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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열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시열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8월 24일
장소
대구 이천동 구술자 자택
구술시간
1시간 10분 6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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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경북대 사범대 시절 좌경 연극을 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다. 해방 후에 '좌경 안 하면  병신'이라고 했다. 재학 중에 울릉도 영어 교사도 했다. 거기서 홍순칠 독도수비대장과 의형제를 맺었다. 6‧25전쟁 때 유엔군에  들어갔다가 중간에 통역장교에 지원 입대, 육군 대위로 제대했다. 제대 후에 야당지로 이름 높은 대구매일신문 시험을 봐서 4등으로  합격했다. 
'가짜 이강석 사건' 특종을 한 것은 대구매일신문 입사 10개월 만이었다. 가짜 이강석으로 행세한 강병성은 똑똑한 젊은이였다.  그에게 "판사 앞에서 자유당 공무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었다"고 진술하라고 했다. 자살하기 일주일 전에 날  찾아왔는데 "젊은 놈이 약한 소리를 하지 마라"고 말해주었다. 
1955년 필화사건으로 유명했던 최석채 주필이 구술자를 특별히 잘 봐줬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구 수성관광호텔에 왔을 때 기지를 발휘해 이후락을 통해서 대통령 출마와 관련한 서면 답변을 받아낸 적도 있다. 
2‧28민주운동 때는 시위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현장에 갔다. 그런 정보는 금방 들어온다. 3‧15 선거 때는 대구 갑구 개표  현장에 갔다가 개표가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그 다음날 마산으로 특파됐다. 김주열 시체는 산책하던 중에 발견했다. 사진부장을 불러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신문사에서 서로 자기가 먼저 찍었다고 주장한다. 4‧19 때까지 마산에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무렵 대구로 돌아왔다.
마산에서 기억에 남는 건 여학생들이 흰 교복을 입고 리본을 달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남학생이나 시민보다 맨 앞에 선  모습이 감명 깊었다. 마산에서 몇날 며칠을 있으면서 취재는 뒷전이고 같이 데모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구술자는 기자협회  대구지부장이었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경찰이 '기자협회 새끼들 몇 명 보낸다'고 하고 구술자가 세 번째로 지목돼 있었다.  총살로 보낸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를 세운 공은 크지만 친일파까지 끌어안은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본다. 4‧19는 학생들이 아니었으면 일어날 수  없었다. 대구 2‧28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학생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일으킨 혁명이다. 그걸 제쳐놓고 정치인이나 언론이 자기네가 했네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5. 참고자료

김시열, 『望伯 칼럼: 땡삐의 분노』, 신조사, 1981년
2‧28민주운동편찬위원회, 『2‧28민주운동』,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0년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시열(기자언론인)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2866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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