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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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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전대열
면담자
전대열
구술일자
2010년 7월 5일
구술장소
서울 정치평론가협회 사무실
구술시간
2시간 20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1년 출생 1960년 당시 당시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3년으로 4‧4시위 주동 등 4월혁명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전대열은 전주 중앙국민학교, 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를 마쳤다. 대구에서의 2‧28 사건, 3‧15 부정선거,  김주열 사건 등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구술자는 전주에 있는 정치과 3학년을 하나하나 찾아다녀 사람들을 모았다.  당시 방학이기도 했고 시골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편지 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이는 시간상 시위를 조직하기에는 불가능해 어쩔 수 없이  전주에 있는 친구라도 만나 시위를 모의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인 사람들이 준비한 것이 '민주선언문'이었다. 당시에는 기름종이를  놓고 그 위에 뾰족한 철필로 글씨를 쓰면 종이에 글자가 베기는 그런 방식이었다. 프린터는 전북대 교보사에서 했다. 당시 전북대  교보에 기고를 하면서 자주 들락날락거려 직원을 알고 있었다. 프린터 한 날짜가 개학 전인 4월 2, 3일 경이었을 것이다. 4월  4일 개학날 타종하는 것으로 시위 시작을 알리기로 했다. 당시에는 교정 한가운데 큰 종을 걸어놓고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을  쳤었다. 종소리가 나면 상대 앞 언덕에 모이기로 했다. 종을 치러 가던 중 구술자는 체육교수가 따라오는 것을 알았다. 사전에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경찰이 아마도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던 게 틀림없다. 낌새를 안 구술자는 순식간에 달려가 종을 친 후 상대  모임 장소로 갔다. 어느 새 7~800명이 운집했고, 구술자를 비롯한 모임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준비했던 '민주선언문'을 뿌렸다.  구술자는 거기서 일장 연설을 했다. 여기에 모인 몇 백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향해 나아갔다. 경찰 수 백 명이  교문을 막아 놓고 서 있었다. 학생들은 돌팔매질을 하고 그랬으나 교문을 뚫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덕진역까지 나가는 조그만 후문도  봉쇄가 되어 있었다. 결국 4‧4 시위는 교내 시위로 끝을 맺었다. 경찰들은 학교로 진입해 주동자들을 연행해 갔다. 박용호,  황비룡 등 십여 명이 연행되었다. 연행 학생들은 그렇게 경찰서에서 밤을 새웠고, 고형곤 총장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하면서  학생들을 빼내 주었다. 이후 경찰이 24시간 밀착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다른 곳에서 일어났던 4‧19 시위가 전주에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20일에 발생한다. 구술자를 비롯한 학생들은 전주고, 전주여고, 전주성심여고, 전주공고, 신흥고, 공고 등  고등학생들에게 연락해, 도청 앞 전주 우체국 사거리로 모이게 했다. 당시 구술자는 운동을 많이 했고, 싸움도 좀 잘 했다. 그 때  자연스럽게 유도, 검도를 배우는 후배들과 친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주고등의 주먹인 조윤옥이었다. 구술자는 조윤옥에게 ';전부  우체국 사거리로 모이도록 해라', '안 나오면 죽인다고 해라' 라고 시켰다. 고등학생들은 당시 조윤옥 말을 무서워하던 때였다.  어쨌든 시내에서는 이렇게 해서 학생들이 대거 몰려 나왔고, 전북대 덕진에서 시작한 데모대는 시내 오거리로 들어왔다. 여기서  사용한 구호는 '부정 선거 다시 하라', 그런 정도였다.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이승만 하야하라' 등의 구호가 아니었다.  이런 소리가 나왔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경찰 수 백 명은 오거리에 진을 쳐 우리들을 하나하나 잡아들였다. 경찰서에 들어갔는데  밥을 주지 않자, 구술자가 나서서 '밥을 달라' 하면서 경찰서에서 다른 형태의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전주의 제과점을 다  돌아 빵을 구해 와서 빵으로 밥을 먹었다. 그 후 데모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4‧20 이후에도 데모는  지속되었다. 4‧20 시위 이후 부상자지원 모금운동과 질서유지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학내민주화투쟁, 아마도 총장퇴진운동이  일어나자 구술자에게도 거기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해서 거기 가서 밤도 새고 그랬으나 구술자의 시각에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비용의 출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식을 한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어, 구술자는 나와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단식한다는 학생들도 알고 보니 밥을 먹고 있었다. 구술자는 이것을 교수들의 감투싸움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구술자는 학생회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부상자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민주당 집회에 자진해서 참여하기도 했다. 이듬해  구술자는 5‧16 예비검속으로 헌병대에 끌려갔고, 이후 여섯 차례의 옥살이를 해 9년 8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당시 63년  4‧19의거 공로자로 발탁이 되었으나 의거가 아닌 혁명으로 생각해 공로자 포장을 거부했다. 그 후 올해에야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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