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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종

구술자소개

구술자
공석종
면담자
이성호, 진명숙
구술일자
2010년 6월 29일
장소
전주 금암동 수라온 식당
구술시간
1시간 47분 5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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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공석종은 1960년도 당시 전북대 문리과대학 4학년이었으며, 주로 문리대 화학과 내에서만 활동을 했다. 1959년도 아마도 전국의  학생회 총회장을 대상으로 필리핀 관광을 시키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산된 것 같다. 김용화(당시 총학생위원장)는 4‧19 이전부터  서울지역 학생회 활동 학생들로부터 서울 상황을 전해들은 것 같다. 김용화가 서울 상황을 듣고 우리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했다. 4‧19가 일어나기 전부터 경찰이 감시하기 시작했다. 구술자는 주로 고사동 삼양다방에서 은거했다. 4‧20 전주  시위로 유치장에 갇힌 사람만 300-400명 가량 되었다. 학생들은 유치장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여, 전주 시내 빵집 세  곳을 돌아다니면서 빵을 싸게 얻어 유치장에 갇힌 학생들에게 먹이기도 했고, 노송동 형무소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설렁탕을 만들어 그  곳에 갇힌 학생들에게 먹인 기억이 있다. 시위 자금으로 총장, 부총장 판공비가 일부 들어갔고, 양계장을 하는 총무과장이 사비를  털어 도와주기도 했다. 시위 이후, 전북대에서 학생회 15명 정도 2박 3일 제주도를 보내줬는데, 구술자는 당시 제주도 가서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한 중고생 학생과 어떻게 선이 닿았는지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 시위대 조직은  이미 김용화를 학생회장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능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전주 육군병원인 98병원의 간호장교가 뒤늦게 국문과에  다녔는데, 그 여장교를 포섭하니 자연스럽게 여장교를 중심으로 학생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전주고라는 학연을 통해서도 가능했다.  김용화가 회장에 당선된 것은 1959년인데, 이미 1958년부터 서울 쪽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듯하다. 김용화 집은  부유했고 전화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4‧20 시위 당시 전북대에서 정문이 막히자 이씨왕릉 방향과 종합운동장 방향 뽕나무밭으로 빠져  나갔다. 한꺼번에 나가면 데모 나가는 것으로 아니까 몇 시 어디에서 만자자고 해놓고 두 세 사람씩 빠져 나가는 식으로 했다.  집결 장소는 처음부터 중앙성당 앞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북대에서 했었으면 아예 나올 수 없었을 거다. 모였던 인원은 처음 3,  4백명이었는데 그 이튿날부터 점점 확산되었고, 이승만이 손 들 때까지 일주일 간 시위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장소가 매번  바뀌었다. 전동성당 앞에서 집합하기도 하고, 남부시장에서 완산국민학교를 넘어가는 다리 밑에 모이기도 하고, 그래서 전동 쪽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고 그랬다. '내일은 어디서 모인다'는 식으로 오더를 내렸다. '내일은 풍남문에서 하자'라는 식이었다. 구술자는  앞에서 주도하지는 않았다. 첫 날 시위는 아마 10시에 시작해서 5시까지 했던 것 같다. 최루탄 그런 것은 없었고, 학생들도  돌멩이나 화염병 그런 걸 던지지는 않았다. 서울과는 달랐다. 중‧고생 쪽 회장과 만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1965년도 선배 형사  하나가 구술자와 관련된 중앙정보부 수사 기록이 있다고 그걸 갖다 줘서 황방산에서 한 장씩 한 장씩 불태워 버렸다. 요즘은  컴퓨터에 다 저장되어 있지만 당시 먹지 대고 쓴 것이어서 불태워 버리면 끝나는 거였다. 그 뒤로 활개치고 다녔다. 시위 후 일정은  따로 없었다. 김용화가 서울에서 2대악법인지 뭔지 하는 걸로 시위를 한 번 했었던 기억이 있을 뿐, 지방대학에서는 큰 것은  없었다. 당시 교수들도 욕을 하는 교수, 방관하는 교수, 도와주는 교수들 각각 있었는데, 고형곤 총장은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총장퇴진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그 이후 회장이 된 이민수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었다. 고형곤 총장 반대파 교수들이 퇴진운동을  시킨 것이다. 이후 5개 단과대가 모두 회장이 바뀌었다. 
4월 시위를 조직한 것은 아마도 4월 10일 이후였던 것 같다. 김주열이 시체로 발견된 후,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냐  해서 시작했으나 시발은 4월 4일이다. 3개 대학만 참가한 모임으로 출발했다. 4‧20시위를 조직한 것은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구술자는 시위 후 졸업할 때까지는 다른 활동은 전혀 안 했다. 구술자는 그 후 화학과 조교로 있다가 군대 갔다 온 후 잠시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 이리에서 교사를 했다. 그 전에 유청의 국회의원 유세를 도와주고, 교육감까지 한 김영환의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공석종(전북)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730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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