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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운용
면담자
민족문제연구소(이준식, 조세열, 강동민)
구술일자
2010년 7월 20일, 9월 27일
장소
구술자의 사무실
구술시간
3시간 44분 5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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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 송요찬 참모총장의 비서가 되기까지
1931년 대구에서 출생한 구술자는 1949년 연희전문대학 정치외교과에 입학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보병학교에 입학한 후 전쟁에 장교로 참전하였다. 이후 미국 보병학교에 군사유학을 세 차례 다녀왔다. 당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하고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수한 인재로 뽑혀 송요찬 장군이 1군사령관에 부임할 때부터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2) 4월혁명 전 사회분위기에 대한 인식
4월혁명 당시 송요찬 참모총장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면서 정치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1960년 3‧15 선거 당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로 인해 마산에서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였다. 이후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서울에서는 고려대 학생 피습사건이 벌어지면서 사회가 일대 혼란한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3) 계엄령 선포의 배경과 병력 투입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에 대한 발포사건이 오전 11시 경에 벌어진 후 사태 수습이 어렵게 되자, 오후 2시 40분에 경무대에서 송요찬 참모총장을 불러 경무대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송요찬은 당시 경무대에서 계엄령 발령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오전 11시로 계엄령을 소급 발령하려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오후 3시에 계엄령 발령 결정이 났다. 이 자리에서 내각은 총사퇴를 결의했고, 경무대와 계엄사령관이라는 새로운 명령계통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시위 수습에 투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투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양평에 있던 예비전투사단인 15사단을 서울로 동원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조재미 준장이 이끈 15사단은 밤 8시쯤 서울에 상경하였고, 바로 경무대 경비를 위해 1만 2천명의 병력이 경복궁에 주둔했다. 

4) 경무대와 계엄사령부의 시위 수습
당시 계엄군이 치안을 장악한 후 자유당 차원에서 경찰의 무력사용을 계획했던 것 같다. 경찰 측에서 육군에 칼빈 총탄 10만 발을 요청해 왔으나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이를 거절했다. 19일 아침 고려대에 집결한 시위대 1,900명을 해산시키면서 학생은 폭도가 아니기 때문에 전부 석방시켰다. 계엄사령부의 원칙은 '군은 국민 편에 서고, 또 국가원수(대통령)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혼란이 수습된 상태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대에 집결해 있던 시위대를 해산한 4‧19 다음날 군이 완전히 치안을 장악하자 포천의 군부대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했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돌아왔다. 정치권으로부터 '이기붕 당선자는 사퇴시키고, 부정선거 책임자는 처벌하고, 선거를 다시 한다'고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상당한 학생들 위문 차 그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다녀왔다. 그리고 송요찬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곧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퇴하고 모든 수습이 잘될 것이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 장면 부통령이 사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붕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조용했던 시위 군중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4월 25일 태평로에서 교수 시위가 시작되고, 일부 시위대가 칼 같은 무기를 준비한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국회연락장교 신원식 대령의 연락을 받고 총장실에 들어가니 송요찬 장군은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낮잠 휴식' 중이었다. "큰일났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더니 "김종오 참모총장에게 알려"하고 다시 자버렸다. 
국회의장 공관에서는 이강석 소위가 계속 병력 1개 중대만 보내달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상황실에 보고하면 '보냈다고 하라'는 답이 나왔다.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시위대의 함성이 들리곤 했다. 이미 군은 대통령만 보호하고 이기붕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이기붕 일가는 포천에 있는 6군단 부대로 다시 찾아갔는데 비호를 받지 못했다. 이승만 하야 후 육군참모총장실에 이강석이 아무 말 없이 악수만 한 사람씩 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 가족들이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참모총장이 숨겨놓았다는 보도가 있어 총장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경무대관사로 기자들과 검시를 하러갔다. 후에 들으니 하와이로 보내려고 미국측에서 찾았는데 찾기 전에 자살해 버렸던 것이다. 
4‧19 사태수습에 관해서 미국과의 논의도 있었다. 8군이 매일 와서 군의 동향을 파악해 갔는데 병력의 이동에는 미군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엄령 선포와 그에 따른 군대 이동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5)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4월 26일 아침에 송요찬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마지막 건의를 했다. 발포 안 하면 수습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이승만은 "발포는 안 돼, 국민이 무엇을 원해?"라고 물었고, "하야하시랍니다"는 말에 "그럼 하야하지"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하야 성명발표가 나온 것이다. 육군공병감 엄홍섭 장군에게 지시해 이화장을 수리하고 곧 이승만 대통령이 그리로 옮겼다가 하와이로 떠났다. 

6) 군 쿠데타 가능성 - 밀리터리즘
당시는 워낙에 군의 비중이 높다보니 일부 쿠데타 논의가 있을 정도였다. 사실 서울에 현역 1개 사단을 진입시키고 정보와 헌병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비상계엄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정렬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이 이승만의 하야성명 발표 직후 송요찬 참모총장을 만나고 있는데 전속부관 김운용이 하우즈 군사고문단장의 편지를 들고 와 곧 번역을 시켜 읽어 내려가는데 '8군사령관에 의하여'라고 부기가 된 영어공문이었다 한다. 내용인 즉 '미국은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지원한다. 또 폭동진압을 위해 2개 사단을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송요찬은 역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며 미국의 뜻이 그렇더라도 정부의 수반은 민간 지도자가 되어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술자는 그러한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내용이 확실히 그랬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7) 4월혁명과 군의 역할에 대한 평가
민주화에 일익을 담당했으나 4월혁명 이후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그 빛이 바랜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4월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4‧19가 학생, 시민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이지만 군이 절대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사태를 수습했기 때문이다. 이후 집권한 민주당이 잘했다면 좋았는데 그렇지 못하여 5‧16이 일어났고, 군부가 집권한 데 대해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 4‧19 당시 군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축소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5. 참고자료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길사, 1990
『한미관계20년사(1945~1965년)』, 도널드 스턴 맥도날드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1950년대반 옮김, 한울, 2001
『4‧19혁명』, 김정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웅진, 2008
『4월혁명통사』 10,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
『새로운 4‧19』, 안동일,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
《동아일보》‧《경향신문》‧《조선일보》‧《한국일보》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운용(군인판사)_구술자료상세목록.pdf 7636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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