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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컬렉션
서울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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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운근황, 출생과 성장, 한사회 활동과 12.8시위로 복역, 출소 후 병역 문제로 다시 도피 생활, 이수성 학생처장 담판으로 병역 문제 풀리면서 복학 분위기, 학생운동 관여는 타대학과 네트워크 지원하는 정도, 복학생과 재학생 입장 차이 불거져 연석회의 주선,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가두투쟁 돌입, 광주 고립 한스러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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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국어릴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행적에 반감이 많았다.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청와대를 폭격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해 계명대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내 토론서클 유토피아에 들어가 2학년 때 회장을 맡아 3선개헌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인연으로 정화영, 임구호, 이강철 등 대구 활동가들과 알게 됐고,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일도 겪었다. 석방 후 홍정회를 결성해 김영삼, 김종필과 김대중 대리로 정일형을 초청해 토론회를 개최한 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래서 학생들 돈을 모아 ‘동학전’이라는 학사주점을 열어 1년간 운영했는데, 그곳이 대구 운동권의 아지트가 됐다. 진량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하면서도 유토피아와 홍정회 활동을 유지하다가 1976년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반공법 및 긴급조치 위반으로 후배 5명과 함께 구속됐다. 대구교도소에서 윤한봉, 최열, 강기종, 김용석 등과 교류하고, 출소 후 윤한봉, 최열, 김용석, 조성우, 강기종, 장영달, 이해찬 등과 전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활동했다. 1980년 4월 모임에서는 윤한봉으로부터 군부가 광주에서 유열사태를 만들 조짐이 보이니 대구가 꼭 도와주어야 한다는 요청을 받은 바도 있다. 취업이 제한돼 유신학원 영어 강사를 하면서 계명대 1980년 봄 상황에 관계했고, 부산 중부교회 최성묵 목사의 주선으로 김대중과도 면담했다. 그로 인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돼 혹독한 조사와 고초를 겪었다. 대구미문화원폭파사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내가 어머니를 독살했다는 모함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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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륜근황 및 배경, 3.31시위 주동 내막, 긴급조치7호 전후, 강제징집된 사연, 10.26사태 후 학원자율화 국면에서의 역할, 총학생회장 선거 출마 과정, 대학 간 연대 상황, 서울역 시위, 서울역 회군, 5.17계엄확대조치 후 행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조사, 서울항쟁 실패의 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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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수근황 및 배경, 기독학생회(SCA) 활동, 1977년 10.25시위 전말과 연루 이유, 복역 중 겪은 일과 소내투쟁, 복학추진위원회 총무를 맡은 까닭, 박광호 총학생회장 체제 출범 과정, 연세대 5.13야간가두시위 결정 내막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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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표1973년 중앙대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10.2데모 후 교양학부가 중심이 되어 유신반대데모를 하는 데 참여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 후 명동 대성빌딩 등의 강연회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며 사회의식을 갖게 되었다. 학과 친구가 반공 서클을 만들면서 지도교수 명의를 도용한 사건을 중재하다 민족사상연구회라는 이념 성향의 서클을 만들어서 활동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 후 《시론정보》라는 지하신문을 발행하려다 구속된 것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석방 후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섭외담당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다 1979년 11월 YWCA위장결혼식사건에 참여하였고, 사건 당일 도피에 성공해 28, 39, 30일 후속 시위를 도모하였다. 그 뒤 1980년 준비 모임을 계속하면서 중앙대 서울의 봄 시위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하였다. 복학생 9인을 중심으로 교내 집회, 시위의 이슈를 정치문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백남기가 부회장으로 참여하는 총학생회를 구성하고 복교생 주도로 단식농성, 교내 횃불시위 등을 통해 분위기를 고양시켰으며, 5월 14일 백남기가 마련한 상여를 송기원이 이끌고 서울역까지 진출해 유신잔당장례식을 거행하였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가 철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민청협 차원에서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서울역 회군 후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향후 행동을 고민하였다. 계엄확대 조치를 예견하고 그런 의견을 회의장에 전달하려 했으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계엄확대 후 광주에서 올라온 유인물과 광주의 상황을 전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1980년 6월 검거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공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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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동1977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하여 부산고 선배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한사’로 불리는 사회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78년 여름 한사를 대표해 11개 학회가 참여하는 지하조직인 연합언더의 일원이 되었다. 학생운동 전체 운영은 76학번 이원주가, 77학번의 중심 역할은 최영선, 현무환이 한 것으로 기억한다. 1978년 10.17광화문연합시위 직전 대대적 검거 때와 10.26사태 직전 남민전 관련자 검거 때 각각 연행된 적 있었지만 곧 풀려나왔다. 이원주, 최영선, 현무환 등과 총학생회 부활 작업에 참여했고, 총학생회장 후보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학점 미달로 출마 자격이 안 돼 심재철에게 바통이 넘어갔고, 대의원이 뽑는 간접선거를 통해 무난히 당선되었다. 이원주, 최영선, 현무환이 언더지도부로 존재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공식지도부로 구성된 가운데 1980년 봄을 맞이한 것이다. 학생운동의 핵심 방향은 신군부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학원자율화 등 학내 이슈를 계엄 철폐, 헌법 개정 등 정치적 이슈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군부에 정국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고 불필요하게 학생운동 역량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분간 가두투쟁을 자제한다는 것이 서울대 학생운동 내부와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에서 합의된 방침이었다. 학기 초에 서울대 복학생과 재학생 지도부 간의 갈등은 복학생 그룹 내 세대 간(이를테면 김병곤 그룹과 이해찬 그룹) 의견 차에서 비롯된 것이고, 박성현·김부겸의 명연설로 신입생 병영집체훈련 참가를 설득한 5.2아크로폴리스집회 후 복학생 주도의 철야농성을 계기로 해소되었다. 5월 13일 연세대의 가두진출 후 고려대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회의에서 다른 대학의 가두진출을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였다. 5.15시위 때 각 대학이 서울역으로 모인 것은 충돌을 가급적 피하면서 최대한 군중 동원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집결지로 사전에 통보한 결과였다. 서울역 회군 때 해산하자는 것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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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선근황, 출생과 성장, 국경회 가입, 시위 가담, 서클연합회(언더지도부), 학생회 부활 작업, 서울의 봄, 무림사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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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순이화여대에 입학해 흥사단아카데미(아카데미) 회원 모집 벽보를 보고 입회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몸담게 되었다. 당시 사회과학에 굉장히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서클 공부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였다. 아카데미를 비롯해 새얼, 파워, 황토, 기독학생회 등 5대 서클이 이화여대 학생운동의 주력이었다. 이들과 네트워크 형성하고 학외 아카데미 모임에도 참여하였다. 학외여대생연합모임도 만들어 교유하였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발동 후 명동가톨릭학생사건, 동아돕기손수건판매사건, 수도여사대 시위미수사건, 새벽지사건, 김지하 양심선언문 배포사건 등에 이대생이 자주 연루되었다. 1977년 4월 검은리본사건부터는 직접 연루되어 수배되기도 하였다. 그해 10월 이정임 주도로 농성사태가 일어나고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1978년 4학년이 되어 이화여대 학생운동을 책임지는 상황이 되었다. 3차에 걸친 시위 계획을 세웠다. 4월 14일 1차 시위에서는 ‘8천 이화인에게’ 유인물 배포 건으로 김안나가 구속되었다. 2차 시위는 5월 4일 사범대학 축제 ‘벗님네와’ 행사 중에 유인물 살포와 함께 이루어졌다. 박인혜, 한경희, 오현주 등이 구속되었다. 3차 시위는 내가 전면에 나섰다. 5월 9일 대강당 채플에서 선언문 낭독 뒤 시위를 선동하였다. 학보사 기자의 도움으로 옷을 바꿔 입고 도피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오빠의 강권으로 2주 후 자수하여 구속되었다. 출소해서는 동아투위 임채정 선배가 하는 출판사 예조각에 다니면서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활동에 참가하였다. YWCA위장결혼식 집회 논의를 함께 했으며 1980년대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협의회의 일원으로 정국 대처 방안과 소속 대학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총학생회, 서클연합회 등의 구성에 관여하는 등 학내 활동에도 깊이 개입하는 상황이 되었다. 5월 초 5000여 명이 학생식당에서 1박2일 농성하는 자리에 갔다가 연단에 나가 짧은 발언 후 ‘백치 아다다’를 부르기도 하였다. 5월 13일 연세대의 가두진출 후 전 대학이 가두로 나선 것은 준비되지 않은 행동이라 이미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서울역 회군은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