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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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정1) 판사 임용 직후까지구술자는 1934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시를 준비하던 중 1956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6‧25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판검사가 부족하였던 관계로 판검사특별임용시험이 있었고 임용은 성적순이 아니라 본인이 지원하면 판사나 검사가 될 수 있었다. 구술자는 25세에 광주지법 판사로 지원하여 임용되었다. 재판에 임하는 태도와 사건을 다루는 요령 등을 선배 판사로부터 교육 받았다. 재판의 판결은 원칙적으로 재판부의 합의제를 기본으로 하나 재판장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판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판사 임용 직후 법무관으로 군에 입대하여 법조계의 분위기 파악은 어려웠다.2) 발포명령 관계자 재판1960년 서울지법으로 발령을 받고 4월혁명재판 배석판사로 참여하였다. 구술자가 담당한 재판 중 당시 발포명령 관계자 문제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내무부장관 홍진기, 대통령 경호관 곽영주, 치안국장 조인구, 서울시 시경국장 유충렬, 서울시경 경비과장 백남규, 치안국 특정과장 이상국 등 이상 6명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 재판부에서는 발포명령 관계자 재판을 가장 신중하게 다룬다는 입장으로 진행하였다.구술자는 경무대 앞과 통의동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 및 헌병대와 시위대의 대치 상황에서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곽영주의 주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 경호였기 때문에 현장지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명령을 했더라도 최선을 다하라는 정도이지 직접적인 발포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검찰 측이 제시한 동영상을 보고 판단하건데 발포명령은 현장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포의 직접적인 명령은 현장을 지휘한 헌병대 쪽이라고 판단했다. 통의동에서의 대치상황은 무전기록의 내용이 남아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발포명령은 유충렬이 내린 것으로 판단했다.3) 정치폭력배 재판1960년 4월 18일 오후 1시경 고려대생 약 2천명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시작하여 서울 시내 각처를 행진하자 폭력배들이 학생들을 집단 폭행을 하여 시위를 저지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의 피고인으로 반공청년단장 신도환, 동대문시장 상인연합회장 이정재, 임화수, 화랑동지회장 유지광이 재판을 받았다.정치폭력배 재판은 일종의 괘씸죄가 작용하였다. 신도환, 이정재 등은 고려대 피습사건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이전부터 자유당의 비호 아래 불기소된 사건이 많았으므로 그동안 불기소한 사건을 한꺼번에 기소한 것이었다. 임화수 역시 직접적인 폭력을 쓰면서 가담한 바는 없고 곽영주와 가깝게 지내면서 권력을 부리는 정도였지 고려대피습사건에 얼마나 관여하였는지 뚜렷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다만 유지광은 심문에서 스스로 고려대 피습사건에 관여하였다고 자백하여 직접적인 관여는 유지광이 하였다는 판단에 이르렀다.4) 혁명재판 판결에 대한 소신재판에 대한 판결은 당시 국민적 감정과는 거리가 먼 결론을 내렸다. 구술자는 언론이나 여론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 호응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재판부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으나 법적 안정성을 위해 형량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특별법을 제정하여 판결하지 않는 이상 실정법으로 처벌하기는 한계가 있고, 당시 실정법에 따르면 형량을 무겁게 내릴 수는 없었다. 4월혁명은 초법적인 문제로 기존 대한민국의 헌법질서, 법개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또 특별법 제정 이후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폭력배들이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의하면 과한 판결이었다. 이들의 범죄사실이 공소사실 자체로 보면 사형을 선고 받을 정도는 아니어서 억울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결은 판사나 여론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엄격한 죄형법정주의로 판단을 해야 한다.5) 판사 면직 처분 과정1973년에 유신헌법과 그에 따른 법원조직법이 바뀌면서 100여 명의 재판관들이 면직 처분을 받았는데 구술자 역시 면직 처분을 받았다. 이후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구술자는 정부의도에 반하는 판결을 내려서 임용에 탈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동작동 국군묘지 사건과 대구 특허관계사건의 판결이 임용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하였다. 두 사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임용에 탈락한 이유가 당시의 판결이 국가의 이익에 반한다고 하여 불이익을 받았다. 구술자는 억울한 면이 있지만 운명을 탓하여 그냥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6)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변호구술자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당시 김대중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당시 정보부 수사단장이 통로역할을 하여 김대중의 변호단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50만원을 받았다. 구술자는 당시 개인적으로 김대중을 알고 있던 사이였고 김대중이 주관하는 민주사상연구소 이사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김대중에게 성실한 변호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성의껏 변호에 최선을 다했다.7) 4‧19에 대한 평가구술자 본인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이 좀 잘했더라면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또한 정부의 과도한 진압에 대한 아쉬움도 표하였다.5. 참고자료『奇蹟과 幻想』, 안동일‧홍기범, 서울영신문화사, 1960『韓國革命裁判史』第1‧2輯, 韓國革命裁判史編纂委員會 編, 韓國革命裁判史編纂委員會, 1962『4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편집실 편, 학민사, 1983『4월혁명자료집 혁명재판』, 학민사편집실 편, 학민사, 1985『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길사, 1990『4‧19혁명』, 김정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웅진, 2008『4월혁명통사』 10,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새로운 4‧19』, 안동일,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동아일보》‧《경향신문》‧《조선일보》‧《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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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열구술자는 경북대 사범대 시절 좌경 연극을 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다. 해방 후에 '좌경 안 하면 병신'이라고 했다. 재학 중에 울릉도 영어 교사도 했다. 거기서 홍순칠 독도수비대장과 의형제를 맺었다. 6‧25전쟁 때 유엔군에 들어갔다가 중간에 통역장교에 지원 입대, 육군 대위로 제대했다. 제대 후에 야당지로 이름 높은 대구매일신문 시험을 봐서 4등으로 합격했다.'가짜 이강석 사건' 특종을 한 것은 대구매일신문 입사 10개월 만이었다. 가짜 이강석으로 행세한 강병성은 똑똑한 젊은이였다. 그에게 "판사 앞에서 자유당 공무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었다"고 진술하라고 했다. 자살하기 일주일 전에 날 찾아왔는데 "젊은 놈이 약한 소리를 하지 마라"고 말해주었다.1955년 필화사건으로 유명했던 최석채 주필이 구술자를 특별히 잘 봐줬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구 수성관광호텔에 왔을 때 기지를 발휘해 이후락을 통해서 대통령 출마와 관련한 서면 답변을 받아낸 적도 있다.2‧28민주운동 때는 시위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현장에 갔다. 그런 정보는 금방 들어온다. 3‧15 선거 때는 대구 갑구 개표 현장에 갔다가 개표가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그 다음날 마산으로 특파됐다. 김주열 시체는 산책하던 중에 발견했다. 사진부장을 불러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신문사에서 서로 자기가 먼저 찍었다고 주장한다. 4‧19 때까지 마산에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무렵 대구로 돌아왔다.마산에서 기억에 남는 건 여학생들이 흰 교복을 입고 리본을 달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남학생이나 시민보다 맨 앞에 선 모습이 감명 깊었다. 마산에서 몇날 며칠을 있으면서 취재는 뒷전이고 같이 데모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구술자는 기자협회 대구지부장이었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경찰이 '기자협회 새끼들 몇 명 보낸다'고 하고 구술자가 세 번째로 지목돼 있었다. 총살로 보낸다고 했다.이승만 대통령이 국가를 세운 공은 크지만 친일파까지 끌어안은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4‧19는 학생들이 아니었으면 일어날 수 없었다. 대구 2‧28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학생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일으킨 혁명이다. 그걸 제쳐놓고 정치인이나 언론이 자기네가 했네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5. 참고자료김시열, 『望伯 칼럼: 땡삐의 분노』, 신조사, 1981년2‧28민주운동편찬위원회, 『2‧28민주운동』,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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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1) 송요찬 참모총장의 비서가 되기까지1931년 대구에서 출생한 구술자는 1949년 연희전문대학 정치외교과에 입학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보병학교에 입학한 후 전쟁에 장교로 참전하였다. 이후 미국 보병학교에 군사유학을 세 차례 다녀왔다. 당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하고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수한 인재로 뽑혀 송요찬 장군이 1군사령관에 부임할 때부터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2) 4월혁명 전 사회분위기에 대한 인식4월혁명 당시 송요찬 참모총장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면서 정치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1960년 3‧15 선거 당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로 인해 마산에서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였다. 이후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서울에서는 고려대 학생 피습사건이 벌어지면서 사회가 일대 혼란한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3) 계엄령 선포의 배경과 병력 투입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에 대한 발포사건이 오전 11시 경에 벌어진 후 사태 수습이 어렵게 되자, 오후 2시 40분에 경무대에서 송요찬 참모총장을 불러 경무대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송요찬은 당시 경무대에서 계엄령 발령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오전 11시로 계엄령을 소급 발령하려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오후 3시에 계엄령 발령 결정이 났다. 이 자리에서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했고, 경무대와 계엄사령관이라는 새로운 명령계통이 서게 되었다.그러나 계엄사령부는 시위 수습에 투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투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양평에 있던 예비전투사단인 15사단을 서울로 동원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조재미 준장이 이끈 15사단은 밤 8시쯤 서울에 상경하였고, 바로 경무대 경비를 위해 1만 2천명의 병력이 경복궁에 주둔했다.4) 경무대와 계엄사령부의 시위 수습당시 계엄군이 치안을 장악한 후 자유당 차원에서 경찰의 무력사용을 계획했던 것 같다. 경찰 측에서 육군에 칼빈 총탄 10만 발을 요청해 왔으나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이를 거절했다. 19일 아침 고려대에 집결한 시위대 1,900명을 해산시키면서 학생은 폭도가 아니기 때문에 전부 석방시켰다. 계엄사령부의 원칙은 '군은 국민 편에 서고, 또 국가원수(대통령)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혼란이 수습된 상태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려대에 집결해 있던 시위대를 해산한 4‧19 다음날 군이 완전히 치안을 장악하자 포천의 군부대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돌아왔다. 정치권으로부터 '이기붕 당선자는 사퇴시키고, 부정선거 책임자는 처벌하고, 선거를 다시 한다'고 들었다.이승만 대통령이 부상당한 학생들 위문 차 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다녀왔다. 그리고 송요찬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곧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퇴하고 모든 수습이 잘될 것이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 장면 부통령이 사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붕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조용했던 시위 군중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4월 25일 태평로에서 교수 시위가 시작되고, 일부 시위대가 칼 같은 무기를 준비한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국회연락장교 신원식 대령의 연락을 받고 총장실에 들어가니 송요찬 장군은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낮잠 휴식' 중이었다. "큰일났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더니 "김종오 참모총장에게 알려"하고 다시 자버렸다.국회의장 공관에서는 이강석 소위가 계속 병력 1개 중대만 보내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상황실에 보고하면 '보냈다고 하라'는 답이 나왔다.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시위대의 함성이 들리곤 했다. 이미 군은 대통령만 보호하고 이기붕은 포기하고 있었다.그날 밤 이기붕 일가는 포천에 있는 6군단 부대로 다시 찾아갔는데 비호를 받지 못했다. 이승만 하야 후 육군참모총장실에 이강석이 아무 말 없이 악수만 한 사람씩 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 가족들이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참모총장이 숨겨놓았다는 보도가 있어 총장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경무대관사로 기자들과 검시를 하러갔다. 후에 들으니 하와이로 보내려고 미국측에서 찾았는데 찾기 전에 자살해 버렸던 것이다.4‧19 사태수습에 관해서 미국과의 논의도 있었다. 8군이 매일 와서 군의 동향을 파악해 갔는데 병력의 이동에는 미군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엄령 선포와 그에 따른 군대 이동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5)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4월 26일 아침에 송요찬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마지막 건의를 했다. 발포 안 하면 수습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이승만은 "발포는 안 돼, 국민이 무엇을 원해?"라고 물었고, "하야하시랍니다"는 말에 "그럼 하야하지"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하야 성명발표가 나온 것이다. 육군공병감 엄홍섭 장군에게 지시해 이화장을 수리하고 곧 이승만 대통령이 그리로 옮겼다가 하와이로 떠났다.6) 군 쿠데타 가능성 - 밀리터리즘당시는 워낙에 군의 비중이 높다보니 일부 쿠데타 논의가 있을 정도였다. 사실 서울에 현역 1개 사단을 진입시키고 정보와 헌병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비상계엄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김정렬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이 이승만의 하야성명 발표 직후 송요찬 참모총장을 만나고 있는데 전속부관 김운용이 하우즈 군사고문단장의 편지를 들고 와 곧 번역을 시켜 읽어 내려가는데 '8군사령관에 의하여'라고 부기가 된 영어공문이었다 한다. 내용인 즉 '미국은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지원한다. 또 폭동진압을 위해 2개 사단을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송요찬은 역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며 미국의 뜻이 그렇더라도 정부의 수반은 민간 지도자가 되어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술자는 그러한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내용이 확실히 그랬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7) 4월혁명과 군의 역할에 대한 평가민주화에 일익을 담당했으나 4월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그 빛이 바랜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4월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4‧19가 학생, 시민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지만 군이 절대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사태를 수습했기 때문이다. 이후 집권한 민주당이 잘했다면 좋았는데 그렇지 못하여 5‧16이 일어났고, 군부가 집권한 데 대해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 4‧19 당시 군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축소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5. 참고자료『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길사, 1990『한미관계20년사(1945~1965년)』, 도널드 스턴 맥도날드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1950년대반 옮김, 한울, 2001『4‧19혁명』, 김정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웅진, 2008『4월혁명통사』 10,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새로운 4‧19』, 안동일,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동아일보》‧《경향신문》‧《조선일보》‧《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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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취임에 따른 포부
- 유년시절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
- 일제시대 유년 기억과 학창시절
- 삶에 영향을 받았던 은사님
- 아버지에 대한 기억
- 1960년 3.15 부정선거규탄운동 및 4월혁명 당시 상황
- 학내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 6.3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
- 4월혁명 이후 민족운동, 통일운동 전개 상황
- 민족주의 이념 관련
- 인민혁명당사건에 관련된 지인들
- 문화운동 지인들과의 만남
- 미학 강의 및 미술평론 활동
- 한국미학회 활동
- 3과통폐합 반대투쟁
- 삼선개헌 반대투쟁
- 현실동인 제1선언
-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 참여 과정
-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진행과정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배경
- 민주회복시국선언 배경 및 과정
-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혐의 구속 상황
- 해직교수협의회 결성 및 활동
- 제2차 해직교수협의회 활동상황
- 서울미술관장 재직시 활동
- 소집단미술운동 상황
- 민족미술협의회 결성 및 활동
- 창작방법론 논쟁과정
- 민중판화가 오윤의 작품세계
- 1987년 6월항쟁과 민족민중미술운동
- 미술운동의 조직개편 배경 및 과정
- 전국민족미술인연합 활동
- 창작과비평사 탄압과정
- 문화운동가들과 함께 했던 기억
-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
- 부모님의 삶이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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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해방 직전 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에서 6개월 가량 재학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당시 보성전문학교) 상대로 옮겨 재학했다. 재학 중 학생운동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졸업 후 휘문고등학교에서 2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5년부터 고려대에서 시간강사를 시작해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고, 1960년에 고려대 경제학과 전임강사를 맡았다.1) 고대 강사로 재직 중이던 당시 사회분위기 및 대학분위기6‧25전쟁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된 한국의 상황은 빈곤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위해 지속적으로 군비를 강화했고, 미국 등의 해외 원조는 구호물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은 극심한 실업난과 빈곤으로 경제 불안이 극에 달했다. 또 지나친 반공주의는 독재를 수반했고, 원조경제 하에서 원조물자를 둘러싼 정권 담당자들의 부정부패 또한 심각해 이승만 정권은 실정을 거듭하고 있었다.전쟁 후 1950년대의 대학사회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납북되어 교수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대학원을 갓 졸업한 경우에도 시간강사로 임용되었고, 또 전공과 관계없는 과목도 맡아 강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수사회 전반은 보수 성향이 강한 편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도 일부 교수에 국한되었다.구술자는 강의 내용에 있어서 맑스 경제학과 근대경제학을 절충해 강의했고, 그러한 강의는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강의 내용 등에 대한 정부 당국의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지속적인 감시는 있었다고 한다. 직접 탄압을 하지 못한 이유로는 고대나 연대 등이 가지는 사회적 위상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강사)를 직접 탄압하거나 체포할 경우 발생할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했다는 것이다.한편 대학생들은 교내에서 써클 등을 조직해 사회비판적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고려대의 경우 민통, 협진회와 같은 학생조직이 있었다. 특히 노사의 협력을 강조하는 개량주의적 성격을 가졌던 협진회의 경우 4‧19 당시 구술자가 지도교수를 맡고 있었다. 이 같은 학생 써클에 대해 학교 당국은 대부분 과격한 학생조직으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구술자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고 공개된 단체로 학교당국에 등록하게 했다고 한다.2) 고대생들의 4‧18과 4‧193‧15 부정선거 이후 대학 및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했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4‧18 이전에는 주로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대학을 방문해 질책과 동의를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내 분위기는 협진회나 민통(민족통일연맹) 등의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이승만 정권에 대해 반대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고, 또 일부는 무관심했다. 즉 3‧15 부정선거가 나쁘다는 인식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행동이 없어서 교수나 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대생들의 4‧18의거가 일어났다. 당일 학생들이 급박하게 모여 학교 밖으로 시위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일부 학교 당국자나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들은 즉각적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시키려고도 했다. 하지만 고대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시내 곳곳에서 저녁까지 시위를 진행한 후 동대문 쪽으로 돌아오던 일부 시위대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19일, 이 사건에 격분해 전국적으로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촉발되었다. 그러나 고대생들은 전날의 시위로 인해 19일의 시위에는 대부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4‧18과 4‧19가 대학생 중심의 시위였기 때문에 학교 당국은 문교부의 여러 지시(문책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를 받고 이를 무마하기에 바빴다. 또 계엄령과 함께 학교에 군대가 배치됨과 동시에 학교도 휴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대부분의 교수들은 시위학생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구술자는 4‧19때 광화문 등지에서 시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목격한 후 개인적으로 학생의 희생에 보답하는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3) 4‧25 교수단 시국선언과 시위25일 어떤 교수가 모임에 가자고 했으나 그날 약속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고, 26일 오후에 다시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서울대 문리대로 갔다. 이날 이곳에서는 전날 모임에서 논의된 것들을 이야기하고 이어 데모하자는 의견에 따라 교수단 시위에 동참했다. 행진에 앞서 어떤 교수는 오늘 절대 발포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교수단의 시위행렬은 종로를 거쳐 지금의 시청 앞인 국회에 다다랐는데 이미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공간을 확보해 주어서 그 곳으로 교수단은 들어갔고, 이항녕 선생이 시국선언문을 읽었다. 이렇게 끝을 맺으니 주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는데, 당시 이 광경은 그야말로 시민, 학생, 교수 모두가 일체가 되었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대단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의 시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터에 다른 시위처럼 시위 후 도망가기 바쁜 것이 아니라, 시민‧학생들의 동조, 격려, 보호 속에서 당당하게 행진했던 것은 느끼는 바가 크게 달랐다.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시위는 결정타, 즉 학생들의 시위에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교수들이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5. 참고자료《경향신문》 1962.4‧25, 「오늘 敎授'데모' 두 돌 經緯는 이렇다」《동아일보》 1963.4‧25, 「革命의 巨樹 이룬 겨자씨 한 알 (6)敎授 '데모'」《경향신문》 1964‧4‧25, 「敎授데모 秘話」『民主革命의 발자취 : 全國各級學校 學生代表의 手記』, 李綱鉉 編, 正音社, 1960『사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3『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인, 2001.11『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8『4월혁명통사』,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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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배구술자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딱 한 차례 도전해보고 실패하자 포기했다. 학창시절에 산악반을 만들어 낭가파르바트,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 해외 등정까지 했다. 좌익 책들은 많이 봤지만 협진회 같은 이념서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구술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경향신문에 공채 2기로 들어갔다. 고려대 선배인 송원영 정치부장의 눈에 띄어 사쓰마와리(경찰 출입 기자)를 안 거치고 정치부에서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 당시 고재호 대법관 집에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 차를 타고 출근했다. 그렇게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2개월도 안 돼 신문이 폐간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대통령 기자회견 오보, 성북서 간첩 검거 보도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육군 사단장 기름 빼돌린 사건 보도와 여적 필화사건이 빌미가 됐다. 그 때문에 법조 취재에 투입됐다. 폐간 공고문 붓글씨를 구술자가 썼다.폐간 후 전북일보를 거쳐 세계통신에 근무하던 중에 4‧19를 맞았다.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 시위가 발생하던 날 대전 유세를 취재했다. 당시 언론사에서는 기자들을 대개 자기 연고 지역으로 보냈다. 대전에 갔을 때 임철호 국회부의장 등 자유당 최강경파 그룹과 함께 유성관광호텔에 묵었다. 아침에 임 부의장이 묵고 있는 스위트룸에 육군 소장인 하갑종 특무부대장과 논산 제2훈련소장이 찾아왔다. 임 부의장이 이들의 면담을 거절하다가 인사만 하고 가겠다며 재차 요청하자 면담을 허락했다. 하 소장이 "이기붕 부통령 후보 각하의 표도 대통령 각하의 표에 못지않게 많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가당한 일인가. 임 부의장은 "뭔 소리를 그렇게 해. 당선만 되면 되지. 결코 무리하지 말게"라며 나무랐다. 군도 부정선거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대전 유세 취재에 이어 군산에 갔다. 윤보선 등 야당 의원들과 군산에서 제일 큰 희망여관에 갔는데, 경찰이 전부 예약을 해놔 방이 없었다. 여당은 공설운동장에서, 야당은 우시장에서 유세를 했다. 윤보선 의원이 트렁크에 토스터와 버너를 가지고 다녔다. 윤 의원이 "허, 김 기자, 보지 않았나? 저 사람들이 잠도 안 재워주고 밥도 안 줘"라고 말했다. 군산에 이어 전주 유세를 취재하면서 경찰이 단순히 이승만-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보다 두 후보의 득표율을 더 높게 만드는 일에 혈안이었다.야당도 신‧구파가 적과 다름없을 정도로 분열돼 있었다. 야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나이가 많아 당선되더라도 임기를 다 못 채울 것으로 보았다. 민주당 구파는 신파인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통령을 승계하는 것을 배 아파 할 정도로 신‧구파 사이의 알력이 심했다.4월 18일 국회 기자실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가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고려대생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다. 돌아갈 때 깡패가 시위대를 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4월 19일에는 경무대 앞 총격 현장에 있었다.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없지만 작업복 차림의 무장한 무리를 보았다. 이게 어떤 세력인지 규명돼야 한다. 국회 쪽에서 서울신문이 불타는 모습과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이 총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총에 맞아서 떨어졌는지, 단순히 놀라서 떨어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직접적인 이유는 김구 패거리가 경무대로 쳐들어온다는 정보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지만 3‧15 선거 당일 마산에서 격렬하게 시위가 일어난 까닭은 야도인 마산에서 야당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이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것과 마감 시간 이후 투표를 못 하게 한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도화선이 됐다. 4‧19에 대해 정확하게 규명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 기회가 닿으면 이런 작업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5. 참고자료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 ~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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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구술자는 부산 피난 시절인 1952년 서울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2년 다니다가 환도 후에 다른 대학으로 옮기는 바람이 불어서 구술자도 다시 시험 봐서 법대에 들어갔다. 학생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해 부위원장이 됐다.1957년 서울대 법대 이강석 부정 편입학 사건이 터졌을 때 이강혁 학생위원장을 대신해 총회 의장으로서 동맹휴학을 지휘했다. 원래 부위원장은 학생운영위원회 일에 잘 관여하지 않는데 이강혁 위원장이 이강석과 동성동본에 항렬이 같아 나서기 곤란하니 구술자가 표면에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문에 고시나 해서 변호사가 되려던 꿈을 단념하고 신문사 기자로 방향을 바꾸었다. 한국일보 7기로 입사했다. 수습을 마치고 편집부에 배치돼 6개월 만에 1면 편집을 담당했다.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시위가 나자 편집부장은 물론 주필, 사장까지 와서 관심을 보였다. 장기영 사장이 옆에 있는데 오종식 주필이 "남군, 이건 의거야. 의거라고 뽑아!"라고 호기를 부렸다. 그 정도로 한국일보 내의 분위기는 격앙돼 있었다. 그때 폭동이냐, 의거냐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 적당히 타협해서 '소요'로 결론인 난 것으로 기억난다.이때까지 신문은 동아일보가 야당지로서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한국일보는 그만큼 세게 나가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산 시위 이후 신문의 논조나 제목의 표현이 상당히 고조됐다. 서울신문 빼고는 웬만한 신문은 전부 반자유당 쪽으로 신문을 만들었다.4월 18일 고려대 시위는 1면 편집사상 이례적으로 사진을 4단으로 처리했다. 보통 때 1면 사진은 2단 정도로 실었다. 나도 3단 정도로 생각했는데 부장이 4단으로 키우라고 했다. 파격적인 편집이었는데 나오고 보니 완전 텔레비전 화면 보는 것 같았다.한국일보 4층 옥상에 올라가면 중앙청 앞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학생들이 몰려가고 총 쏘고 도망치는 장면을 전부 볼 수 있었다. 편집부 내근자들이 거기 올라가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편집부장, 나중에 편집국장까지 올라와서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다 장 사장이 "학생들이 밑에서 총 맞아 죽는 걸 위에서 구경해서야 되겠느냐"고 해서 전부 내려왔다. 저녁에 직업 청소년 20~30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노래와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중앙청 앞에서 안국동 로터리, 돈암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았다.감성적인 편집도 등장했다. 홍성면씨는 외로운 나무라는 뜻의 '독고수'라는 필명으로 시를 써서 싣고는 스스로 '아 슬프다, 4월 19일'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 시도 계엄사의 검열 과정에서 삭제됐다.서울대 법대 4‧19 주역은 황건, 심재택 등 사회법학회 멤버들이었다. 그 뿌리가 신조회였다. 4‧19 전야에 사회법학회 멤버들이 모여 구술자를 초청했다. 선배 중에 과격파가 있었지만 구술자는 온건파였다. 구술자는 "지금 여러분의 행동이 평생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나중에 후회가 없도록 심사숙고해서 행동하기 바란다"고 얘기했다. 신조회는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서울대 문리대의 신진회, 법대의 신조회, 고려대 협진회 출신이 졸업 후에도 모임을 가졌는데, 4‧19 직후 그 모임을 신조회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4‧19는 복합혁명이다. 민주주의를 요구한 것뿐 아니라 경제적 불만의 폭발,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작용한 것이다. 4‧19와 5‧16도 합쳐서 봐야 한다. 4‧19가 혁명적 사태라면 혁명적으로 수습해야 하는데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습하려니까 5‧16이라는 혁명적 사태로 해결된 것이다.5. 참고자료한국일보 1960년 3월 1일 ~ 1960년 4월 30일자남재희, 『언론‧정치 풍속사』, 민음사, 2004년남재희,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 『국회보』 2005년 1월 ~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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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윤구술자가 한양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것은 사람이 태어나서 언젠가는 가는 건데 뭔가 남기고 싶었고, 그것이 건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때 전방 참호에 미군 해병대가 버리고 간 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병사가 쓰러지는 사진인데, 건축보다 이런 사진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신문학원 사진학과를 나와서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들어갔다.1960년 2월 12일 장택상 후보 등록 방해 테러사건 사진을 살벌한 가운데 단독으로 찍었다. 3‧15 선거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투표하는 사진을 찍었다. 회사로 가져왔더니 싣지 않았다. 전날 동아일보 기자가 폭력배한테 당한 데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사회면에 '공기총'이라는 칼럼을 쓰는 최호 사회부장이 '대통령 사진이고 뭐고 쓰지 말자'고 제안해서 그날 하루 신문이 사진 없이 먹판으로 나갔다.4월 12일 민주당 경북도당 시위가 있다고 해서 대구에 갔다가 마산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산도립병원에 가서 태극기를 덮어놓은 김주열 시신을 찍었다. 이 사진과 최루탄이 박힌 모습을 그린 그래픽을 함께 지면에 내보내 충격이 더했다. 이 사진을 다른 외신 기자들도 함께 찍었는데 나와 달리 그들은 촬영 전에 망자에 대한 예의를 먼저 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나중에 '인간애 상'을 제정하게 되었다.야간에 시위대가 불탄 경찰차 앞을 지나가는 사진이 AP통신을 타고 외신에 보도됐다. 플래시 밸브 10개를 받아 현장에 나갔다. AP통신 진철수, 김천길 기자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걸 보고 구해준 일도 있다. 군중에게 '동아일보는 국내에서 제일이지만 세계에 나가면 아무도 모른다. AP통신은 세계에서 모르는 데가 없다'고 설득했다. 낮에 보았던 불탄 경찰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가 나타나자 셔터를 눌렀다. 이 사진이 첫 외신을 탄 4월혁명 사진이다.4‧19날에는 본사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갔다. 동래고등학생 시위 사진을 찍으려는데 경찰서 건물을 보고 순간적으로 지프에서 내렸다. 그때 총알이 날아와 구술자가 앉은 자리에 박혔다. 동아일보 차를 저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찰이 차마 사람을 쏠 수는 없어 구술자가 내리자 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위협을 느끼고 금은방이 있는 집에 들어가 필름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내가 혹시 잡혀가면 부산지사에 필름을 전하도록 했다.부산 발포 현장에는 처음에 정복에 둥근 모자를 쓴 경찰이 있다가 어느 틈엔가 슬쩍 카키색 작업복에 군화를 신은 전투경찰로 바뀌었다.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학교 학생들이라고 했다. 지역 경찰은 자기 자식이나 친척, 동네 아이가 있으니까 차마 그들을 향해 총을 쏘지 못할 것이다. 전투경찰은 자기네와 상관없으니까 명령대로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부산 취재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니 세종로네거리에서 중앙청 앞까지 사람이 꽉 차 있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 데모를 유일하게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었다. 행진을 시작했을 때 재빨리 서울대 의과대학 정문의 문주 위에 올라갔다. 곧바로 한 컷을 누르고 나니 이미 선두가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 장면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 후 시민들이 계엄군 탱크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는 사진이 그해 6월 1일 발간한 『민주혁명의 기록』이라는 사진집 표지에 실렸다. 계엄사단장이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부르는 사진도 구술자가 찍었다.5. 참고자료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 ~ 1960년 4월 30일자『동아일보사사 권2』(1945~1960), 동아일보사,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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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윤구술자 변형윤은 황해도 황주 출신이고, 현재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이다. 1960년 당시에는 서울 상대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자유당의 영구집권 중 이기붕이 차기 대통령을 노리던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무능하면서도 영구집권을 노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많았다.교수사회는 이런 사회 분위기와는 다르게 조용했다.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두려워해 외적인 활동이나 모임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교수사회 내에서 활발한 논의를 거쳐 4월 25일이 준비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내 정치적인 교수들이 있어 교수사회의 분위기는 공공연히 시국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편 교내의 교수회의는 단순한 논의기구가 아니라 학장 선출 등의 학내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고, 이러한 결정에 대해 총장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개가 대단했지만, 선생님이라고 해서 쉽게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성균관대학에 강의를 갔던 4월 19일 대학생들이 교문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후 학생 시위대를 따라 당일의 시위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특히 총에 맞아 피 흘리는 학생을 흰 가운을 입은 다른 의과대학생이 옮기는 것을 보면서, '교수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연구실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이런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서울대학의 함춘원(지금의 의과대학)에 모이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이 교수 시위를 주도하신 분들은 주로 인문 계통의 나이 많은 교수들이었다. 기억나는 분들로는 이항녕, 이희승, 김증한, 변희용, 정석해, 권오돈 등이 있고, 서울대에서는 문리대쪽이 많이 참석했으며 상대 쪽에서는 거의 없었다. 당시 서울 상대 교수는 15명 정도였는데, 이중 유일하게 구술자만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했다.4월 25일이 국립대학의 봉급날이라서 그날로 교수 모임을 정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아마 적어도 일주일 내로 4‧19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날로 정해진 것으로 판단했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시국선언문 서명자 명단과 관련해, 장면 내각 시절 중 4‧25 교수단 참여 교수를 초청해 경회루에서 만남을 가졌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 초청 명단을 확보하면 5‧16을 겪으며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4‧25 교수단 시국선언 서명자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4‧25교수단 시위가 어떤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구호로는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를 외쳤지만, 총을 맞을 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벌인 데모였기 때문에 이후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 한편 시위가 진행되는 상황은 군‧경찰이 등장하지 않아 전혀 삼엄하지 않았다.그때 당시를 회고하자면, 당시의 주장이 얼마나 현재 실현되었는지 잘 모르겠고 실상 앞으로의 과제가 더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5. 참고자료《동아일보》 1961.4‧25, 「敎授團을 招請 義擧記念파티/ 25日 慶會樓서」《경향신문》 1961.4‧26, 「大學敎授불러 慶會樓서 파티/ 張國務總理가」《경향신문》 1962.4‧25, 「오늘 敎授'데모' 두 돌 經緯는 이렇다」《동아일보》 1963.4‧25, 「革命의 巨樹 이룬 겨자씨 한 알 (6)敎授 '데모'」《경향신문》 1964‧4‧25, 「敎授데모 秘話」『民主革命의 발자취 : 全國各級學校 學生代表의 手記』, 李綱鉉 編, 正音社, 1960『사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3『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인, 2001.11『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8『4월혁명통사』,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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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동지금은 은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카메라도 일체 들지 않는다. 성균관대에 간 것은 심산 김창숙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다. 심산의 둘째 아들이 구술자의 초등학교 동기다. 학교에 들어가서 총장인 심산의 비서 역할을 했다. 심산 편지를 전하러 38선 너머 철원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사진을 찍었다. 미군정 시절 농림부 산림국 치산치수 기록사진을 찍었고 김구, 조병옥 등 거물들의 생전 마지막 사진도 구술자가 찍었다. 심산의 먼 친척인 김창국 학생과장 덕에 6‧25 때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김 선생은 6‧25 때 북으로 갔다가 나중에 간첩으로 내려왔다 잡혀서 옥사했다. 국대안반대운동 때는 심산의 지시로 교내 좌익조직에 들어가 프락치 노릇도 했다.1.4후퇴 때 대구 처가에 가 있다가 군부대 기록사진사로 종군했다. 해방정국과 6‧25전쟁 국면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다. 신문사에 들어간 것은 6‧25 후 실향민 소식지인 중앙일보(지금의 중앙일보와는 다름)에 발탁된 것이 계기가 됐다. 거기서 근무하다 동아일보 사주인 인촌 김성수 선생 빈소에 이승만 대통령이 문상하는 사진을 단독 촬영한 것이 인연이 돼서 동아일보로 옮겼다.1957년 정치깡패들의 장충단공원 테러 사건, 1958년 경북 영일을구 재선거 부정 현장을 찍었다. 이것들도 다 4‧19와 관련된 사건이다. 서민호의 옥중 사진은 야당 국회의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어렵게 찍은 특종이다.4월 19일 경무대로 진격할 때 어린 학생들이 소방차 두 대에 시동을 걸자 자동적으로 사이렌이 켜졌다. 구술자는 이들이 죽으러 간다는 걸 알았다. 이들이 죽을 건데 소리를 지르고 죽는지 앞으로 넘어지는지 뒤로 넘어지는지 한번 보자, 이런 심정으로 이들을 따라가며 셔터를 눌렀다. 총소리가 나고 소방차에서 떨어진 학생한테 깔려 앞으로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총은 맞지 않았고 카메라가 먼저 땅에 닿아 충격을 흡수해줘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카메라도 렌즈 부위가 찌그러졌지만 무사했다. 회사로 와서 쓸 만하면 쓰라며 카메라를 던져주었다.(경무대 앞 총격 장면을 담은 이 특종 사진은 계엄이 해제된 4월 26일에야 실렸다.)5. 참고자료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 ~ 1960년 4월 30일자『월간조선』 2002년 3월호, '보도사진의 개척자 이명동'이명동, 『보도사진 이론과 실제』, 해뜸,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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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구술자는 192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1960년 당시 고려대학교 전임강사를 맡고 있었고, 4‧25 교수단 시위 사진의 좌측 끝 네 번째(다섯 번째)가 본인이라고 했다.그날 고려대 교수휴게실에서 서울의 대학교수들이 모이기로 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서울대 교수회관으로 가서 서명을 하고 시위에 나섰다. 4‧25가 있기 며칠 전부터 교수회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주로 연배가 있는 교수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본인과 같은 소장층 강사들은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고 한다.4월 25일에는 4‧18과 4‧19로 부상당한 대학생들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한 뒤라 시위 진행과정에서 별다른 긴장감은 없었다. 이 날 고려대 교수휴게실에 모여 있던 몇몇 교수들과 함께 서울대 교수회관인 함춘원으로 가서 서명을 했고, 누군가 낭독을 한 후 열을 지어서 담담한 표정으로 시위에 나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을 했다. 마지막으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수단은 해산하고 귀가했다.이런 4월혁명은 혁명을 등에 업고 '한 자리' 씩을 차지한 이들과 5‧16쿠데타로 실패했다고 한다. 교수단에 참여한 인사들 중 순수한 분들이 모여 국가의 진로와 방향에 대해 고민했어야 하지만 모두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데 있어 4‧25 교수단 시국성명과 시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들 하지만, 사실은 4‧18, 4‧19가 가장 컸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승만대통령이 그 자신을 물러나라고 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저항을 했던 시위대에 감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4‧18 고대생 시위의 역할을 크게 평가하면서, 1개 대학의 시위가 대통령의 하야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고 평가했다.결국 4‧25 교수단 시국선언과 시위는 이러한 순수한 저항을 치다꺼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5. 참고자료《경향신문》 1962.4‧25, 「오늘 敎授'데모' 두 돌 經緯는 이렇다」《동아일보》 1963.4‧25, 「革命의 巨樹 이룬 겨자씨 한 알 (6)敎授 '데모'」《경향신문》 1964‧4‧25, 「敎授데모 秘話」『民主革命의 발자취 : 全國各級學校 學生代表의 手記』, 李綱鉉 編, 正音社, 1960『사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3『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인, 2001.11『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8『4월혁명통사』,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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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린
- 출생, 성장, 가족관계, 일제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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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귀환, 독학, 해방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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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 여순사건 이후 활동,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예비검속
- 도인민위원회 활동, 전쟁기 도피생활, 양조장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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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혁명,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5·13 대회
- 5·16 군사쿠데타 이후 도피 및 구금
- 1988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재건운동 및 구속, 구금생활
- 1차 범민족대회, 1·2차 통일선봉대
-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조직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활동 및 조직분규, 현재까지의 활동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제2차 조직분규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 한국전쟁 직후 도피생활
- 2대악법반대투쟁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2차 조직분규
- 1950년대 활동
-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 보완설명
- 향후 통일운동의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