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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동
사업개요
- 서울의 봄과 학생운동
- 18년 5개월 10일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던 중,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격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때까지의 과도기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차 연도에서는 이 시기의 주요 사건인 ⑴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11.24.), ⑵서울역 회군(1980.05.15.)까지의 학생운동, ⑶사북항쟁(1980.04.21.~24.)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을 수행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홍동
- 면담자
- 신동호
- 구술일자
- 2018. 8. 14
- 구술장소
-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 구술시간
- 132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서울의봄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85~1988 서울신문
1988~2011 한겨레신문
2011~2014 경기도교육청 대변인
2014~ 오산시 공무원
1974~1977 부산고등학교
1977~1985 서울대 정치학과
1996~1997 일리노이대 경영대 MSBA
- 구술내용 요약
-
1977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하여 부산고 선배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한사’로 불리는 사회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978년 여름 한사를 대표해 11개 학회가 참여하는 지하조직인 연합언더의 일원이 되었다. 학생운동 전체 운영은 76학번 이원주가, 77학번의 중심 역할은 최영선, 현무환이 한 것으로 기억한다. 1978년 10.17광화문연합시위 직전 대대적 검거 때와 10.26사태 직전 남민전 관련자 검거 때 각각 연행된 적 있었지만 곧 풀려나왔다. 이원주, 최영선, 현무환 등과 총학생회 부활 작업에 참여했고, 총학생회장 후보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학점 미달로 출마 자격이 안 돼 심재철에게 바통이 넘어갔고, 대의원이 뽑는 간접선거를 통해 무난히 당선되었다. 이원주, 최영선, 현무환이 언더지도부로 존재하고 총학생회장 심재철,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학생활동위원장 이홍동이 공식지도부로 구성된 가운데 1980년 봄을 맞이한 것이다. 학생운동의 핵심 방향은 신군부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학원자율화 등 학내 이슈를 계엄 철폐, 헌법 개정 등 정치적 이슈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군부에 정국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고 불필요하게 학생운동 역량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분간 가두투쟁을 자제한다는 것이 서울대 학생운동 내부와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회의에서 합의된 방침이었다. 학기 초에 서울대 복학생과 재학생 지도부 간의 갈등은 복학생 그룹 내 세대 간(이를테면 김병곤 그룹과 이해찬 그룹) 의견 차에서 비롯된 것이고, 박성현·김부겸의 명연설로 신입생 병영집체훈련 참가를 설득한 5.2아크로폴리스집회 후 복학생 주도의 철야농성을 계기로 해소되었다. 5월 13일 연세대의 가두진출 후 고려대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회의에서 다른 대학의 가두진출을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였다. 5.15시위 때 각 대학이 서울역으로 모인 것은 충돌을 가급적 피하면서 최대한 군중 동원 효과를 높이기 위해 집결지로 사전에 통보한 결과였다. 서울역 회군 때 해산하자는 것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서울대 병영집체훈련 참가 설득 작업 전말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