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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화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용화
면담자
이성호, 진명숙
구술일자
2010년 7월 3일
장소
서울 원음방송 접견실
구술시간
1시간 19분 12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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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김용화의 고향은 전주시 다가동이다. 1960년 당시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4년으로, 전북대 총학생위원장이었다. 4‧19가  일어나기 전인 1959년에 광주에서 광주학생운동3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여기에 전국 대학생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지역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마산에서의 시위와 김주열 사건이 밝혀지면서 확실하게 전국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4‧19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경찰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술자는 4월 4일에 있었던 전북대 시위를 정확히 잘 기억하지 못한다. 총장을 통해 전대열이 구속되었다는 정도만을 들었을 뿐이며,  경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4‧19 직전 학생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다. 4월 17일 오후 5시 넘어 태화관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학생동원 준비에 들어갔다. 태화관에서 자주 학도호국단 모임을 가졌었다. 이 때 참석했던 사람들은 구술자, 공대위원장,  공대부위원장, 임동환, 공석종, 백영선, 소필영, 김용대, 김현태, 손관준, 김주석, 신호균 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4‧19 당일(아마도 4‧20인 것 같음) 학교에 등교하니 휴교조치 공고문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휴교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학생들은 웅성웅성하면서 순식간에 3, 4백 명이 모여들었고,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 금암동으로 진출하였다. 금암동에서 시내로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경찰에 수 백 명이 잡혀갔다. 금암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있었다. 나중에 경찰서에 가서 파악해보니 시민을  포함해 350명 가량이 붙잡혀 있었다. 안 붙잡힌 학생들은 철길을 통해 시내로 진입하였는데, 고등학생과 시민까지 합세해 6,  7천명은 족히 되는 듯 했다. 시민들은 당시 백도극장 앞인 시청 광장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계엄 철폐하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 때 다친 사람도 꽤 되었다. 이후 구술자를 포함한 학생회 간부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경찰서에 갔다. 경찰서에 가니 붙잡힌 학생들은 밥도 못 먹은 상태였다. 전주 시내 빵집을 전부  뒤져 빵을 사서 갖다 주었고, 결국 학생들은 5시 반 쯤 풀려났다.
구술자는 이미 1959년 학생운동자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서울과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연세대 총위원장인 유용철 등을 통해 서울  지역 상황을 전해 들었다. 당시 고등학생들이 많이 시위에 나왔으나 이 학생들이 따로 준비를 한 것은 아니고 이심전심으로 나온  것이다. 별도로 고등학생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이후 학내에서는 어용교수, 어용총장 퇴진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타겟이 어용총장  퇴진이었다. 구술자는 당시 총장이 부임한지 딱 3개월이 되어 업무파악도 안 된 상황에 어용학자로 모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어용총장 퇴진운동을 조직한 것은 학생회와는 관계가 없는 학생들이었다. 구술자는 뒤에서 조종했던 교수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26 하야 성명 이후에는 학생 간부들이 먼저 나서서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하여 학교정비라든지, 질서유지 등을 위해 활동을  했다. 그리고 공부에 전념했다. 7월 국회의원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4‧19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깨끗한 생각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후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 구술자는 데모가 끝난 후 얼마 안 있어 군 입대를 하였고, 이후에는 공무원 시험을 봐  상공부에서 근무를 하다가, 후에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일을 하였다. 지금 4‧19기념사업회에서 대대적으로 행사를 하는데,  전북대학교 정문에 표석을 만들어 4‧19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시켜 나가도록 할 계획으로 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용화(전북)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092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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