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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문영
- 면담자
- 민족문제연구소(윤무한, 김승은)
- 구술일자
- 2010년 7월 23일
- 구술장소
- 서울 쌍문동 구술자 자택
- 구술시간
- 1시간 24분 32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1927년 출생 1960년 당시 고려대학교 전임강사로 재직 중 4‧25 교수단 시국선언 참여
- 구술내용 요약
-
구술자는 192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1960년 당시 고려대학교 전임강사를 맡고 있었고, 4‧25 교수단 시위 사진의 좌측 끝 네 번째(다섯 번째)가 본인이라고 했다.그날 고려대 교수휴게실에서 서울의 대학교수들이 모이기로 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서울대 교수회관으로 가서 서명을 하고 시위에 나섰다. 4‧25가 있기 며칠 전부터 교수회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주로 연배가 있는 교수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본인과 같은 소장층 강사들은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고 한다.4월 25일에는 4‧18과 4‧19로 부상당한 대학생들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한 뒤라 시위 진행과정에서 별다른 긴장감은 없었다. 이 날 고려대 교수휴게실에 모여 있던 몇몇 교수들과 함께 서울대 교수회관인 함춘원으로 가서 서명을 했고, 누군가 낭독을 한 후 열을 지어서 담담한 표정으로 시위에 나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을 했다. 마지막으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수단은 해산하고 귀가했다.이런 4월혁명은 혁명을 등에 업고 '한 자리' 씩을 차지한 이들과 5‧16쿠데타로 실패했다고 한다. 교수단에 참여한 인사들 중 순수한 분들이 모여 국가의 진로와 방향에 대해 고민했어야 하지만 모두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데 있어 4‧25 교수단 시국성명과 시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들 하지만, 사실은 4‧18, 4‧19가 가장 컸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승만대통령이 그 자신을 물러나라고 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저항을 했던 시위대에 감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4‧18 고대생 시위의 역할을 크게 평가하면서, 1개 대학의 시위가 대통령의 하야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고 평가했다.결국 4‧25 교수단 시국선언과 시위는 이러한 순수한 저항을 치다꺼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5. 참고자료《경향신문》 1962.4‧25, 「오늘 敎授'데모' 두 돌 經緯는 이렇다」《동아일보》 1963.4‧25, 「革命의 巨樹 이룬 겨자씨 한 알 (6)敎授 '데모'」《경향신문》 1964‧4‧25, 「敎授데모 秘話」『民主革命의 발자취 : 全國各級學校 學生代表의 手記』, 李綱鉉 編, 正音社, 1960『사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3『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인, 2001.11『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8『4월혁명통사』,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4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이문영(4.25교수단시위)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5649KB