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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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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강혜자
면담자
이성호
구술일자
2010년 8월 19일
구술장소
전주 진북동 거성고속맨션 노인정
구술시간
42분 27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전북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1년 출생 1960년 당시 전주여자고등학교 학생으로 4월혁명 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강혜자의 고향은 충북 음성이다. 아버지가 석산 일로 전주로 이사를 오면서 전주에서 전주여고를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당시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거울』이라는 학교 교지를 만드는데 일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학교 대표로 배구 선수 활동도 했다.  4월혁명이 있던 시기에 구술자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3‧15 부정선거가 있기 하루, 이틀 전에 민주당에서 한창 운동을 하고  계시던 의원의 아들 집에 모여 선거함을 때려 부수자는 모의를 했다. 당시 모의를 같이 했던 학교들은 신흥고, 전주공고, 전주고,  전주여고, 사범학교 등 20명쯤 되었던 것 같은데, 전주고생이 네댓 명으로 제일 많았고, 전주여고는 구술자와 다른 한 친구 두  명이 참여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신발을 커다란 가마솥에 집어넣었지만, 결국 어떻게 된 일인지 발각이 되어 14일 밤 집에서 경찰  백차에 실려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서에 갔더니 잡혀간 학생이 굉장히 많았다. 경찰서에서 계속 문초를 당했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학생은 맞지 않았지만 남학생은 맞기도 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나온 후에는 교장 선생님 댁에 감금되어 4, 5일 정도를  보냈다. 구술자는 어떻게 하여 의원 아들 집에 모이게 되었는지, 누구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그런 것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아들이 송(광우)씨였던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구술자와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장면 박사와 친분이 있는 분  딸이었는데, 하루는 선생이 구술자를 불러 그 친구와 지내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구술자는 학교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막  대들었다. 그 때 구술자의 집은 중앙동이었고, 그 송씨 의원 집은 다가동이었던 것 같다. 구술자는 3‧15 선거 방해 모의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지내면서 '여명동지회'를 조직하고 시내 조기청소도 하고 고아원도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게 4월혁명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4월 시위는 서울보다 하루  늦었을 게다. 구술자는 친구들과 도청 광장에 모여서 당시 도지사인 박정권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유리에다 돌 던지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위 시각은 아주 일찍도 아니고, 오후도 아니고, 10시나 11시쯤이었던 것으로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시내를 돌아다녔는지, 안 돌아다녔는지도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했다. 4월혁명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없다. 4월혁명 이후  4‧19에 대해 시화전도 하고, 시낭독회도 하고 그랬다. 시내 조기청소도 계속 했다. 4월혁명 이후에는 학교 내에서 여당 쪽  활동을 했던 교사들 퇴진 운동도 했었는데,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 교사와 교장 선생 물러나라고 농성을 했다. 구술자는 그 분들도  직업이 있고, 가족도 있는데, 학생들이 용서를 해줘야 한다고 설득을 하러 다녔다. 그래서 그렇게 무마가 되고 교장 선생만  남중학교인가, 그 쪽으로 발령을 갔다. 4월 시위를 위해 대학생과 연락을 하거나 상의를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면서  전대열 등 대학생들과 알고 지냈지만, 조직적인 연락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주고 학생들은 전북대생과 그랬는지는 몰라도  전주여고는 하지 않았다. 구술자는 4월혁명이 대학생이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도 그렇고 전주도 그렇고 전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승만 하야 후 학교 내 '여명동지회' 활동을 하면서 보육원 가서 애들 봐주고,  음식 만들어주는 등의 일을 했다. 구술자는 별다른 정치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졸업을 한 후 대학에도 들어가지 않고, '삼남일보'라는 곳에 타이피스트로 취직을 한 후 63년도인가, 65년도까지 일하다 그냥 결혼했다. 5‧16이 있던 때도 학생들이  다시 만나자, 그런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도 없다. 친구들도 대학교에 가거나, 서울에 가 버리고, 이후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결혼 이후에는 아이들 키우고 살면서 4‧19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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