생만 남중학교인가, 그 쪽으로 발령을 갔다. 4월 시위를 위해 대학생과 연락을 하거나 상의를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면서 전대열 등 대학생들과 알고 지냈지만, 조직적인 연락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주고 학생들은 전북대생과 그랬는지는 몰라도 전주여고는 하지 않았다. 구술자는 4월혁명이 대학생이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도 그렇고 전주도 그렇고 전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승만 하야 후 학교 내 '여명동지회' 활동을 하면서 보육원 가서 애들 봐주고, 음식 만들어주는 등의 일을 했다. 구술자는 별다른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졸업을 한 후 대학에도 들어가지 않고, '삼남일보'라는 곳에 타이피스트로 취직을 한 후 63년도인가, 65년도까지 일하다 그냥 결혼했다. 5‧16이 있던 때도 학생들이 다시 만나자, 그런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도 없다. 친구들도 대학교에 가거나, 서울에 가 버리고, 이후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결혼 이후에는 아이들 키우고 살면서 4‧19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없다.
-
공석종공석종은 1960년도 당시 전북대 문리과대학 4학년이었으며, 주로 문리대 화학과 내에서만 활동을 했다. 1959년도 아마도 전국의 학생회 총회장을 대상으로 필리핀 관광을 시키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산된 것 같다. 김용화(당시 총학생위원장)는 4‧19 이전부터 서울지역 학생회 활동 학생들로부터 서울 상황을 전해들은 것 같다. 김용화가 서울 상황을 듣고 우리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했다. 4‧19가 일어나기 전부터 경찰이 감시하기 시작했다. 구술자는 주로 고사동 삼양다방에서 은거했다. 4‧20 전주 시위로 유치장에 갇힌 사람만 300-400명 가량 되었다. 학생들은 유치장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여, 전주 시내 빵집 세 곳을 돌아다니면서 빵을 싸게 얻어 유치장에 갇힌 학생들에게 먹이기도 했고, 노송동 형무소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설렁탕을 만들어 그 곳에 갇힌 학생들에게 먹인 기억이 있다. 시위 자금으로 총장, 부총장 판공비가 일부 들어갔고, 양계장을 하는 총무과장이 사비를 털어 도와주기도 했다. 시위 이후, 전북대에서 학생회 15명 정도 2박 3일 제주도를 보내줬는데, 구술자는 당시 제주도 가서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한 중고생 학생과 어떻게 선이 닿았는지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 시위대 조직은 이미 김용화를 학생회장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능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전주 육군병원인 98병원의 간호장교가 뒤늦게 국문과에 다녔는데, 그 여장교를 포섭하니 자연스럽게 여장교를 중심으로 학생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전주고라는 학연을 통해서도 가능했다. 김용화가 회장에 당선된 것은 1959년인데, 이미 1958년부터 서울 쪽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듯하다. 김용화 집은 부유했고 전화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4‧20 시위 당시 전북대에서 정문이 막히자 이씨왕릉 방향과 종합운동장 방향 뽕나무밭으로 빠져 나갔다. 한꺼번에 나가면 데모 나가는 것으로 아니까 몇 시 어디에서 만자자고 해놓고 두 세 사람씩 빠져 나가는 식으로 했다. 집결 장소는 처음부터 중앙성당 앞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북대에서 했었으면 아예 나올 수 없었을 거다. 모였던 인원은 처음 3, 4백명이었는데 그 이튿날부터 점점 확산되었고, 이승만이 손 들 때까지 일주일 간 시위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장소가 매번 바뀌었다. 전동성당 앞에서 집합하기도 하고, 남부시장에서 완산국민학교를 넘어가는 다리 밑에 모이기도 하고, 그래서 전동 쪽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그랬다. '내일은 어디서 모인다'는 식으로 오더를 내렸다. '내일은 풍남문에서 하자'라는 식이었다. 구술자는 앞에서 주도하지는 않았다. 첫 날 시위는 아마 10시에 시작해서 5시까지 했던 것 같다. 최루탄 그런 것은 없었고, 학생들도 돌멩이나 화염병 그런 걸 던지지는 않았다. 서울과는 달랐다. 중‧고생 쪽 회장과 만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1965년도 선배 형사 하나가 구술자와 관련된 중앙정보부 수사 기록이 있다고 그걸 갖다 줘서 황방산에서 한 장씩 한 장씩 불태워 버렸다. 요즘은 컴퓨터에 다 저장되어 있지만 당시 먹지 대고 쓴 것이어서 불태워 버리면 끝나는 거였다. 그 뒤로 활개치고 다녔다. 시위 후 일정은 따로 없었다. 김용화가 서울에서 2대악법인지 뭔지 하는 걸로 시위를 한 번 했었던 기억이 있을 뿐, 지방대학에서는 큰 것은 없었다. 당시 교수들도 욕을 하는 교수, 방관하는 교수, 도와주는 교수들 각각 있었는데, 고형곤 총장은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총장퇴진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그 이후 회장이 된 이민수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고형곤 총장 반대파 교수들이 퇴진운동을 시킨 것이다. 이후 5개 단과대가 모두 회장이 바뀌었다.4월 시위를 조직한 것은 아마도 4월 10일 이후였던 것 같다. 김주열이 시체로 발견된 후,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냐 해서 시작했으나 시발은 4월 4일이다. 3개 대학만 참가한 모임으로 출발했다. 4‧20시위를 조직한 것은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구술자는 시위 후 졸업할 때까지는 다른 활동은 전혀 안 했다. 구술자는 그 후 화학과 조교로 있다가 군대 갔다 온 후 잠시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 이리에서 교사를 했다. 그 전에 유청의 국회의원 유세를 도와주고, 교육감까지 한 김영환의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
김용화구술자 김용화의 고향은 전주시 다가동이다. 1960년 당시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4년으로, 전북대 총학생위원장이었다. 4‧19가 일어나기 전인 1959년에 광주에서 광주학생운동3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여기에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지역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마산에서의 시위와 김주열 사건이 밝혀지면서 확실하게 전국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4‧19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경찰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술자는 4월 4일에 있었던 전북대 시위를 정확히 잘 기억하지 못한다. 총장을 통해 전대열이 구속되었다는 정도만을 들었을 뿐이며, 경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4‧19 직전 학생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4월 17일 오후 5시 넘어 태화관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학생동원 준비에 들어갔다. 태화관에서 자주 학도호국단 모임을 가졌었다. 이 때 참석했던 사람들은 구술자, 공대위원장, 공대부위원장, 임동환, 공석종, 백영선, 소필영, 김용대, 김현태, 손관준, 김주석, 신호균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4‧19 당일(아마도 4‧20인 것 같음) 학교에 등교하니 휴교조치 공고문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휴교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학생들은 웅성웅성하면서 순식간에 3, 4백 명이 모여들었고,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 금암동으로 진출하였다. 금암동에서 시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경찰에 수 백 명이 잡혀갔다. 금암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나중에 경찰서에 가서 파악해보니 시민을 포함해 350명 가량이 붙잡혀 있었다. 안 붙잡힌 학생들은 철길을 통해 시내로 진입하였는데, 고등학생과 시민까지 합세해 6, 7천명은 족히 되는 듯 했다. 시민들은 당시 백도극장 앞인 시청 광장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계엄 철폐하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때 다친 사람도 꽤 되었다. 이후 구술자를 포함한 학생회 간부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경찰서에 갔다. 경찰서에 가니 붙잡힌 학생들은 밥도 못 먹은 상태였다. 전주 시내 빵집을 전부 뒤져 빵을 사서 갖다 주었고, 결국 학생들은 5시 반 쯤 풀려났다.구술자는 이미 1959년 학생운동자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서울과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연세대 총위원장인 유용철 등을 통해 서울 지역 상황을 전해 들었다. 당시 고등학생들이 많이 시위에 나왔으나 이 학생들이 따로 준비를 한 것은 아니고 이심전심으로 나온 것이다. 별도로 고등학생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이후 학내에서는 어용교수, 어용총장 퇴진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타겟이 어용총장 퇴진이었다. 구술자는 당시 총장이 부임한지 딱 3개월이 되어 업무파악도 안 된 상황에 어용학자로 모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어용총장 퇴진운동을 조직한 것은 학생회와는 관계가 없는 학생들이었다. 구술자는 뒤에서 조종했던 교수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26 하야 성명 이후에는 학생 간부들이 먼저 나서서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하여 학교정비라든지, 질서유지 등을 위해 활동을 했다. 그리고 공부에 전념했다. 7월 국회의원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4‧19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깨끗한 생각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후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 구술자는 데모가 끝난 후 얼마 안 있어 군 입대를 하였고, 이후에는 공무원 시험을 봐 상공부에서 근무를 하다가, 후에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일을 하였다. 지금 4‧19기념사업회에서 대대적으로 행사를 하는데, 전북대학교 정문에 표석을 만들어 4‧19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시켜 나가도록 할 계획으로 있다.
-
김호영구술자의 고향은 전북 김제로 부모는 농사를 지었다. 집안은 3대로 원불교 집안이다. 대학시절 전라북도 원불교 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4‧19 당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3학년으로 농과대학 학생회장이었다. 그 때 한국사회는 정의사회 구현,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시기였고, 그 때 대학을 다닌 것이다. 당시 이리는 호남의 농업의 중심지, 센터로서의 역할을 크게 하고 있었고, 이리에서의 대학 위치도 상당히 컸다. 이리는 소통의 요람지였다. 구술자는 농대 부위원장에 당선되었고, 농촌의 선구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구현에 어긋나는 부정선거를 보고, 신문에서 김주열 사건이나 고대 시위를 보면서 농대, 공대 학생 간부들과 선언문 초안을 준비했다. 지방대에 선언문 낭독한 내용이며, 농공대생 3백 명 모인 거며, 하는 내용이 《조선일보》, 《한국일보》 20일자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구술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마산학생운동 구속자 석방하라' 등의 내용으로 선언문을 구상하였고, 스크럼을 짜서 이 구호들을 외쳤다. 경찰이 기관총 배치를 하고,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렸으나 잡아가지는 않았다. 혈서 쓴 사람도 있고, 골목에서 경찰 곤봉에 맞은 이들도 있었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경찰이 더 많아졌다. 구술자는 익산 시위가 정확히 4월 19일이며 신문에는 20일에 실려 있다고 했다.당시 시위 준비라고 한다면, 통근열차가 만남의 장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희호(공대 학생)를 통근열차에 만나 대책을 거기서 이야기했다. 시위 당일 학교에서 집결해서 스크럼을 짜고 창림동으로 해서 경찰서 앞쪽으로 해서 역전으로 해서 중앙대, 원광여상을 지나면서 학생들이 이심전심으로 가담했다. 당시에는 서울의 대학생들과 연락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교수들이나 전고 연줄을 통해 정보를 듣기는 하였다. 시위에서 경찰이 과잉 진압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된 건대 학생회 간부의 아버지가 이리경찰서 손 서장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학생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이튿날은 첫날만큼이나 시위 규모가 크지 못했다. 왜냐하면 휴교령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고, 경찰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통근열차에서 만나든지, 정거장에서 만나든지 했을 텐데 학생들이 많이 나오지를 않았다. 구술자는 4‧19 시위 후 일주일여 정도 자취방에 은신하면서 상황에 대해 친구들에게 상황을 전해 들으며 그렇게 지내다, 26일 이후에 나왔다. 당시 잡혀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26일 이후부터는 성금 모금 계획을 세워, 부상자지원을 위한 성금 운동을 하였다. 모금 명칭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특히 지금 원불교 교정원장인 이혜정(당시 이름은 이혜자)이나, 이리여고, 남성여고 학생들도 열심히 모금운동을 했다. 그리고 공명선거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활동을 했고, 공명선거를 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다녔다. 그 때만 해도 여러 군데에서 이런 캠페인을 많이들 했다. 구술자는 4‧19 관련 기록 사진 등이 있으면 좋을 텐데 국회에 있을 때부터 다 찾아봤는데 그런 자료들이 없어 참 아쉽다고 했다. 군 제대 후에는 공부에 매진했고, 졸업한 뒤 농촌 지도직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 후 나중에 국회에서 일을 했다.
-
전대열전대열은 전주 중앙국민학교, 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를 마쳤다. 대구에서의 2‧28 사건, 3‧15 부정선거, 김주열 사건 등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구술자는 전주에 있는 정치과 3학년을 하나하나 찾아다녀 사람들을 모았다. 당시 방학이기도 했고 시골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편지 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이는 시간상 시위를 조직하기에는 불가능해 어쩔 수 없이 전주에 있는 친구라도 만나 시위를 모의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인 사람들이 준비한 것이 '민주선언문'이었다. 당시에는 기름종이를 놓고 그 위에 뾰족한 철필로 글씨를 쓰면 종이에 글자가 베기는 그런 방식이었다. 프린터는 전북대 교보사에서 했다. 당시 전북대 교보에 기고를 하면서 자주 들락날락거려 직원을 알고 있었다. 프린터 한 날짜가 개학 전인 4월 2, 3일 경이었을 것이다. 4월 4일 개학날 타종하는 것으로 시위 시작을 알리기로 했다. 당시에는 교정 한가운데 큰 종을 걸어놓고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을 쳤었다. 종소리가 나면 상대 앞 언덕에 모이기로 했다. 종을 치러 가던 중 구술자는 체육교수가 따라오는 것을 알았다. 사전에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경찰이 아마도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던 게 틀림없다. 낌새를 안 구술자는 순식간에 달려가 종을 친 후 상대 모임 장소로 갔다. 어느 새 7~800명이 운집했고, 구술자를 비롯한 모임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준비했던 '민주선언문'을 뿌렸다. 구술자는 거기서 일장 연설을 했다. 여기에 모인 몇 백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나아갔다. 경찰 수 백 명이 교문을 막아 놓고 서 있었다. 학생들은 돌팔매질을 하고 그랬으나 교문을 뚫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덕진역까지 나가는 조그만 후문도 봉쇄가 되어 있었다. 결국 4‧4 시위는 교내 시위로 끝을 맺었다. 경찰들은 학교로 진입해 주동자들을 연행해 갔다. 박용호, 황비룡 등 십여 명이 연행되었다. 연행 학생들은 그렇게 경찰서에서 밤을 새웠고, 고형곤 총장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하면서 학생들을 빼내 주었다. 이후 경찰이 24시간 밀착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4‧19 시위가 전주에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20일에 발생한다.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들은 전주고, 전주여고, 전주성심여고, 전주공고, 신흥고, 공고 등 고등학생들에게 연락해, 도청 앞 전주 우체국 사거리로 모이게 했다. 당시 구술자는 운동을 많이 했고, 싸움도 좀 잘 했다. 그 때 자연스럽게 유도, 검도를 배우는 후배들과 친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주고등의 주먹인 조윤옥이었다. 구술자는 조윤옥에게 ';전부 우체국 사거리로 모이도록 해라', '안 나오면 죽인다고 해라' 라고 시켰다. 고등학생들은 당시 조윤옥 말을 무서워하던 때였다. 어쨌든 시내에서는 이렇게 해서 학생들이 대거 몰려 나왔고, 전북대 덕진에서 시작한 데모대는 시내 오거리로 들어왔다. 여기서 사용한 구호는 '부정 선거 다시 하라', 그런 정도였다.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이승만 하야하라' 등의 구호가 아니었다. 이런 소리가 나왔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경찰 수 백 명은 오거리에 진을 쳐 우리들을 하나하나 잡아들였다. 경찰서에 들어갔는데 밥을 주지 않자, 구술자가 나서서 '밥을 달라' 하면서 경찰서에서 다른 형태의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전주의 제과점을 다 돌아 빵을 구해 와서 빵으로 밥을 먹었다. 그 후 데모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4‧20 이후에도 데모는 지속되었다. 4‧20 시위 이후 부상자지원 모금운동과 질서유지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학내민주화투쟁, 아마도 총장퇴진운동이 일어나자 구술자에게도 거기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해서 거기 가서 밤도 새고 그랬으나 구술자의 시각에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비용의 출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식을 한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어, 구술자는 나와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단식한다는 학생들도 알고 보니 밥을 먹고 있었다. 구술자는 이것을 교수들의 감투싸움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구술자는 학생회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부상자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민주당 집회에 자진해서 참여하기도 했다. 이듬해 구술자는 5‧16 예비검속으로 헌병대에 끌려갔고, 이후 여섯 차례의 옥살이를 해 9년 8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당시 63년 4‧19의거 공로자로 발탁이 되었으나 의거가 아닌 혁명으로 생각해 공로자 포장을 거부했다. 그 후 올해에야 훈장을 받았다.
-
채수업구술자 채수업의 고향은 이리(현재 익산)이고, 1938년생이다. 구술자는 1960년 당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4학년이었고, 농예화학과 학회장, 한국기독학생연합운동 대표로 활동을 하였다.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을 때 학생들은 3‧15 투표권을 반납하다시피 하면서 이런 식의 투표는 하지 않겠다고 해서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구술자는 당시 학생운동이라고 해서 조직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김주열 사건 이후 불만이 표출되면서 폭발했던 것 같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리에서는 농대, 공대, 이리여고, 원광대생, 원광계통여고, 중앙대 등 다 일어났다. 4‧19 이후 이슈는 어용교수퇴진운동이었는데, 구술자를 포함한 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이 별도로 교내에서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교수를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술자는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투쟁위원회가 교실 세 칸 정도 크기의 합동강당에서 소집을 하여, 발언권을 달라는 구술자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자, 구술자는 우기고 앞으로 나아가 강제로 의사봉을 부수면서, '대책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라며 교수 몰아내는 걸 중단시켰다. 당시 투쟁위원장은 김처중이었는데, 착하고 구술자와도 친한 사이였다. 4‧20 시위를 같이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 투쟁위원장이 되어 학생들을 소집하였다. 이걸 교수들이 미리 알고 구술자에게 진정을 시켜달라고 했다. 당시 투쟁위원회 활동했던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구술자가 4‧20 익산 시위를 하게 된 것은 전북대 농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을 때 가담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호영이 농대 학생회장이었다. 시위를 한 시간이 점심시간쯤으로 기억한다. 이리 농대, 공대 학생들이 몰려나오고, 시장 쪽 중앙대 학생들도 나오고, 이리역을 중심으로 모여서 성토를 했다. 처음 학교에 있다가 학생들이 나오고, 시민들도 모여 든 것이다. 공대 회장하고, 농대 회장이 모인 장소는 중앙대 부근이었는데, 거기 있다가 역으로 갔다. 처음 집회를 시작한 장소는 밖이다. 중앙대 앞에서 시작해서 역전 광장으로 간 것이다. 그 때 외친 구호는 '독재정권 물러가라', '이승만 물러가라' 등이었다. 당시 전북대 전주 캠퍼스하고 연결되어 시위를 하지는 못했고, 이후 총장퇴진운동 할 때 함께 했던 것 같다. 4월 4일 시위 얘기는 기억하지 못한다. 구술자는 과 대표이기도 했지만 기독학생운동연합을 통해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훨씬 진보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학내 학생운동보다 교회 학생운동을 많이 한 편이다. 기독학생운동에는 여고생도 많이 있었는데, 이리여고 이종금, 중앙대 출신 여학생들을 기억한다. 당시 시위 대열은 오전에 모여, 12시 정도에 광장으로 간 것 같다. 통제가 심해서 시위 시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역전에서 두세 시간 했던 것 같다. 그 후 학생 수가 많아지면서 학교에서 모임 같은 게 많이 있었을 거다. 21일에 다시 집회를 조직하거나 그런 기억은 없다. 당시 시위에서 경찰의 가혹한 진압은 없었으나 당시 순경 하면 상당히 무서워했던 시기라서 시위는 자연히 해산되었을 것이다. 경찰은 이리경찰서가 꽉 찼으니까 몇 십 명 나온 것 같다. 전주, 익산, 군산이 같은 날 동시에 일어났는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그런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김호영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다. 당시 '이에스란 프렌드쉽' 서클이 있었는데, B클래스 이상만 들어올 수 있고, 전북대에서 가장 큰 써클로, 김호영과 그 써클 친구이기도 했다. 또 농업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농우회'의 같은 회원이었다. 그 때 시위를 같이 논의한 학생들은 김호영과 농대 학생들이었다. 익산과 전주캠퍼스가 함께 연합을 한 것은 총장퇴진운동 때였는데 당시 구술자는 군중심리로 전주에 한 번 가기는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고 총장을 존경하기도 했고, 아버지와도 잘 아는 분이여서 퇴진에 앞장설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군중심리에 의해 한 번 따라갔던 것이다. 4‧20 이후 시민들이 분산되어 시위를 한 것 같다. 그 후 시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이듬 해 군대 갔다 온 제대파들과 같이 공부를 하다 5‧16 이튿날 바로 군대에 갔다. 공명선거계몽단 그런 활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억을 하고 있지 않다. 구술자는 1학년 때부터 과 대의원이랄지 하면서 대표 활동을 많이 했고, 당시 학생회에서 했던 활동으로 농촌계몽운동, 5박6일간 산외, 삼례, 칠보 등으로 계몽운동을 하러 다녔다.
-
황춘택황춘택은 4월혁명 당시 전북대 법정대학 정치학과 3학년이었다. 구술자와 주변 친구들은 해방 후 민주교육을 받은 학생으로서 3‧15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는 것에 대해 큰 분노를 느꼈다. 구술자는 4‧4 시위를 주도한 전대열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여서, 전대열이 함께 하자고 하여 하게 되었다. 4월 4일은 개학날이었다. 4월 4일 시위는 당시 대학본부 뒤편에 있던 종을 전대열이 타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북대 상대, 문리대 앞에는 종대가 크게 세워져 있었는데, 타종으로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그리고 철필로 원고를 써서 등사실에 몇 사람이 가서 인쇄를 했다. 철필로 쓰는 것은 전대열이 혼자 한 것 같다. 당시 시위 준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정치과 학생이었는데, 선배 채진묵, 그리고 동기 김해룡, 하청민, 한문수, 후배 원용인 등 모두 8명이었다. 4‧4 시위로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바로 풀려났다. 그 후부터 약 일주일 정도 경찰은 집에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철저하게 감시를 하였다. 4월 20일 시위는 전북대에서 시작해 전주 시내까지 걸어 나오면서 전개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규탄한다' 등의 그런 구호를 외치며 행동했다. 얼굴을 아는 형사가 구술자를 예의주시했지만 잡아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용기가 났다. 전대열이 중, 고등학교 학생을 어떻게 동원했는지, 학생들이 남문에서부터 도청 앞으로 해서 전북대 학생들과 오거리에서 만나 열띠게 외쳤다. 학교에서 10시쯤 출발 해 전주시내 오거리에 운집한 시간이 11시에서 12시 사이였던 것 같다. 교문이 빽빽할 정도로 우우 몰려나와 시내까지 걸어갔다. 당시 미원탑, 현재의 백제로 등 여기저기를 구호를 외치며 돌아다녔다. 시위대 인원은 칠백 명 좀 안 되었던 것 같다. 마이크 같은 것은 없었고 목청이 터져라고 외치는 것 밖에 없었다. 김주열 사건은 요즘처럼 방송이 안 나오니까 완전히 데모가 끝난 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최전권이라는 학생이 전북대 문리대를 다니다 고려대로 편입해서 갔는데, 팔에 붕대를 감고, 목에 띠를 두르고 전주 시위에 왔다. 고대 데모하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4월 이후 야당에서 전대열과 구술자를 불러 국회의원 선거운동 좀 같이 하자고 했으나, 거기까지는 못한다고 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6월쯤 어용교수퇴진을 주장하며 총장실을 점거해 총장퇴진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총장도 꼼짝을 못했다. 학생 간부와 학생들 60여 명이 전부 우르르 몰려가서 총장실 테이블을 한쪽으로 전부 밀고, 학생들이 죽 앉아있는 형태로 퇴진운동을 했다. 당시 어용교수도 있지만, 대표자인 총장만 물러가라 그랬던 것 같다. 이후 7월 초 전대열이 <공명선거계몽단>을 조직하여,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공명선거를 해야 한다는 계몽운동을 하였다. 계몽단 활동은 선거 끝나기 전 중지를 했다. 구술자는 3학년까지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후 1964년에 졸업을 한 후 교사자격증 시험을 봐 교직에 몸을 담았고, 2000년에 정년퇴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