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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컬렉션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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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석교양과정부에서의 대학생활, 10·2시위 당일 날 시위의 구체적인 과정, 무역협회에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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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택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사건, 당시 시위의 주동자로서 당시 학내 상황에 대한 진단과, 시위 동기, 계획과 결행 과정 전반에 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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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택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사건, 당시 시위의 핵심활동가로서 학내상황에 대한 진단, 시위 동기, 계획과 결행 과정 전반에 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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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배경과 초기 활동, '한국사회연구회' 가입과 활동, 심포지움 준비 및 사건 당시상황, 사회학과 백서 사건, 부산지역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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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어린 시절의 추억, 부고 선배를 통한 한사와의 인연, 훈련과정과 학회장 활동, 76년 데모 중단의 두가지 이유, 송추 모임의 성격과 구속 경위, 유인물 작업과 학교 정리의 미션, 무등산 모임, 감옥 생활과 재판투쟁, 소내 투쟁 그리고 요양과 현장준비, 노운협 활동과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문제 원인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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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식1970년대 초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환모색(1971년, 1973년), 1973년 유신반대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논쟁, 10·2시위로 가는 과정과 그것이 민주화운동사, 서울대 학생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학내 써클의 동향, 사회과학연구 써클의 독서경향, 기독교 세력을 울타리로 한 학생운동, 김대중 납치사건이 민주화운동, 서울대 학생운동에 끼친 영향, 주요 써클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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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식, 이종구, 문국주1973년 대학이 처한 정치현실, 학생운동의 활로 모색을 위해 기독교쪽(학생사회개발단, KSCF, 제일교회, 창현교회 등)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10·2시위사건을 둘러싼 내부의 논쟁, 준비과정, 이후 사회생활의 어려움과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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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훈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사건, 당시 시위의 핵심참여자로서 당시 학내 상황에 대한 진단과, 시위 동기, 계획과 결행 과정 전반에 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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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운어린시절과 동아일보, 부고시절, 한사의 훈련과정, 73년 데모와 김병곤의 연합시위 계획 그리고 유인물 공장, 민청학련 사건 후 2학년 때 잡혀 석달 간 쓰라린 체험과 복학, 75년 긴조9호와 연이은 522데모 그리고 싹쓸이, 이후 2년간 재생산에 주력, 송추 모임의 성격, 데모 중단의 이유, 두사건의 선후, 이범영의 제안과 구체적인 시위 준비 과정, 구체적인 시위진행과정과 아사히신문 보도, 중정의 이진봉, 시위 전술의 변화, 외부의 도움과 조사 과정의 고민, 운동의 발전상과 고대 설훈, 서울대 언더 써클 상황과 한사, 고교 후배 스카웃과 학회의 이중구조, 애플의 유래와 농법의 성장, 경법의 성장과 서클 상황 평가, 박정희 죽음에 대한 평가, 이범영에 대한 회고, 긴조시대 운동가의 특징, 이범영이 공개운동으로 간 이유, 훈련장이 된 법정과 난무하는 유비통신, 단식투쟁, 강제급식, 인권주간 샤우팅, 부식 투쟁과 방성구, 소내 투쟁, 신동수선배의 역할과 카터의 영향, 이간질, 병대위, 병무청의 강제징집 시도, 은신, 박정희 죽음과 운동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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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가족과 어린시절, 4.19를 겪은 경복중고 시절과 재수, 서울대 인류학과 입학, 문리대 학생회 활동과 종교사회과학연구회 활동, KSCF 초대회장, 학사단 운동, 그리고 군대와 민청학련 관련, 인류학 어시스턴트, 선교비 횡령사건 그리고 김재명 요청으로 준 구국성명서, 전남대유인물이 구속사유, 소내 투쟁과 처벌, 기독학생회 부장이 되 불가피하게 겪은 명동위장결혼사건과 보안사 고문, 미국 유학과 성수동 현장생활, 그리고 인천사랑방교회, 매포 노동자대회의 비극과 정파대결로 인한 인천산선과 인천민교련의 대립, 다시 시작한 기독학생회운동과 오해산 보수와의 만남, 77년 사건의 회고, 박형규 목사 자료집 만든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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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렬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배경과 초기 활동, ‘흥사단아카데미’ 가입과 활동, 심포지움 사건 당시 26동 강의실 상황, 감옥에서의 경험과 출소 이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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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구술자는 1948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 때 대구사범을 다녔고 독서회사건으로 구속된 적도 있었으나 해방 후에는 농사를 지었다. 익산이 이후 충남 논산으로 바뀌면서 논산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강경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이후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구술자는 1967년에 서울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구술자는 문리대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학생운동서클에도 여럿 참여하였다.1969년에는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했고, 3과폐합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제적되었다. 그 직후 징집되어 군대로 갔다. 제대 후 복학했는데 1973년 10·2시위를 겪으면서 전국적 학생시위를 조직할 구상을 하면서 이철, 유인태, 나병식 등과 의논했다. 구술자는 원주에 가서 김지하를 만나기도 하고 장준하 선생을 만나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국 단위의 학생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은 서울대 내에서는 문리대, 법대, 상대를, 서울지역에서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전국에서는 서울, 대구, 광주를 축으로 하는 이른바 3·3·3제로 조직했다. 그리고 1974년 3월 7일에 회합을 갖고 이철이 책임자가 되고 유인태, 나병식, 구술자 등은 제2선으로 후퇴하여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앞서 시도한 경북대, 연세대 등의 시위가 잇달아 실패했고 최종적으로 4월 3일에 동시다발적 시위를 결정하였으나 3월 28일경 체포되었다. 결국 체포되어 모진 취조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을 반국가적 폭력혁명으로 몰았고 인혁당 재건위를 배후조종세력으로 조작하였다. 군사재판에서 구술자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1975년 2월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어려움을 겪다가 처가 쪽의 도움으로『신동아』기자로 취업하게 되었다. 10·26사건이 나면서 1980년 봄에 복학하였으나 5·17쿠데타가 나면서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구속은 면하고 방면되어 다시 동아일보에 복직하였다. 이후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위원, 『역사비평』 주간을 맡아 활동했다. 6월항쟁 이후 1987년 대선 국면에서 후보단일화의 실패에는 김대중 씨의 책임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연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한국 최초로 현대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