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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춘택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황춘택
- 면담자
- 이성호, 진명숙
- 구술일자
- 2010년 6월 23일
- 구술장소
- 전주 인후동 자택
- 구술시간
- 1시간 20분 56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39년 출생 1960년 당시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3년으로 4‧4시위 주동 등 4월혁명 시위 참여
- 구술내용 요약
-
황춘택은 4월혁명 당시 전북대 법정대학 정치학과 3학년이었다. 구술자와 주변 친구들은 해방 후 민주교육을 받은 학생으로서 3‧15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지는 것에 대해 큰 분노를 느꼈다. 구술자는 4‧4 시위를 주도한 전대열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여서, 전대열이 함께 하자고 하여 하게 되었다. 4월 4일은 개학날이었다. 4월 4일 시위는 당시 대학본부 뒤편에 있던 종을 전대열이 타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북대 상대, 문리대 앞에는 종대가 크게 세워져 있었는데, 타종으로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그리고 철필로 원고를 써서 등사실에 몇 사람이 가서 인쇄를 했다. 철필로 쓰는 것은 전대열이 혼자 한 것 같다. 당시 시위 준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정치과 학생이었는데, 선배 채진묵, 그리고 동기 김해룡, 하청민, 한문수, 후배 원용인 등 모두 8명이었다. 4‧4 시위로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바로 풀려났다. 그 후부터 약 일주일 정도 경찰은 집에서 함께 생활할 정도로 철저하게 감시를 하였다. 4월 20일 시위는 전북대에서 시작해 전주 시내까지 걸어 나오면서 전개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규탄한다' 등의 그런 구호를 외치며 행동했다. 얼굴을 아는 형사가 구술자를 예의주시했지만 잡아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용기가 났다. 전대열이 중, 고등학교 학생을 어떻게 동원했는지, 학생들이 남문에서부터 도청 앞으로 해서 전북대 학생들과 오거리에서 만나 열띠게 외쳤다. 학교에서 10시쯤 출발 해 전주시내 오거리에 운집한 시간이 11시에서 12시 사이였던 것 같다. 교문이 빽빽할 정도로 우우 몰려나와 시내까지 걸어갔다. 당시 미원탑, 현재의 백제로 등 여기저기를 구호를 외치며 돌아다녔다. 시위대 인원은 칠백 명 좀 안 되었던 것 같다. 마이크 같은 것은 없었고 목청이 터져라고 외치는 것 밖에 없었다. 김주열 사건은 요즘처럼 방송이 안 나오니까 완전히 데모가 끝난 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최전권이라는 학생이 전북대 문리대를 다니다 고려대로 편입해서 갔는데, 팔에 붕대를 감고, 목에 띠를 두르고 전주 시위에 왔다. 고대 데모하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4월 이후 야당에서 전대열과 구술자를 불러 국회의원 선거운동 좀 같이 하자고 했으나, 거기까지는 못한다고 하며 거절했다. 그리고 6월쯤 어용교수퇴진을 주장하며 총장실을 점거해 총장퇴진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총장도 꼼짝을 못했다. 학생 간부와 학생들 60여 명이 전부 우르르 몰려가서 총장실 테이블을 한쪽으로 전부 밀고, 학생들이 죽 앉아있는 형태로 퇴진운동을 했다. 당시 어용교수도 있지만, 대표자인 총장만 물러가라 그랬던 것 같다. 이후 7월 초 전대열이 <공명선거계몽단>을 조직하여,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공명선거를 해야 한다는 계몽운동을 하였다. 계몽단 활동은 선거 끝나기 전 중지를 했다. 구술자는 3학년까지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후 1964년에 졸업을 한 후 교사자격증 시험을 봐 교직에 몸을 담았고, 2000년에 정년퇴직하였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황춘택(전북)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3033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