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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영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호영
면담자
이성호, 진명숙
구술일자
2010년 7월 3일
장소
서울 원음방송 접견실
구술시간
1시간 12분 3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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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의 고향은 전북 김제로 부모는 농사를 지었다. 집안은 3대로 원불교 집안이다. 대학시절 전라북도 원불교 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4‧19 당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3학년으로 농과대학 학생회장이었다. 그 때 한국사회는 정의사회 구현,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시기였고, 그 때 대학을 다닌 것이다. 당시 이리는 호남의 농업의 중심지, 센터로서의 역할을 크게 하고 있었고,  이리에서의 대학 위치도 상당히 컸다. 이리는 소통의 요람지였다. 구술자는 농대 부위원장에 당선되었고, 농촌의 선구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구현에 어긋나는 부정선거를 보고, 신문에서 김주열 사건이나 고대 시위를 보면서 농대, 공대 학생  간부들과 선언문 초안을 준비했다. 지방대에 선언문 낭독한 내용이며, 농공대생 3백 명 모인 거며, 하는 내용이 《조선일보》,  《한국일보》 20일자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구술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마산학생운동  구속자 석방하라' 등의 내용으로 선언문을 구상하였고, 스크럼을 짜서 이 구호들을 외쳤다. 경찰이 기관총 배치를 하고,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렸으나 잡아가지는 않았다. 혈서 쓴 사람도 있고, 골목에서 경찰 곤봉에 맞은 이들도 있었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경찰이 더  많아졌다. 구술자는 익산 시위가 정확히 4월 19일이며 신문에는 20일에 실려 있다고 했다. 
당시 시위 준비라고 한다면, 통근열차가 만남의 장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희호(공대 학생)를 통근열차에 만나 대책을 거기서  이야기했다. 시위 당일 학교에서 집결해서 스크럼을 짜고 창림동으로 해서 경찰서 앞쪽으로 해서 역전으로 해서 중앙대, 원광여상을  지나면서 학생들이 이심전심으로 가담했다. 당시에는 서울의 대학생들과 연락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교수들이나 전고 연줄을 통해  정보를 듣기는 하였다. 시위에서 경찰이 과잉 진압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된 건대 학생회 간부의 아버지가 이리경찰서 손  서장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학생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튿날은 첫날만큼이나 시위 규모가 크지 못했다. 왜냐하면 휴교령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고, 경찰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통근열차에서 만나든지, 정거장에서 만나든지 했을 텐데 학생들이 많이 나오지를 않았다. 구술자는 4‧19 시위 후  일주일여 정도 자취방에 은신하면서 상황에 대해 친구들에게 상황을 전해 들으며 그렇게 지내다, 26일 이후에 나왔다. 당시 잡혀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26일 이후부터는 성금 모금 계획을 세워, 부상자지원을 위한 성금 운동을  하였다. 모금 명칭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특히 지금 원불교 교정원장인 이혜정(당시 이름은 이혜자)이나, 이리여고,  남성여고 학생들도 열심히 모금운동을 했다. 그리고 공명선거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활동을 했고, 공명선거를 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다녔다. 그 때만 해도 여러 군데에서 이런 캠페인을 많이들 했다. 구술자는 4‧19 관련 기록 사진 등이 있으면 좋을 텐데  국회에 있을 때부터 다 찾아봤는데 그런 자료들이 없어 참 아쉽다고 했다. 군 제대 후에는 공부에 매진했고, 졸업한 뒤 농촌 지도직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 후 나중에 국회에서 일을 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호영(전북)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5911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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