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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업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채수업
- 면담자
- 이성호, 진명숙
- 구술일자
- 2010년 7월 1일
- 구술장소
- 전주 진북동 거성고속맨션 노인정
- 구술시간
- 1시간 16분 34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38년 출생 1960년 당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4학년으로 4월 20일 이리(익산) 시위 등 4월혁명 시위 참여
- 구술내용 요약
-
구술자 채수업의 고향은 이리(현재 익산)이고, 1938년생이다. 구술자는 1960년 당시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4학년이었고, 농예화학과 학회장, 한국기독학생연합운동 대표로 활동을 하였다.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을 때 학생들은 3‧15 투표권을 반납하다시피 하면서 이런 식의 투표는 하지 않겠다고 해서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구술자는 당시 학생운동이라고 해서 조직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김주열 사건 이후 불만이 표출되면서 폭발했던 것 같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리에서는 농대, 공대, 이리여고, 원광대생, 원광계통여고, 중앙대 등 다 일어났다. 4‧19 이후 이슈는 어용교수퇴진운동이었는데, 구술자를 포함한 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이 별도로 교내에서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교수를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술자는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투쟁위원회가 교실 세 칸 정도 크기의 합동강당에서 소집을 하여, 발언권을 달라는 구술자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자, 구술자는 우기고 앞으로 나아가 강제로 의사봉을 부수면서, '대책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라며 교수 몰아내는 걸 중단시켰다. 당시 투쟁위원장은 김처중이었는데, 착하고 구술자와도 친한 사이였다. 4‧20 시위를 같이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날 투쟁위원장이 되어 학생들을 소집하였다. 이걸 교수들이 미리 알고 구술자에게 진정을 시켜달라고 했다. 당시 투쟁위원회 활동했던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구술자가 4‧20 익산 시위를 하게 된 것은 전북대 농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을 때 가담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호영이 농대 학생회장이었다. 시위를 한 시간이 점심시간쯤으로 기억한다. 이리 농대, 공대 학생들이 몰려나오고, 시장 쪽 중앙대 학생들도 나오고, 이리역을 중심으로 모여서 성토를 했다. 처음 학교에 있다가 학생들이 나오고, 시민들도 모여 든 것이다. 공대 회장하고, 농대 회장이 모인 장소는 중앙대 부근이었는데, 거기 있다가 역으로 갔다. 처음 집회를 시작한 장소는 밖이다. 중앙대 앞에서 시작해서 역전 광장으로 간 것이다. 그 때 외친 구호는 '독재정권 물러가라', '이승만 물러가라' 등이었다. 당시 전북대 전주 캠퍼스하고 연결되어 시위를 하지는 못했고, 이후 총장퇴진운동 할 때 함께 했던 것 같다. 4월 4일 시위 얘기는 기억하지 못한다. 구술자는 과 대표이기도 했지만 기독학생운동연합을 통해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훨씬 진보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학내 학생운동보다 교회 학생운동을 많이 한 편이다. 기독학생운동에는 여고생도 많이 있었는데, 이리여고 이종금, 중앙대 출신 여학생들을 기억한다. 당시 시위 대열은 오전에 모여, 12시 정도에 광장으로 간 것 같다. 통제가 심해서 시위 시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역전에서 두세 시간 했던 것 같다. 그 후 학생 수가 많아지면서 학교에서 모임 같은 게 많이 있었을 거다. 21일에 다시 집회를 조직하거나 그런 기억은 없다. 당시 시위에서 경찰의 가혹한 진압은 없었으나 당시 순경 하면 상당히 무서워했던 시기라서 시위는 자연히 해산되었을 것이다. 경찰은 이리경찰서가 꽉 찼으니까 몇 십 명 나온 것 같다. 전주, 익산, 군산이 같은 날 동시에 일어났는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그런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김호영과는 아주 절친한 사이다. 당시 '이에스란 프렌드쉽' 서클이 있었는데, B클래스 이상만 들어올 수 있고, 전북대에서 가장 큰 써클로, 김호영과 그 써클 친구이기도 했다. 또 농업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농우회'의 같은 회원이었다. 그 때 시위를 같이 논의한 학생들은 김호영과 농대 학생들이었다. 익산과 전주캠퍼스가 함께 연합을 한 것은 총장퇴진운동 때였는데 당시 구술자는 군중심리로 전주에 한 번 가기는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고 총장을 존경하기도 했고, 아버지와도 잘 아는 분이여서 퇴진에 앞장설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군중심리에 의해 한 번 따라갔던 것이다. 4‧20 이후 시민들이 분산되어 시위를 한 것 같다. 그 후 시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이듬 해 군대 갔다 온 제대파들과 같이 공부를 하다 5‧16 이튿날 바로 군대에 갔다. 공명선거계몽단 그런 활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억을 하고 있지 않다. 구술자는 1학년 때부터 과 대의원이랄지 하면서 대표 활동을 많이 했고, 당시 학생회에서 했던 활동으로 농촌계몽운동, 5박6일간 산외, 삼례, 칠보 등으로 계몽운동을 하러 다녔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채수업(전북)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2917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